고사성어(古事成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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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기술인 2017. 11. 1. 14:22

고사성어660개모음



간담상조(肝膽相照)

자신의 간과 쓸개를 보여 주듯이,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고 가까이 사귄다는 말로,
매우 가까운 사이를 이름.



건곤일척(乾坤一擲)

하늘과 땅을 단판 승부에 건다는 뜻으로,
운명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를 겨룬다는 점에서
매우 위급한 상황을 뜻함.
건다는 뜻으로, 운명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를 겨룬다는 점에서 매우 위급한 상황을 뜻함.

견물생심(見物生心)
전혀 욕심이 없다가도 직접 눈앞에 있는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말임.


결초보은(結草報恩)
은혜를 입은 사람이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풀포기를 묶어 놓아 적이 걸려 넘어지게 만들어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줬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반드시 은혜를 갚는다는 말임.
계명구도(鷄鳴狗盜) 닭이 우는 소리와 개 도둑을 말하는 것으로 보잘 것 없는 재주도 쓰일 때가 있다는 말임.

고복격양(鼓腹擊壤) 세상이 태평하고 의와 식이 풍부함.
나라에 근심이 없고 백성이 편안하게 잘 사는 것을 말함.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건이 온다는 뜻으로, 온갖 고생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고 나면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말임.


공중누각(空中樓閣) 허공에 집을 짓는 것처럼 믿을 만한 근거나 현실적인 밑바탕이 전혀 없이 이루어진 일이나 사물을 일컫는 말임.


교각살우(矯角殺牛) 쇠뿔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 일을 망치는 것을 말함.
구우일모(九牛一毛) 사마천(司馬遷)의 <임안(壬安)에 보내는 글> 가운데의 이야기로 아홉 마리 소에서 뽑아낸 털 한 개라는 뜻. 아주 많은 가운데서 가장 적은 것을 말함.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 번 꺽어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산길이 매우 험하게 꼬불꼬불한 것을 이름. 또 세상이 너무 복잡하여 살아가기 몹시 어렵다는 뜻으로 쓰임.


권모술수(權謀術數)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고 사용함.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를 일으키는 형세로 다시 온다는 데서 나온 말로, 어떠한 일에 한 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온다는 뜻임.


금상첨화(錦上添花)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으로, 좋은 일 위에 또 좋은 일이 겹쳐서
생겼음을 말함.
기우(杞憂)

중국의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이름.



남선북마(南船北馬)
남쪽에서는 배를 타고 북쪽에서는 말을 탄다는 뜻으로, 항상 이곳 저곳 쉴새없이 돌아다님.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유능한 사람은 어디에 숨어 있어도 그 실
력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처럼 사람들의 눈에 뜨인다는 말임.


내우외환(內憂外患)
안에도 밖에도 근심거리가 있음.

노심초사(勞心焦思)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워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몹시 애를 태움.



녹의홍상(綠衣紅裳)
연두색 저고리에 다홍색 치마라는 뜻으로, 젊은 여인이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을 보고 이르는 말임.




누란지세(累卵之勢)
포개놓은 알처럼 몹시 위태로운 형세라는 뜻으로,일이나 상황이 안정되거
나 안하지 않고 언제 무너져서 깨어질지 모르는 염려스러운 형세를 가리킴.

다기망양(多岐亡羊)
갈림길이 많으면 양을 잃어버린다는 뜻으로, 주장이나 정책들이 너무 많으
면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말.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음.


당구풍월(堂狗風月)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뜻으로,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과
있게 되면 그 영향을 받아 변화될 수 있다는 말임.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더디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성공한다는 말


대의멸친(大義滅親)
큰뜻을 위하여는 친족도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큰 명분을 위하여서 작
은 것을 희생한다는 말임.



도청도설(道聽塗說)
길거리에 떠돌아 다니는 뜬소문.



도탄지고(塗炭之苦)
수렁이나 불길 속에 빠져서 고통스럽다는 뜻으로, 몹시 고생스러운 상황에
놓였을 때 쓰는 말임.


동량지재(棟梁之材)
대들보가 되는 재목이란 뜻으로, 크고 훌륭한 인재를 말함.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는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뜻으로, 비슷한 고통이나
비슷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는 마음이 통한다는 말임.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보
기에는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는것 같으나 마음 속으로는 서로 다른 생각
을 한다는 말임.
등화가친(燈火可親)
등잔불을 가까이하여 친하게 된다는 뜻으로, 독서하기가 좋다는 말임.



막역지우(莫逆之友)
마음이 서로 맞아 거스르는 일이 없어 살고 죽고 흥하고 망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즉 매우 친한 친구를 말함.




만경창파(萬頃蒼波)
한없이 넓은 바다와 강의 푸른 물결이라는 뜻으로, 바닷가 매우 넓어서 끝
이 보이지 않고, 강 또한 매우 커서 물결이 푸를 때 쓰는 말임.




만신창이(滿身瘡痍)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뜻으로, 신세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말로 쓰임.


망국지음(亡國之音)
나라를 망칠 음악이라는 뜻으로, 그 시대에 유행하는 음악이 너무 난잡하
다고 느낄 때 쓰임.



맹모삼천(孟母三遷)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뜻으로,
교육에는 환경이 대단히 중요함을 이름.





맹인모상(盲人摸象)
앞 못 보는 소경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사물의 일부만 알고 전체를
모르면서 결론내리는 것을 빗대어서 쓰는 말임.


면종복배(面從腹背)
얼굴을 대하여서는 복종하는 체하지만, 속으로는 배반한다는 말임.


명경지수(明鏡止水)
맑고 깨끗하여 티 하나 없는 거울처럼 정지되어 고요히 담겨 있는 물,
또는 고요한 심경을 이름.



명실상부(名實相符)
이름과 실상이 꼭 들어맞는다는 뜻으로, 어떤 것의 위치나 지위가 그 자리
에 실제와 꼭 들어맞음을 뜻함.



명약관화(明若觀火)
불을 보듯 훤하다는 뜻으로, 어떤 사태나 일의 되어가는 모양이 명백함을
일컬음.



명철보신(明哲保身)
일을 잘 처신하여 몸을 잘 보전함을 이름.




모순(矛盾)
어떤 방패로도 당해내지 못하는 창과 어떤 창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에 쓰이는 말임.



목민지관(牧民之官)
백성을 잘 계몽하는 관리를 뜻하는 것으로, 고을의 원이나 수령을 말함.



목불인견(目不忍見)
상황이 몹시 딱하고 처참하여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음을 이름.




묘항현령(猫項懸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뜻으로, 행도으로 옮길 수도 없는 일들을 쓸데
없이 의논하는 경우를 일컬음.



무릉도원(武陵桃源)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별천지를 뜻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항상 찾
으려고 노력하며 꿈에서도 그리는 살기 좋은 곳을 이름.
무용지용(無用之用)
언뜻 보면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 구실을 하
여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는 뜻임.
문경지교(刎頸之交)
친구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를 말함.

문외한(門外漢)
어떤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없거나 그 일에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그 분야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이름.
문전성시(門前成市)
대문 앞에 장이 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쓰는 말임.
문전작라(門前雀羅)
문 앞에 새 그물을 칠 만큼 한적함.
반근착절(盤根錯節)
서린 뿌리와 엉클어진 마디란 뜻으로, 뒤얽혀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비
유하는 말임.
방약무인(傍若無人)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뜻으로, 멋대로 하는 행동을 말함.
백년하청(百年河淸)
중국의 황하가 항상 흐려 맑을 때가 없다는데서 나온 말로, 아무리 오래
되어도 이루기 힘든 소망을 뜻함.

백면서생(白面書生)
얼굴이 창백한 선비라는 뜻으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말함.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없이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감.
백척간두(百尺竿頭)
높은 장대 끝에 섰다는 말로,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을 말함.
복마전(伏魔殿)
마귀가 숨어 있는 전당이라는 뜻으로, 음모가 그치는 일 없이 꾸며지는 곳을 말함.
부화뇌동(附和雷同)
자기의 뚜렷한 생각이나 주장이 없이 남들의 의견을 그대로 좇아 따르거
나 덩달아서 같이 행동함을 이름.
분골쇄신(粉骨碎身)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는 뜻으로, 많은 고생을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겠다는 말임.

분서갱유(焚書坑儒)
진시황이 학자들이 비판을 일삼는다 하여 책을 불사르고 생매장한 일.
불혹지년(不惑之年)
세상 일에 분별없이 말려들지 않는 40세를 말함.
비일비재(非一非再)
한두 번이나 하나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매우 흔하고 자주 일
어나는 모양을 일컬음.
사상누각(砂上樓閣)
모래 위에 세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번듯해 보이나 기초
가 약하여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임.

사족(蛇足)
뱀을 그리는데 실제로는 없는 발을 그려 넣어서 원래의 모양과 다르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도리어 틀려짐을 비유하는 말임.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여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완전 고립
상태를 가리켜 말함.
사필귀정(事必歸正)
세상 모든 일들이 처음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해 한때 잘못되었더라
도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져 바르게 되어 돌아온다는 말임.
산전수전(山戰水戰)
산에서의 싸움, 물에서의 싸움을 모두 겪었다는 뜻으로, 세상 일의 온갖
고난을 겪은 경험을 비유해서 말함.
산해진미(山海珍味)
산과 바다의 산물을 다 갖춰 아주 잘 차린 진귀한 음식이라는 뜻으로, 갖
가지 맛있는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은 것을 비유해서 일컬음.
살신성인(殺身成仁)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다는 뜻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을 위해서는 자
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지키려 할 때 쓰임.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 촉한의 임금 유비가 제갈양의 초가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가 간청하
여 제갈양을 자신의 군사(軍師)로 맞아들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인재
를 맞아들이기 위해 여러번 찾아가서 예를 다하는 일을 일컬음.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에 있는 모든 현상을 말함.

상가지구(喪家之狗)
상가집의 개란 뜻으로, 여위고 수척한 모습을 말함.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뜻으로, 세상이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는 뜻.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이 맑을 수 없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뜻.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에 있어서의 길흉화복은 항상 뒤바뀌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는 뜻
으로,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나쁜 일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고 좋은 일이 있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라는 말임.

수구초심(首邱初心)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굴 쪽으로 두고 죽는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임.


수서양단(首鼠兩端)
쥐가 구멍에서 고개만 내밀고 이쪽 저쪽을 살핀다는 뜻으로, 양다리를 걸
친 상태에서 이익이 되는 쪽을 택하려고 눈치만 보는 사람을 비웃을 때 쓰
임.
수수방관(袖手傍觀)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본다는 뜻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그냥 옆에서 보고만 있을 때에 비유해서 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다는 뜻으로, 이해관계가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온전히 보전하기 어려움을 말함.

신출귀몰(神出鬼沒)
신이나 잡귀가 자유자재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여 걷잡을 수 없다는
뜻으로, 언제 어디에 나타났다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것을 이름.

십맹일장(十盲一杖)
소경은 많은데 지팡이는 하나뿐이라는 뜻으로, 꼭 필요한 물건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뜻.

십시일반(十匙一飯)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만 덜어내도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밥이 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도울 수 있음을
말함.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매우 친밀하게 사귀어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를 말함.

아비규환(阿鼻叫喚)
지옥에서 아우성을 친다는 뜻으로, 처참한 지경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양을 말함.

아전인수(我田引水)
내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남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처
리한다는 말임.
안하무인(眼下無人)
자기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교만한 사람을 일컬음.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두운 가운데서 손으로 더듬으며 힘들여 찾는다는 뜻으로, 확실한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시도해 보는 것을 말함.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성년이 되었음을 말함.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훌륭한 체하지만
뒤로는 비겁한 해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임.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듣는다는 뜻으로, 남이 진심으로 해 주는 말을
들었을 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본인 자신에게는 진정한 도움이 된
다는 말임.
양입계출(量入計出)
수입을 헤아리고 지출을 계획함.
어부지리(漁父之利)
도요새와 조개가 싸우고 있을 때에 어부가 쉽게 둘 다 잡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둘이 싸우다가 엉뚱한 사람에게 물건이나 공적을 빼앗긴다는 말임.
어불성설(語不成說)
말의 앞뒤가 사리에 맞지 않고 일이 이치에 전혀 맞지 않을 때 쓰는 말임.
억강부약(抑强扶弱)
강자는 억누르고 약자를 도와줌.
언어도단(言語道斷)
본뜻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칭찬하는 말이나, 오늘날은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치 않는 것을 일컬을 때 쓰임.

언중유골(言中有骨)
말 속에 뼈가 있다는 뜻으로, 언뜻 들으면 농담 같지만 되새겨 보면 그 말
속에 어떤 뜻이 있음을 말함.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되지도 않을 엉뚱한 것을 소망함을 말함.
오리무중(五里霧中)
후한 시대에 장해라는 학자가 도술로 사방 5리에 안개를 피워대는 바람에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헤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어떤 일에 단서가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쓰는 말임.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으로, 공교롭게도 어떤 일이 같은 때에 일어
나서 그 일로 인하여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함.
온 말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일해야 할 경우를 말함.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중국 양(梁)나라 혜왕(惠王)과 맹자의 문답 속에서 나온 말로, 얼마간의 차
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뜻임.
오월동주(吳越同舟)
원수지간인 오나라 군사와 월나라 군사가 같은 배에 탔다는 고사에서 나
오합지졸(烏合之卒)
까마귀떼는 차례를 지키지 않고 모이거나 흩어진다는 데서 나온, 갑자기
모인 훈련이 안된 군사를 이름.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잘 알고 익혀 두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
다는 말임.
용두사미(龍頭蛇尾)
머리는 용처럼 거창하나 꼬리는 뱀의 꼬리처럼 하찮다는 뜻으로, 처음 시
작은 거창하고 휼륭하지만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해지는 것을 말함.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虞公)이 산을 옮겼다는 뜻으로, 정성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임.
우이독경(牛耳讀經)
소 귀에 경읽기라는 뜻으로, 옆에서 아무리 얘기해 줘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함.
우후죽순(雨後竹筍)
비 온 뒤에 솟는 죽순 같다는 뜻으로, 어떤 일들이 한꺼번에 많이 일어나
는 것을 말함.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손을 잡고 가까운 나라를 침.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다는 뜨스로,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해 두면 어려운 일이나 뒷걱정이 없다는 말임.
유유상종(類類相從)
마음이 맞거나 성격 또는 생각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모여
서 친구가 된다는 말임.
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을 하면 모든 게 수상하다는 말임.
이구동성(異口同聲)
여러 사람의 입은 다르나 여러 사람의 말은 같다는 말임.
이심전심(以心傳心)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각이 전해져서 서
로 통함을 이름.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남의 의심을 받을 만
한 일을 하지 말라는 뜻.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누워 자며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랜 날을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말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의 이익을 얻는다는 말임. 일석이조(一石二鳥)
와 같은 뜻임.
일도양단(一刀兩斷)
한 칼로 두 동강을 내듯 선뜻 일을 해치운다는 말임.
일망타진(一網打盡)
한 번 그물을 쳐서 일당을 단번에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오늘날에는 범
죄 수사 등에서 범인들을 한꺼번에 모두 체포했을 때 사용함.
일어탁수(一魚濁水)
물고기 한 마리가 물 전체를 흐리게 한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잘못한 것
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됨을 말함.
일일삼추(一日三秋)
하루가 삼 년 같다는 뜻으로, 하루를 넘기기가 매우 힘겹고 지루함을 말
함. 또 무엇을 몹시 애태우며 기다릴 때를 가리키기도 함.
일촉즉발(一觸卽發)
조금만 닿아도 곧 폭발하다는 뜻으로, 매우 아슬아슬하고 긴장되어 있는
상태를 말함.
일취월장(日就月將)
하루가 드라고 한 달이 다르게 발전해감.
자가당착(自家撞着)
자기가 한 말이나 글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특히 말과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을 때를 말함.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되려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
을 나무라는 것을 말함.

전광석화(電光石火)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번쩍이는 불꽃과 같다는 뜻으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짧고 덧없는 시간을 말함.
또 행동이나 동작이 매우 재빠름을 이르기도 함.
전전긍긍(戰戰兢兢)
전쟁터에 나가 벌벌 떠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확
실하게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가리킴.
전차복철(前車覆轍)
앞의 수레가 넘어진 바퀴 자국이라는 뜻으로, 앞 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삼아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말임.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으로, 갑자기 불행을 당했을 경우 그것
을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임.
절차탁마(切磋琢磨)
돌이나 옥을 갈고 닦아서 훌륭한 물건으로 만들어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덕행, 기술 등을 향상시켜 나가는 것을 일컬음.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의 개구리란 뜻으로, 좁은 곳에만 있어서 넓은 사회와 세계의 형편
을 모르는 것을 말함.
정문일침(頂門一鍼)
정수리에 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해 따끔한 비판을 하
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타이를 때 씀.
조강지처(糟糠之妻)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한 아내를 이름.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라는 뜻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의
차이만 생가가여 그 결과가 똑같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말함.
또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이는 것을 비유하기도 함.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 것이 없음을 나타냄.
주객전도(主客顚倒)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본래의 자리가 뒤바뀐 것을 보
고 하는 말임.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뜻으로,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을 탓하지 않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음을 말함.
주마가편(走馬加鞭)
달리는 말에 계속 채찍질을 한다는 뜻으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고 있
는 사람을 더욱 부추기거나 몰아친다는 말임.
주마간산(走馬看山)
달리는 말 위에서 산의 경치를 구경한다는 뜻으로, 자세하게 못 보고 대충
대충 보고 지나친다는 말임.죽마지우(竹馬之友)
대나무 말을 타고 놀던 친구라는 뜻으로, 어릴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는 말임.
중구난방(衆口難防)
여러 사람의 말은 막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말임.
지리멸렬(支離滅裂)
갈갈이 찢기고 헝크러져서 일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말임.
창해일속(滄海一粟)
넓고 깊은 바다에 떨어진 한 알의 좁쌀이란 뜻으로, 매우 작아서 눈에 띄
지 않거나 보잘것 없는 존재.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으로, 가을에는 식욕이 왕성하여 살이 찐다
는 것을 일컬음.
천려일실(千慮一失)
천 가지 생각 중에 한 가지쯤은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임.천방지축(天方地軸)
일의 앞뒤를 재어 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덤벼드는 것, 또는 너무 급해서
정신없이 날뛰는 모양.
천양지차(天壤之差)
어떤 것이 하늘과 땅처럼 엄청나게 차이가 있음을 말함.
천우신조(天佑神助)
하늘과 신령의 도움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
어질 수 없는 일과 상황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를 말함.
천의무봉(天衣無縫)
인간이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자연 그대로란 뜻으로, 훌륭한 시나 글, 그림
등이 꾸밈없이 완전함을 말함.
천재일우(千載一遇)
천 년에 한 번 있을 정도의 좋을 기회라는 뜻으로, 최고의 좋은 기회를 말함.
촌철살인(寸鐵殺人)
한 치의 못으로도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작은 것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침을 말함.
청출어람(靑出於藍)
배운 사람이 가르친 사람보다 나을 때 쓰는 말임.
침소봉대(針小棒大)
작은 바늘을 큰 몽둥이로 말하듯이 작은 것을 과장해서 말함.
타산지석(他山之石)
다른 산에서 난 나쁜 돌도 자기의 구슬을 가는 데 쓸모가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신의 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임.
태두(泰斗)
여러 사람이 우러러보는 북두칠성에서 옮겨 온 말로, 남에게 우러러보이는
뛰어난 인물을 일컬음.
파사현정(破邪顯正)
잘못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른 것을 드러냄.
파죽지세(破竹之勢)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은 기세라는 뜻으로,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
도로 막힘없이 무찔러 나아가는 맹렬한 기세를 말함.
팔방미인(八方美人)
무슨 일이든지 잘 처리해내는 사람을 말함.
패군지장(敗軍之將)
실패한 사람은 그 일에 대하여 의견을 말할 자격이 없음을 일컬음.
평지풍파(平地風波)
평평한 땅에 바람이 인다는 뜻으로, 뜻하지 않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말
함.
포호빙하(暴虎馮河)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배 없이 강을 건넌다는 뜻으로,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없이 무모하게 용기만 내는 것을 말함.
풍비박산(風飛雹散)
사람의 잘못이나 자연 현상으로 인해 입은 재난으로 말미암아 가족이나
재산이 한꺼번에 없어지거나 흩어지는 모양을 말함.
풍수지탄(風樹之嘆)
부모님이 돌아가시어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음을 탄식한다는 말임.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잔불이라는 뜻으로, 사정이 매우 위태로움을 말함.
필부지용(匹夫之勇)
생각없이 날뛰는 소인의 용기라는 뜻으로, 소인들이 자신의 혈기만 믿고
함부로 덤비는 것을 말함.
해로동혈(偕老同穴)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뜻으로 삶과 죽음을
같이 할 부부의 맹세를 말함.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딧불과 흰눈 빛으로 공부하여 뜻을 이룬다는 말로, 가난 어려움을 견디
며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것을 이름.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뜻으로, 실력도 없으면서
배경만 믿고 날뛰는 것을 가리킴.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마귀가 많다는 뜻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방해가 되는 일
이 많다는 말임.
호연지기(浩然之氣)
마음을 비워서 욕심이 없고 바르며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음을 가리
킴.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살피고 아침에는 자리를 돌아본다는 뜻으로, 자식이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 안부를 여쭈어 살펴드리는 것을 말함.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이 넘도록 피어 있는 꽃은 없다는 뜻으로, 크게 번성하면 반드시 쇠하
여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을 말함.


후생가외(後生可畏)

젊은이들이 두렵다는 뜻으로,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장차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이 있으니 자신을 소중히 하라는 말임.

각골난망(刻骨難忘)
남의 은혜가 마음깊이 세겨져 잊혀지지 아니함.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혹하게 받고 강제로 청구하여 국민을 못 살게 구는 일.


각주구검(刻舟求劍)
옛날 楚(초)나라 사람이 나루를 건너다가 물속에 칼을 떨어뜨리고 그 떨어진 장소에 표를 해놓는다고 뱃전을 깎아 두었다가 그 표지 밑의 물에 들어가 칼을 찾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말.

감정선갈(甘井先竭)
맛이 좋은 우물은 길어가는 사람이 많아 빨리 마른다는 말로, 재능있는 훌륭한 사람이 일찍 쇠잔함을 이르는 말.

감지덕지(感之德之) 덕으로 느낀다. 곧 매우 고마움을 나타내는 말.

甘呑苦吐(감탄고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으로, 사리에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안으면 싫어한다는 뜻.

改過遷善(개과천선)
허물을 고치어 착하게 됨.

開門納賊(개문납적)
문을 열고 도적을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말로, 제 스스로 화를 만듦을 비유.

蓋世之才(개세지재)
세상을 마음대로 다스릴 만한 뛰어난 재기


去頭截尾(거두절미)
머리와 꼬리를 자름. 일의 요점만 이야기 함을 이름


隔世之感(격세지감)
세대를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
다른 세대와 같이 몹시 달라진 느낌. 세월이 많이 지난 것 같은 느낌.



隔靴搔痒(격화소양)
신을 신고 가려운데를 긁는다 함이니
① 마음으로는 애써 하려하나 실제 효과는 얻지 못한다는 말.
② 답답하여 안타깝다는 말



牽强附會(견강부회)
이론이나 이유 등을 자기편에 유리하도록 끌어 붙힘.



犬馬之勞(견마지로)
개와 말의 노력, 임금이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노력.




見蚊拔劍(견문발검)
모기를 보고 칼을 뺌. 곧 적은 일에 허둥지둥함.



謙讓之德(겸양지덕)
겸손하고 사양하는 미덕.



輕擧妄動(경거망동)
경솔하고 망녕된 행동.



敬而遠之(경이원지)
①겉으로는 공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멀리함.
②존경하기는 하되 가까이 하지는 아나함. 준)敬遠



傾國之色(경국지색)
나라가 기우러질 만큼의 뛰어난 미모. 예)양귀비,서시.



敬天愛人(경천애인)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


鷄口牛後(계구우후)
닭의 입과 소의 꼬리라는 말로
큰 단체의 꼴찌가 되어 붙쫓는것 보다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뜻.



鷄卵有骨(계란유골)
달걀에도 뼈가 있다는 말로, 공교롭게 일이 방해됨을 이르는 말.




鷄卵投石(계란투석)
계란으로 바위치기.



孤軍奮鬪(고군분투)
① 외로운 군력으로 대적과 싸움.
② 홀로 여럿을 상대로 싸움.



苦盡甘來(고진감래) 쓴것이 다하면 단것이 옴.
곧 고생이 끝나면 영화가 온다는 뜻. 반)興盡悲來(흥진비래)



枯木開花(고목개화) 마른 나무에 꽃이 핌.




困窮而通(곤궁이통) 궁하면 통한다.



骨肉相爭(골육상쟁)
뼈와 살이 서로 싸운다는 말로 동족끼리 서로 싸움을 비유함. 예)6.25 한국전쟁




公明正大(공명정대)
전혀 사사로움 없이 공번되고 명백함.




攻彼考我(공피고아)
상대를 공격하려면 자기 자신를 먼저 살펴야 함.



空行空返(공행공반)
행하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소득도 없다.



誇大妄想(과대망상)
턱앖이 과장하여 그것을 믿는 망녕된 생각.



過猶不及(과유불급)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침은 도리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



管鮑之交(관포지교)
중국의 '관중과 포숙 같은 친교'라는 뜻으로, 친구사이가 다정함을 일컬음.



巧言令色(교언영색)
남의 환심(歡心)을 사기 위하여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좋게 꾸미는 얼굴빛.



敎學相長(교학상장)
가르치고 배우면 서로가 성장한다.



九曲肝腸(구곡간장)
굽이굽이 사무친 마음 속.



舊官名官(구관명관)
옛날 어느고을에 새로 부임한 사또가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보다 못한 임금은 전에 있던 사또에게 다시 그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고을은 다시 예전의 살기좋은 고을이 되었다는 데서 신참보다는 경험자가 훨씬 낫다는 뜻.



救國干城(구국간성)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이나 인물.



九死一生(구사일생)
꼭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





口尙乳臭(구상유취)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으로 언어와 행동이 매우 유치함을 일컬음.



群鷄一鶴(군계일학)
많은 닭 가운데서 한 마리 학. 곧 많은 사람 중에서 뛰어난 인물.



軍令泰山(군령태산)
군대의 명령은 태산같이 무거움.



軍雄割據(군웅할거)
많은 영웅들이 각지에 자리잡고 서로 세력을 다툼.



權不十年(권불십년)
아무리 높고 센 권세라도 십년을 가지 못한다. 즉 세상은 무상하여 늘 변한다는 뜻.
비)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橘化爲枳(귤화위지)
귤이 변해서 탱자가 됨. 환경의 영향이 크다는 뜻.



近墨者黑(근묵자흑)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로 악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버릇이 물들기 쉽다는 뜻.



金科玉條(금과옥조)
아주 귀중한 법칙이나 규범.



錦上添花(금상첨화) 비단위에 꽃을 더함.
① 좋고 아름다운 것. ② 좋은 일이 겹친다는 뜻.




琴瑟之樂(금슬지락)
부부사이의 화락하고 다정함의 비유.



錦衣還鄕(금의환향)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말. 곧 출세나 성공을 하여 고향에 돌아 간다는 말.



金枝玉葉(금지옥엽)
① 임금의 집안과 자손. ② 귀한 자손.



落落長松(낙락장송)
가지가 축축 길게 늘어지고 키가 큰 소나무.



難攻不落(난공불락)
치기 어려워 함락하지 못함.



亂兄亂弟(난형난제)
형이라 부르기도 어렵고 아우라 부르기도 어렵다.
즉 실력이 비등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움.


老馬之智(노마지지) '늙은 말의 지혜'라는 뜻.
①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이 소중하여 결코 무시할 수 없음.
② 아무리 쓸모 없이 생각되는 사람의 지혜라도 언젠가는 요긴할 때가 있음.


綠陰芳草(녹음방초)
푸른 나무 그늘과 꽃다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論功行賞(논공행상) 세운 공을 논정하여 상을 줌.



多才多病(다재다병) 재주가 많은 사람은 흔히 몸이 약하며 잔병이 많음.



單刀直入(단도직입) 너절한 허두를 빼고 요점이나 본론을 바로말함.



膽大心小(담대심소)
담력은 커야 하지만 마음을 쓰는데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



大同小異(대동소이)
① 작게 보면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다는 말.
② 같은 것이 많고 다른것이 적다는 말. 즉 거의 똑같다는 말.
비)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大義名分(대의명분)
인륜상의 중대한 의리와 도덕상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의 행위의 한계.




桃園結義(도원결의) 삼국지에서 나온 말로,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밑에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데서 나온 말.



獨不將軍(독불장군)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
저 혼자 잘난체 하며 뽐내다가 남에게 핀잔을 받고 고립된 처지에 있는 사람.


獨守空房(독수공방) 빈 방을 홀로 지킴.
남편과 아내가 함께 거처하지 못함.
즉 외로움을 표현하는 말.



獨也靑靑(독야청청) ① 홀로 푸르름,
② 홀로 높은 절개를 들어내고 있음.



同價紅裳(동가홍상)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곧 같은 값이면 품질이 좋은 것을 가진다는 뜻.



同苦同樂(동고동락)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함.




東問西答(동문서답) 동쪽가는 길을 문는데 서쪽가는 길을 가르처 줌.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



同門受學(동문수학)
한 스승 밑에서 같이 배움.




東奔西走(동분서주) 이리저리로 몹시 바쁘게 다님.



杜門不出(두문불출)
자기 집에만 박혀 있으면서 밖(세상)에 나가지 않음.



燈下不明(등하불명)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것은 도리어 알아내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燈火可親(등화가친)
가을밤은 서늘하여 등불을 가까이 두고 글을 읽기에 좋다는 말.



馬耳東風(마이동풍) 말 귀에 봄바람.
곧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음을 이르는 말. 동)牛耳讀經(우이독경)



莫上莫下(막상막하) 위도 될 수 없고 아래도 될 수 없음.
즉 실력의 동등함을 나타내는 말.



萬卷讀破(만권독파) 만권이나 되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음.
곧 학식이 깊다는 뜻.



萬事休矣(만사휴의)
모든 방법이 헛되게 됨.



滿山遍野(만산편야)
산과 들에 가득차서 뒤덮여 있음.



滿山紅葉(만산홍엽)
단풍이 들어 온 산이 붉은 잎으로 뒤덮여 있음.



老馬之智(노마지지) '늙은 말의 지혜'라는 뜻.
①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이 소중하여 결코 무시할 수 없음.
② 아무리 쓸모 없이 생각되는 사람의 지혜라도 언젠가는 요긴할 때가 있음.



綠陰芳草(녹음방초)
푸른 나무 그늘과 꽃다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論功行賞(논공행상)
세운 공을 논정하여 상을 줌.



累卵之世(누란지세) 계란이 쌓여 있는것 같이 위태로운 세상을 말함.



多多益善(다다익선) 많을수록 더욱 더 좋음.




多才多病(다재다병) 재주가 많은 사람은 흔히 몸이 약하며 잔병이 많음.




單刀直入(단도직입) 너절한 허두를 빼고 요점이나 본론을 바로말함.




膽大心小(담대심소) 담력은 커야 하지만 마음을 쓰는데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



大器晩成(대기만성) 큰 인물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大同小異(대동소이) ① 작게 보면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다는 말.
② 같은 것이 많고 다른것이 적다는 말. 즉 거의 똑같다는 말. 비)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大義名分(대의명분)
인륜상의 중대한 의리와 도덕상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의 행위의 한계.



桃園結義(도원결의) 삼국지에서 나온 말로,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밑에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데서 나온 말.


獨不將軍(독불장군)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
저 혼자 잘난체 하며 뽐내다가 남에게 핀잔을 받고 고립된 처지에 있는 사람.


獨守空房(독수공방) 빈 방을 홀로 지킴. 남편과 아내가 함께 거처하지 못함.
즉 외로움을 표현하는 말.


獨也靑靑(독야청청) ① 홀로 푸르름,
② 홀로 높은 절개를 들어내고 있음.


同價紅裳(동가홍상)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곧 같은 값이면 품질이 좋은 것을 가진다는 뜻.



同苦同樂(동고동락)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함.



東問西答(동문서답) 동쪽가는 길을 문는데 서쪽가는 길을 가르처 줌.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



同門受學(동문수학) 한 스승 밑에서 같이 배움.


同病相憐(동병상련)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돕고 위로함.



東奔西走(동분서주) 이리저리로 몹시 바쁘게 다님.



同床異夢(동상이몽)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꿈.
곧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가진다는 뜻.



杜門不出(두문불출) 자기 집에만 박혀 있으면서 밖(세상)에 나가지 않음.


燈下不明(등하불명)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것은 도리어 알아내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燈火可親(등화가친) 가을밤은 서늘하여 등불을 가까이 두고 글을 읽기에 좋다는 말.


馬耳東風(마이동풍) 말 귀에 봄바람.
곧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음을 이르는 말. 동)牛耳讀經(우이독경)


莫上莫下(막상막하) 위도 될 수 없고 아래도 될 수 없음.
즉 실력의 동등함을 나타내는 말.



莫逆之友(막역지우) 뜻이 서로 맞는 썩 가까운 친구.


萬頃蒼波(만경창파) 한 없이 너르고 너른 바다.
동)茫茫大海(망망대해)


萬卷讀破(만권독파) 만권이나 되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음.
곧 학식이 깊다는 뜻.



萬事休矣(만사휴의) 모든 방법이 헛되게 됨.



滿山遍野(만산편야) 산과 들에 가득차서 뒤덮여 있음.



滿山紅葉(만산홍엽) 단풍이 들어 온 산이 붉은 잎으로 뒤덮여 있음.



晩時之嘆(만시지탄) 기회를 놓쳐버린 한탄이란 말.


萬折至東(만절지동) 중국의 황하는 만번을 굽었어도 마지막에는 동해에 이른다는 뜻.




罔極之恩(망극지은) 다함이 없는 임금이나 부모의 큰 은혜.



茫然自失(망연자실) 정신을 잃고 어리둥절해 함.



◈가인박명(佳人薄命)◈

〈여자의 용모가 빼어나면 운명이 기박하다〉

두 뺨은 우유 빛을 띠고 머리털은 옻칠을 한 듯
눈빛이 발로 들어와 구슬처럼 빛나네
원래 흰 비단으로 선녀의 옷을 만들고
붉은 연지가 타고난 바탕을 더럽힐 수 없네.
오 나라 말 소리는 귀엽고 부드러워 앳되기만 한데
한 없는 인간의 근심을 전혀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예쁜 여인의 운명 기박하다 하지만
문은 닫은 채 봄이 가면 버들 꽃도 지겠지.

소식(蘇軾)은 북송(北宋) 후기의 대 문장가이다.
그러나 관계(官界)에 들어가서는 일생의 거의 전부를 정적(政敵)과의 항쟁
으로 보내어, 관리로서는 몹시 불행하였다.
극도의 역경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품이나 문학은 매우 자
유롭고 활달하였으며, 기량이 풍부했다. 유학자이면서도 때로는 노장적(老莊
的)이기도 하고, 불가적(佛家的)이기도 하며, 호장(豪壯)하기도 하고, 때로는 섬세하기도 하며, 고답적이면서도 아랫사람들의 인정을 잘 분간하는 모습을 동시에 지닌 큰 영걸(英傑)이었다.
'가인박명'이라는 이 말은 소식(蘇軾)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에 장관으로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
의 아름다웠던 소녀 시절을 생각하며 한 미인의 기박한 운명을 시로서 옮긴
데서 전하여졌다.
하지만, 이 시가 있기 전부터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한 무수한 미인들이, 많은 파란 끝에 결국은 비명에 가는 등, 그 기박한 운명이 역사적 사례로 자리잡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 물려 생각지도 않는 자살을 했고, 양귀비가 안녹산
난의 피난길에서 군인들에게 밟혀 죽었으며, 마릴린 먼로가 36세에 불면증으
로 인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





002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포악한 정치,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오래 전에 저의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변을 당하시고, 얼마 전에는 제 남편이 물려 죽고, 이번에는 저희 자식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곳은 가렴주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법이다."

이 이야기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공자의 설화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을 지나갈 때, 한 부인이 길가에 있는 무덤 앞
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슬프게 들리는지, 공자
는 수레의 앞채에 몸을 기댄 채, 그 울음소리를 귀를 기울이다, 이윽고 제자
인 자로(子路)에게 명하여 묻게 했다.
"부인의 우는소리를 들으니, 무슨 애절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도대
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묻자, 부인이 위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까다로운 정치란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게 하는 정치를 말한다.
낼 힘이 없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거둬들이는 것이 '가렴'일고, 정당한 법적 근거도 없이 강제성을 띤 요구가 '주구'인 것이다.
관리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사느니, 차라리 범에게 물려 죽더라도 한 순간
이나마 마음 편히 살아보자는, 소박하고 순진한 백성의 선택인 것이다.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라는 문장가는, 이 이야기를 근거로 쓴
『뱀을 잡는 사람』이란 글에서 '세금을 많이 거두는 독이 뱀의 독보다 심함
이 있음을 알라'고 경고하였다.




003 ◈각주구검(刻舟求劍)◈

〈세상의 형편에 융통성이 없음을 비유〉

"칼이 떨어진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으니 찾을 수 있겠지."

칼이 물에 빠지자, 배가 움직이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뱃전에 칼자국을 내
어 표시해 두었다가 찾는다는 말로써, 「오씨춘추」의 '찰금편(察今篇)'에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 하나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칼을 안고 양자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는 강 가운데쯤 왔을 때, 그만 아끼던 칼을 물에 빠뜨
리고 말았다. 경황 중에도 얼른 주머니칼을 꺼내 칼이 빠진 부분의 뱃가에 자
국을 내어 표시를 해 놓았다.
'칼이 떨어진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으니,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
고, 배가 도착지에 이르자, 표시된 지점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칼을 찾았
으나, 칼은 없었다.

조나라 효성왕이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보낸 간첩의 말에 따라 염파 장군을 조괄로 대치하려 할 때에, 인상여가 반대 상소를 올리기를, '조괄은 단
지 병법의 이론에만 밝을 뿐, 합변(合變)을 모른다'고 하였다. 융통성을 모르는 장수가 싸움에 승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004 ◈간담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를 내어놓고 볼만큼 친한 친구〉

한 마음으로 서로 친하고 마음을 비춰 보며 담(膽)을 비춰 가며 오래 살세
(同心相親하고 照心照膽하여 壽千春하세)

직역하면 '간과 쓸개를 서로 본다'라는 이 말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라는 뜻으로서, 한 유가 쓴 「柳子厚 墓地 銘」에 있는 글
이다.
중당(中唐)의 문인 한 유는 당송팔대가로서, 평소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생애에 여러 번 곤경에 직면하는 과정에서 참된 우정과 거짓 우정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체험한 참된 우정의 한 예이다.

혁신 관료들과 함께 관료 사회의 혁신을 위한 정책 수행에 온 힘을 기울
이던 한 유는, 보수파에게 밀려서 두 번째로 유주자사에 좌천되었고, 그의 친
구 유몽득도 변경인 파주 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그의 친구 유종원이 울면서 말했다.
"파주 같은 변방 지역은 자네 같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네. 게다가 자네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이 사실을 어떻게 모친께 말씀드릴 수 있
겠는가? 차라리 자네 대신 내가 파주로 가겠다고 지원하겠네."
한유는 친구의 우정에 깊이 감동되어 훗날 「유자후 묘지 명」에 유종원
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아! 사람이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진정한 절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평
상시에는 서로 그리워하고 즐거워하며, 사양하면서 간이나 쓸개도 드러내 보
이고(肝膽相照), 하늘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리면서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
지만, 일단 이해관계가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한다. 함정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기 보다 도리어 함정에 밀어 넣고 돌을 던지기까
지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다."





005 ◈간장막야(干將莫耶)◈

〈명검도 사람의 손이 가야 빛나듯, 사람도 교육해서 선도해야 한다〉

"환공(桓公)의 총(蔥), 태공(太公)의 궐(闕), 문왕(文王)의 녹(錄), 장군(莊君)의 홀(忽), 합려(闔閭)의 간장(干將)과 막야(莫耶)와 거궐(鉅闕)과 벽려(璧閭), 이것이 다 옛날의 좋은 칼이다. 그러나 숫돌에 갈지 않으면, 곧 날카롭지 아니하니, 사람의 힘을 얻지 못하면 곧 자르지 못한다"

1955년 중국에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동검(銅劒)이 출토되었다. 검신(劒身)에 온통 마름모꼴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월왕구천자작자용검(越王勾踐自作自用劒)이라는 아홉 글자가 새 모양의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으며, 칼날 양면에는 남색 유리와 녹송석(綠松石, 터어키돌)이 박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오나라의 명 대장장이인 간장은 왕의 명령을 받고 명검 두
자루를 주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정선한 청동을 모아 녹이려 하는데, 3년이 지나도록 녹일 수
가 없었다. 온갖 노력 끝에 그의 아내인 막야(莫耶)가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노(爐)에 던져 넣고, 여자 아이 300명이 풍구를 불어서 겨우 녹임으로써 주조
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명검의 이름은 대장장이 부부의 이름을 본 따 각각 간장과 막야로 지
어졌다.
위의 글은 순자(旬子)의 '성악편'에 실려 있는 글로서, 순자는 '사람의 성품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성악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청동이 그 자체로는 명검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야
명검이 될 수 있듯이, 사람의 성품은 본래 상태로서 악한 것이니 예(禮)로써 교육시켜야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006 ◈강노지말(强弩之末)◈

〈강한 군사도 원정을 가면 군력이 쇠퇴하기 마련이다〉

"힘찬 활에서 퉁겨 나간 화살도 마지막에는 비단조차 뚫기 어렵다"

「사기(史記)」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에 의하면, 한의 고조는 자기
보다 몇 배의 군사력을 지닌 항우를 패배시킨 후 흉노의 정벌을 위해 출전
했다가 포위되고 말았다. 이 때 진평이 묘안을 내어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
났는데, 이후로 한 고조는 흉노족과 화친을 맺고 매년 선물(供物)을 보냈으
나, 흉노족들은 약속을 어기고 무례한 행동을 많이 했다.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족을 무력으로 응징키로 결정하고 대신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는데, 어사 대부 한안국은 흉노를 공격하기 위한 원
정 계획에 반대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찬 활에서 퉁겨 나간 화살도 나중에는 비단조차 뚫기 어렵습니다."
「화식전(貨殖傳)」에 보면, '백리 먼 곳에 나무를 팔러 가지 않고, 천리
먼 곳에 쌀을 팔러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원리를 가장 잘 이용하여 출세한 사람이 바로 진나라 재상을 지냈던
범수로, 진나라 소왕에게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법을 건의하여 진나라가
육국을 병합하는 길을 열게 했던 것이다.



◈개과천선(改過遷善)◈
007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착한 사람이 되다)

"지난 허물을 과감히 고치어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 주처는 굳게 결심했
다."

진(晋)나라 혜제 때 양흠 지방에 주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태주 벼슬을
한 아버지가 그의 나이 열 살 때 돌아가시자 방탕하고 포악한 사람이 되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남산의 호랑, 장교에 사는 교룡(蛟龍)과 더불어 삼해(三害)
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새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로, 목숨을 건 사투 끝에 호랑이와 교
룡을 죽이고 마을로 돌아왔으나 아무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실
망한 그는 마을을 떠나 등오에 가서 대학자 육기와 육운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육기는,
"굳은 의지를 지니고 지난 날의 과오를 고쳐서 새사람이 된다면(改過遷善)
자네의 앞날은 무한하네."
라고 격려를 해주었고, 주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이후 10여 년 동안 학문과
덕을 익혀 마침내 대학자가 되었다는 데서 개과천선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공자는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허물이며, 허물을 알았으면 고치
기를 꺼리지 말라고 했다.
◈개관사정(蓋棺事定)◈
008
(사람은 죽어 관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장부는 관을 덮어야 일이 비로소 결정된다
그대는 아직 다행히 늙지 않았거늘
어찌 원망하리 초췌히 산속에 있는 것을
심상궁곡은 살 곳이 못된다.
벼락과 도깨비와 미친 바람까지 겸했다."

'관뚜껑을 덮기 전에는 모른다'는 말은 인간의 삶이 변화무쌍하고 영고성
쇠가 다양하기 때문에 관뚜껑을 닫고 난 뒤에야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후의 평가라는 것도 역사적인 인물, 역사적 사건에서나 논의 되는 것이
지 초로인생은 여기에도 해당되지 않고 그저 사라질 뿐이다.
이 시는 두보가 사천성 동쪽 기주의 깊은 산골로 들어와 살고 있을 때, 역
시 거기에 와서 살며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던 친구의 아들인 소혜란
사람에게 편지 대신 보내준 시(詩)이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길가에 버려져 있는 못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앞서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한섬 오래된 물은 교룡을 숨지기도 한다.

이어서 윗 시로 이어진다.
오늘의 충신이 내일의 역적 소리를 듣고, 어제까지 천덕꾸러기 노릇을 하
며 이 집 저 집 얻어먹으며 다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벼
락감투를 쓰게 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처럼 부귀와 성쇠라는 것이 원래 항상 변하기 마련이지만, 세상이 다 변
해도 그 사람만은 틀림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시간과 환경에 따
라 전혀 딴판으로 변하는 수도 적지 않다.
때문에 인간의 종합적 평가는 관뚜껑을 닫은 후에야 비로소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거안제미(擧案齊眉)◈
009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다)

"매일 돌아오면 아내가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양홍의 앞으로 나오는
데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바쳤다."

「후한서」의 '일민전(逸民傳)'에 보면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
(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고 한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현
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
에서, '양홍 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록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자 색시가 궁금하
여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인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
라고 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아내가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아낙네처럼 수수한 차림으로 생활
을 하자, 양홍은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
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가운데 왕실
을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마침내 그것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양홍은 오(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지기
가 되어 지냈다.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늘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
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이를 본 고백통은 그 내외를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여러 면에서 도와주었
고, 덕분에 양홍은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양홍의 훌륭한 저술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서 이룩된 업적인 것이다.
◈거이기양이체(居移氣養移體)◈
010
(처한 위치에 따라 기상이 달라지고 먹고 입는 것에 의해 몸이 달라진다)

"거처는 기상을 변하게 하고 먹고 입는 것은 몸을 달라지게 한다. 사람에
게는 거처라는 것이 참으로 관계가 크다. 다같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냐."

윗 글은 맹자가 제(薺)나라 수도에 가서 제나라 왕자를 보고 탄식하며 한
말이다. 맹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왕자가 살고 있는 집이나 그가 타고 다니는 수레며 말이 대체로 귀한 집
자식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왕자가 달라 보이는 것은 그가 처해 있
는 위치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천하의 넓은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떠하겠느냐?"
위에서 말한 천하의 넓은 곳이란 도를 터득해서 천지와 호흡을 같이하는
성자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맹자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노나라 임금이 송(宋)나라로 갔을 때 한 성문에서 크게 외쳐 불렀다. 그
러자 문지기가 '우리 임금님은 아닌데 어떻게 목소리가 우리 임금님과 같으
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두 임금이 처해 있는
위치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거자불추래자불거(去者不追來者不据)◈
011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물리치지 않는다)

"가는 사람을 붙들지도 않고, 오는 사람을 물리치지도 않으며 진실로 배우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르면 곧 받을 뿐이옵니다."

「맹자(孟子)」의 '진심하편'에 나오는 말로 그가 등(藤)나라에 있을 때였
다.
맹자가 가는 곳마다 가르침을 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어느 날 맹자가 거하는 여관의 일꾼이 미투리를 삼다가 창틀 위에 올려놓
았었는데, 맹자를 찾아온 일행들이 다 돌아간 다음 다시 신을 삼고 창가로 가
보았으나 삼다 둔 미투리는 보이지 않았다. 일꾼은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갔
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맹자 같은 분을 찾아온 사람 가운데도 도둑놈이 있습니다.
라며 맹자에게 항의를 했다.
이 말을 듣고 맹자는,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이 그 신을 훔치기라도 했단 말이오?"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하고 윗글과 같이 말했다
「순자(荀子)」의 '법행편(法行篇)'에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말이라
하여,
"군자는 몸을 바르게 하여 기다릴 뿐이다.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절하
지 않고,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붙들지 않는다."
라고 나와있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가 호향(互鄕)이라는 풍기가 문란한 곳의 한 소
년을 만났다고 해서 제자들이 스승이 왜 그런 곳의 사람을 만나는가 하고 의
아해할 때,
"사람이 자신을 깨끗이 하고 찾아오면 그 깨끗함을 받아들일 뿐 그 과거
를 따질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
고 했다.
이는 천하를 제도하려는 성인의 입장에서 지역 차별이나 인간차별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건곤일척(乾坤一擲)◈
012
(황제의 자리를 놓고 승부를 겨룬다)

"용은 지치고 범은 곤하여 천원(川原)을 나누니
억만 백성은 생명을 보존하였다.
누가 군왕으로 하여금 말머리를 돌리도록 권하여
참으로 하늘과 땅을 건 도박을 벌였던가."

위의 시는 한나라와 초나라 싸움의 한 토막을 읊은 것이다.
한(漢)나라의 유방과 초(楚)나라의 항우는 진(秦)나라를 무너 뜨렸으나, 이
제는 서로가 천하를 독차지하려고 서로 피나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일진일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자 결국 두 사람은 천하를 둘로 나누
기로 약속하고 유방은 홍구의 서쪽을, 항우는 동쪽을 차지하기로 했다. 항우
는 강화조약이 성립되자 군대를 이끌고 철수를 했으며 유방도 조약대로 군대
를 철수하려는데 장량(張良)과 진평(陳平)등이 간언했다.
"지금 초나라는 군대가 지쳐 있으며 식량도 떨어졌습니다. 이 기회야말로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는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말을 듣고 유방은 항우와의 약속을 어기고 말머리를 돌려 철수하는 항
우를 공격해 그를 대패시키고 한왕조(漢王朝)를 세우게 되었다.
시인(詩人) 한유는 장량과 진평이 유방을 도와 패업을 이룩한 사건이야말
로 천지(乾坤)를 건 모험으로 생각하고 홍구를 지날 때 이 감회를 '과홍구(過
鴻溝)'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시로 회상했는데, 그 시가 바로 위의 내용이다.
건곤(乾坤)이란 천지(天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건곤일척'이란 큰
표적(天下)를 두고 얻느냐 잃느냐에 모험을 건 승부를 이야기할 때 비유된다.
◈걸해골(乞骸骨)◈
014
(자신의 몸이나 해치지 말고 돌아가게 해달라)

"천하의 일은 대체로 정하여 졌나이다. 뒷일은 군왕(群王)이 스스로 행하시
오. 원컨대 나는 하골을 빌어 졸오(卒伍)로 돌아가려 하오."

한(漢)과 초(楚)의 싸움에서 초반전은 항우측이 대단히 우세했다. 때문에
만약 한나라가 교묘한 지략과 협상을 않았다면 결과는 한나라의 패배였을지
도 모른다. 다만, 한의 유방은 장량, 진평(陳平)에게 말하고, 그 방책을 물었
다. 그러자 진평은 이렇게 대답했다.
"항우의 강직한 신하는 아보〔亞父, 항우가 범증(范增)을 존경하여 아버지
의 다음가는 사람이란 뜻으로 아보라고 불렀다〕와 종리매(鍾離昧)등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께서 만일 대금을 흐트려 군왕의 사이를 이간시킨다면,
항우는 원래 의심이 많은데다가 참소하는 말을 잘 믿는 성격이므로, 초나라는
내부로부터 붕괴될 것입니다."
한왕은, 황금 4만금을 주어 진평으로 하여금 계획을 실행하게 했다. 진평
은 황금을 뿌려, 많은 첩자들을 초나라 군대 속으로 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하
게 했다.
"종리매(鍾離昧) 등의 장군은 공적이 큰데도, 왕에게 봉(封)함을 받지 못하
여, 항우를 미워하며 한나라에 내통하려 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과연 종이매 등을 신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
직 범증에 대한 신뢰는 어떤 사정이 있어도 한왕에게 사자를 보냈다. 한왕은
진평의 지혜로, 최고급 요리를 갖추어 사자를 맞이했는데 사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나는 아보(亞父)의 사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 항우가 보낸 사자였나?"
하고 말하며 그 요이를 물리치고 거친 요리로 바꾸게 했다.
사자가돌아가서 이 사실을 자세히 항우에게 보고했고, 항우는 범증을 의심
해 그 권한을 축소케 했다.
범증은 항우의 마음속을 알고 크게 노하여 위와 같이 말하고는 항우의 곁
을 떠나 팽성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 노함이 마음의 병으로 번져 도중에 등
창이 나서 죽었고, 그 후 얼마 안되어 항우도 망했다.
유방과 항우의 승패를 가른 싸움은 인간관리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방이 모사와 용장들을 잘 통솔한 반면, 항우는 단 하나의 모사인 범증마저
도 적의 간계로 의심을 했으니 어찌 항우가 지고 유방이 이기지 않겠는가?
◈격물치지(格物致知)◈
015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하게 하고 넓힌다)

"사물에 이르러 앎을 이루고, 뜻을 성실히 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고 집안을 정돈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이다.
주자는 서양철학의 인식론격인 격물치지에 대해 설명하기를,
"세상 만물은 모두 이치를 지니고 있다. 이 이치를 하나씩 추구해 들어가
면 마침내 세상만물의 표리와 정표, 조잡한 것들을 다 밝혀낼 수 있다. 격물
의 격(格)은 도달한다는 것으로 격물은 사물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치지란 만
물이 지닌 이치를 추구하는 궁리와 같은 뜻으로 세상사물에 이르고 이치의
추궁으로부터 지식을 쌓아 올려서 지(知)를 치(致)한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
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다스려야 하고, 그 집안을 다스시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하고, 몸을 닦으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
르게 해야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
게 하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면 먼저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할 것
이다.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을 연구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주자
의 견해이다.
주자의 견해와는 달리 육상산(陸像山)은, '격'을 물리치다, '물'을 물욕(物慾)
의 외물(外物)로 주장한다. 그는 사람이 참다운 지혜(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한다.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은 '격'을 바르게 한다, '물'은 외부 세계의 사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대상(對象)을 가리키게 되고, '지'는 지식
이 아니라 사람이 날 때부터 지니는 마음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즉 맹자가
말한 양지(良知)를 가리키게 된다.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고 부르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초보은(結草報恩)◈
016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개가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오."

춘추시대 진(晋)나라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
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를 개가시키도록 하라."
고 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
들 과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으면 네 서모를 반드시 순사(殉死, 남편과 함께 순장시키는 것)케
하라."
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는,
"사람은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님께서 맑은 정
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라야겠다."
하고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개가시켰다.
그 후 진환공(秦桓公)이 진(晋)을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
다.
진(晋)의 경대부로 있었던 위과(魏顆)는 이 싸움에서 진(秦)의 두희라고 하
는 매우 힘이 센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두희는 위과가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두희의 발 앞에 풀을 엮어(結梢) 그가 걸려 넘어지
게 하여 위과가 두희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결전이 끝난 후 위과는 자기를 도와준 그 노인이 누굴까 하는 생각을 하
다 잠들었는데, 꿈에 바로 그 노인이 나타나 위와 같은 말을 해준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017
(임금이 미혹되어 국사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미인)

북방에 가인(佳人)이 있어
절세로 단 한 사람뿐
일고(一顧)하면 성을 기울이게 하고(傾城)
재고(再顧)하면 나라를 기울이게 하네(傾國)
어찌 경성, 경국을 모르리요마는
가인은 두 번 다시 얻기 어려우리.

「한서」의 '이부인전'에 나오는 말이다.
한무제를 모시고 있던 가수(歌手) 이연년이 위의 노래를 지어 바치면서 자
기 누이를 가리켜 경국지색이라고 했다.
이에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였는데, 과연 그 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춤솜씨 또한 대단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바로 이부인(李夫人)이다.
경국이란 말은 이백(李白)의 '명화경국양상환(名花傾國兩相歡)'과 백이거의
'장한가(長恨歌)'에 '한왕 색을 중히 여겨 경국을 생각한다'라는 구절에도 나온
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두고 다툴 때 유방의 부모와 처자가 항우의 포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후공(候公)이라는 말솜씨가 좋은 선비가 항우를 설득해
서 유방의 부모처자를 돌아오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후공을 가리켜,
"그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는 병설로 나라를 기울이게 한
다."
라고 칭송하였고, 유방은 그에게 많은 상과 함께 경국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평국군(平國君)'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경원(敬遠)◈
018
(존경은 하면서도 가까이 하기를 꺼린다는 말)

자기 자신의 일에만 노력하고 귀(인간의 영혼)나 신을 공경하면서 멀리하면 지(知)라고 할 수 있다.

윗글은 공자의 제자 번지(樊遲)가 지(知)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
가 대답한 것으로, '공경하면서 멀리한다는 것은 귀신을 섬기되 신에 의존하
거나 신이 무엇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고 길흉화복을 자신의 힘으로 해
결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知)는 지혜나 지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다운 지식이나 지
혜는 어떤 것인가?
세상에는 큰길을 놔두고 지름길로 가려는 사람과 지식의 대상을 이상한
것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만인이 인정할 수 있는 철학이나 사상, 종
교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뜨리는 그릇된 사상이나 사이비 종교도
존재한다.
초기에는 건전한 철학이나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종교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이 해야 할 도리보다는 기복(祈福)이나 종교를 위한 종교, 종교지도자들을 위한 종교로 잘못 진행되는 현상을 역사상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공자의 근본 가르침을 외면하면 유가 때문에 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미신으로 흐르면 불교 때문에 망하여, 기독교 역시 그 근본을 잃어
버리면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많은 종교들이 사회발전에 맞추어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면만이 아니라 그 본래 목적과 사상의 발전도 함께 하
는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계구우후(鷄口牛後)◈
019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말)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서면(西面)을 하고서 손길을 마주잡고 진나라를 섬기는 것은 소의 꼬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저 대왕의 현명함을 가지고 한나라의 강병을 옹호하면서도 소의 꼬리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제가 은근히 대왕을 위하여 부끄러워하는 말입니다."

소진(蘇秦)은 귀곡선생 밑에서 수학한 후, 자기 나라를 떠나 몇 해 동안 유
세(遊說)하다가 곤궁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형제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일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논의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곤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독서에만 열중하던 소진은 갑자기,
'사나이도 태어나서 학문을 해서 출세하지 못하면,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는 「음부(陰符)」라는 병서(兵書)를 꺼내 놓고 열심히 읽기 시작
했다.
1년이 지나 인생의 의미를 미루어 생각하는 재주를 터득하게 되자, '이 정
도면 지금 세상의 군주들을 유세(遊說)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계구우후'는 소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한나라로 가서 선혜왕을 만나 한
말이다.
"한(韓)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성광은 견고하며, 군인들은 용맹하고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명한 대왕이 계시니 모든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한나라가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
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올해 진나라가 요구하는 땅을 주면 내년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며, 한 번이라도 거절하면 결국 침략을 당할 것이므로
진나라를 섬긴다 하더라도 국토를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진은 위와 같은 계구우후론을 펴서 신임을 얻은 후, 계속하여 위, 제, 초
나라 등으로 유세를 다니며 군왕들을 잘 설득해서 여섯나라와 맹약을 맺고
힘을 합치게 되었다. 또한 소진은 그 맹양의 장(長)이 되고 육국의 재상을 겸
하게 되었다.
◈계륵(鷄肋)◈
020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기는 아깝다)

닭의 갈비는 별로 먹을 것은 없지만 그것을 버리면 아까운 생각이 든다.
왕은 이곳을 버리고 돌아가기를 결정한 것이다.

「후한서」의 '양수전'에 나오는 말이다.
삼국 정립시대가 나타나기 1년 전, 유비가 익주(益州)를 점령하고 한중(漢
中)을 평정한 다음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군대를 맞아 한중 쟁탈전을 벌이
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유비의 병참은 제갈
량의 용의주도한 확보로 넉넉한 데 반해, 조조는 병참을 소홀히 하여 내부의
질서가 문란할 뿐만 아니라 탈영병이 속출하여 공격도, 수비도 불가능한 상태
에 있었다.
그때 막료 한 사람이 현황을 보고하고 후퇴여부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
던 조조는 닭갈비(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 막료가 어리둥절한 마음
으로 나오는데 주부(主簿)인 양수(楊修)가 그 소리를 듣고 장안으로 귀환할 준
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참모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漢中)을 여기에 비유한 것은 승상께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
하신 것이오."
라고 답했다.
과연 양수의 예상대로 조조는 그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술로 유명한 유령이 한 번은 술이 취해 세속
사람들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상대가 화가 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유령은 말했다.
"나 같은 닭의 갈비가 어떻게 귀하신 주먹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몸이 허약한 사람을 '새갈비'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가 아닌가 한다.
◈계명구도(鷄鳴狗盜)◈
021
(천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쓸모 있을 때가 있다)

이 때 말석에 있던 도둑의 명수가,
"제가 호백구(狐白, 백여우 가죽으로 만든 털옷)를 가져오지요."
하고 그날 밤 진왕의 궁중에 몰래 들어가 맹상군의 식객 중 한 사람이 닭 소리를 그럴 듯하게 내기 시작하니, 그곳에 있던 닭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관문은 열리고 맹상군 일행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사기」의 '맹상군전'에 나오는 말이다.
제나라 맹상군의 인물과 명성을 듣고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자기 나라
재상으로 삼고자 초빙을 해서 맹상군이 식객 몇 사람과 함께 예물을 가지고
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재상에 임명하려 하자, 제나라 편만 들 것이라는 반대의견이
많아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그냥 돌려보내자니 자칫 맹상군이 앙갚음을 하지 않을까 염려된 소양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암살계획을 세웠다.
이를 눈치챈 맹상군이 사람을 시켜 왕의 애첩에게 도움을 청하니,
"나에게 호백구를 주면 힘써 보겠소."
하고 애첩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호백구는 이미 소양왕에게 예물로 바친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만 태우고 있는데, 말석에 있던 도둑의 명수가 호백구를 도둑질해 와서는
애첩에게 주었다.
귀국이 허락되자 맹상군은 급히 진나라의 서울을 빠져나가 함곡관(函谷關)
을 향했다.
소양왕은 귀국을 허락한 것을 후회하고 바로 군사를 보내어 그 일행을 죽
이도록 했다.
함곡관에 도착한 일행은 첫닭이 울어야 문을 열게 되어 있는 규칙 때문에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자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식객 중 닭소리를 그럴 듯 하게 내는 자가 있어, 먼저 닭소리를 내자 모든
닭들이 그의 닭소리를 따라 울었고, 닭이 울자 관문이 열려 맹상군 일행은 무
사히 탈출했다.
소양왕이 보낸 군사들이 함곡관에 도착한 것은 그들 일행이 떠난 지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다.
맹상군의 진나라 탈출에 대해 사람을 차별 없이 대우한 덕이라고 좋게 평
하는 사람도 있으나, 송나라 왕안석은 '3천 명이 되는 식객 가운데 한 사람도
주인이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정세 판단도 해주지
못하고 막연히 들어가 도둑질, 닭 울음 흉내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아 맹상
군 밑에는 진짜 쓸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혹평했다.
◈계포일낙(季布一諾)◈
022
(한 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조구는 매우 화가 나서 계포를 찾아가, '초나라 사람들은 황금 백 냥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한마디 승낙을 받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유명해지셨습니까?

「사기」의 '계포전'에 나오는 말로서, 초나라 사람 계포는 의협심이 강하
고 장중한 사람으로 자기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항우와 유방과의 싸움에서 계포는 초나라 장수로 몇 차례 유방을 괴롭혔
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천금(千金)의 현상금이 걸려 쫓기는 몸이 되
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를 고발하기는커녕 한고조에게 그를 쓰도록 천거
까지 하였다. 그 결과 사면이 되어 벼슬을 하고 혜제(惠帝)때는 중랑장(中郞
將)이 되었다.
초나라 조구의 변설가이며 권세와 금전욕이 강한 사람으로 경제(景帝)황제
의 외숙뻘 되는 두장군(竇長君)의 식객이 되었다.
계포는 두장군에게,
"조구는 교언영색하는 자이니 교제를 끊으심이 좋겠소."
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때 조구가 두장군에게, '계포에게 소개장을 써달라'고 부탁하러 왔다.
두장군은 계포에게서 온 편지를 보이며,
계포는 자네를 싫어하니 가지 말게."
하고 말했다.
그러나 조구는 계포를 찾아가 위와 같은 말을 하여 계포의 환심을 산 후,
"당신과 나는 동향인이므로 내가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선전하겠소."
라고 말하자 계포도 싫지 않아 그를 빈객으로 대접했는데, 이 조구로 인해 계
포는 더욱 유명 인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한 번 한 말을 끝까지 지키는 신의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처세에 매우 유
익한 것이다. 또 자신의 인물평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해주는 것은 유명해지
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고굉지신(股肱之臣)◈
023
(다리와 팔처럼 임금이 신임하는 신하)

순임금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과 같은 신하들은 짐의 팔·다리요, 눈과 귀로다. 내가 백성을 돕고자 하니 힘써 도와달라. 내가 위엄을 온 천하에 떨치려 하니 그대들이 대신해 달라."

「서경」의 '익직편'에 나오는 위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나에게 어긋남이 있을 때에는 그대들이 나를 보살피며 규정(規正)해 달라.
내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고 물러간 후에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직접 충고해 달라. 또 전후좌우의 동료들과 서로
공경하여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라. 관리들은 백성들의 뜻을 나에게
전하는 것이 임무이니 올바른 이치를 세상에 크게 선양토록 할 것이며, 잘못
을 뉘우치는 자는 관직에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철퇴를 가해 나라
의 위엄을 보이도록 하라."
순임금이 성군이 되는 데는 신하들의 보좌가 필요했고, 나라가 잘되기 위
해서는 제도의 준수, 인애와 형벌의 병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복격양(鼓腹擊壤)◈
024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림)

"해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서 쉬네.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유가(儒家)에서는 성군(聖君)의 표상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을 꼽는다.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공
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
는 반론도 많다.
천하의 성군으로 꼽히는 요(堯)임금이 천하를 통치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 거리에 나
섰다.
어느 거리에 이르렀을 때 어린이들이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 백성 살아감이 임금의 덕 아님이 없네. 느끼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
면서 당신의 다스림에 따르고 있네."
이 동요를 듣고 가슴이 설레는데, 저쪽에서 또 소리가 나서 가보니, 백발
노인 한 사람이 입에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더니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요임금이 마음이 밝아졌다.
백성이 통치의 역할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태평을 구가하는 사회, 인위
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 정치를 추구했던 요임금은 자신의 정치이상을 백성들
의 노래 속에서 확인한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란 요순시대처럼 정치의 역할을 국민이 못
느끼고 태평을 누리는 것이다.
후진국일수록 정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의
20~30%는 정치문제다.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5위 안에 드는 스웨덴에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수상의 이름을 모르는 국민이 51%였다.
◈고성낙일(孤城落日)◈
025
(세력이 쇠퇴하여 고립무원의 상태)

장군을 따라서 우현(右賢)을 취하고자 하니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居延)으로 향하네.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簫關) 밖에 옴을 아니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孤城落日)의 가여.

위의 시는 이백, 두보와 아울러 성당시대(盛唐時代)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왕유(王維)의 시다.
이 시는 평사(評事, 재판을 맡아 다스리는 관직)가 장군을 따라 변방 밖으
로 나가는 것을 보내는 시이다. 시대는 한나라를 빌어서 쓰고 있다.
한나라 시대에 좌우에 현왕(賢王)이라는 흉노족이 있었는데, 우현왕(右賢
王)이 한 번은 한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친 사건을 바탕으
로, 우현을 사로잡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엮은 것이다. 여기서는 마치 장군을
따라 변방에 나아가 외적의 대장을 사로잡은 것처럼 의기가 충천하여 사막으
로 말을 달려가는 듯한 뜻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시에 담긴 정서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현왕을 포로로 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사막을 달려 거연의 요새로 향
하였을 때, 멀리 저쪽의 소관(蕭關) 밖에는 한나라의 사자인 당신이 나와 무엇
을 보고 있을 것인가? 사막에 우뚝 선 외로운 성과 그 근처에 떨어지는 저녁
해, 그것을 당신은 근심에 잠겨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먼
그곳에서 풀 방도가 없어 난감해 하는 당신의 기분을 이 장안(長安)에서 생각
한다는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의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고성낙일'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요새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느낄 안타까움을 상상
하여 그것을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 도와줄 수도 없는 상태이지만,
풀이 죽어서 지쳐 있는 친구의 고성낙일 상태를 생각하면 처량하여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 일어난다는 내용의 시이다.
여기서는 한갓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요새 밖의 쓸쓸한 풍경과 외로운 심
정을 노래한 데에 지나지 않지만, '고성낙일'이라면 일반적으로 멸망의 그날을
초조히 기다리는 그러한 심정을 뜻한다.
◈고좌우이언타(顧左右而言他)◈
026
(좌우를 돌아보며 엉뚱한 말을 하다)

"사사(士師, 법무부장관)가 그 부하를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그만두게 하지요."
"그렇다면 사경(四境, 제후국가)안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것을 말했다.

「맹자」의 '양혜왕편'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제선왕(齊宣王)을 만나 물었
다.
"친구에게 처자를 부탁하고 외국에 갔다 와보니, 친구가 처자를 굶기고 추
위에 떨게 했지만 왕께서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친구라면 당장 절교를 해야지요."
위의 말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배신한 친구는 절교를 해야 하고, 부하 통솔을 잘못한 장관은 그만두어야
하고,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임금은 사직해야 한다. 그런데 사직해야 할 당
사자가 자신이기에 다른 말을 한 것이다.
맹자는 '책인지심(責人之心)으로 책기(責己)하라'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제선왕과 같은 입장에 처하면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
로 그 상황을 얼버무리려 한다.
과거급제가 출세의 전부였던 조선조에는 10년, 20년을 「사서삼경」만 공
부하다보니 거의 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구두시험으로 당락을 가리
기도 했는데, 어느 날 등장한 문제가 바로 이 '고좌우이언타'였다.
어느 젊은 선비가 시험관의 질문을 받고,
"서생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는데 낙동강에서 오리......"
하자 시험관은 그만 짜증을 내며,
"아니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비는,
"'고좌우이언타'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시험관은 그 재치에 감탄하여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
◈고침안면(高枕安眠)◈
027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다)

그러나 진을 섬기면 초와 한은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초와 한에 대한 근심이 없어지면 대왕은 베개를 높이 베고 잠을 잘 수 있으니 나라에는 근심이 없으리라.

소진은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문수학한 장의는 연횡책을 주장하였는데, 진혜왕 10년에 재
상이 되어, 위양왕(魏襄王)과 애왕(哀王)에게 연횡을 따를 것을 권했으나 받아
들이지 않자, 본보기로 한(韓)을 토벌하여 제후들을 떨게 했다. 그리고 장의
는 다시 다음과 같이 애왕을 설득했다.
"우선 위는 천리사방도 없고 병졸도 30만이 안 되는 약국(弱國)이며, 열국
의 통로가 될 가능성이 많다. 남은 초, 서는 한, 북은 조, 동은 제와 국경을
이웃해서 그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어도 다른 나라와 원한을 사게 돼 있다.
또 동맹을 맺어도 이익 앞에서의 합종은 허울좋은 사기이다. 그러니 진을 섬
기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은가? 만약 진이 위와 조의 길을 끊고 한
나라를 설득해 함께 위를 공격한다면 위는 어떻게 되겠는가?"
위의 내용은 그 뒤에 부연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설득을 한 것이다. 여기에다 진의 목적
이 초에 있으므로 진과 위가 함께 초를 공격하여 초를 나누어 갖자는 미끼까
지 던져 꾀인다.
그러나 이는 6국을 진에 헌상하려는 장의의 계책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남
의 힘에 의한 고침안면은 진정한 고침안면이 아니다. ◈고희(古稀)◈
028
(70세를 고희라고 하며 드물다는 것을 뜻한다)

"조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입고, 하루같이 강가에서 만취해 돌아온다. 술 빛은 도처에 있고,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문 것이라."

두보의 '곡강이수(曲江二首)'에 나오는 시이다.
그 무렵 47세였던 그는 좌습유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조정 내부의 부
패에 실망하여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술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상대
로 시간을 보냈다.
곡강은 장안 중심에 있는 못의 이름으로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특히
봄이면 꽃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고, 당현종과 양귀비도 이곳에서 뱃놀이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은 본래 항간에 전해 내려오는 말로서, 두보가 자
신의 시에 그대로 옮김으로 인해 그 의미가 깊어지고 널리 알려졌는데, 근래
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고희'를 70세보다 10살쯤 올려 80세로 해야 한다
는 주장도 있다.
이 고희란 말과 함께 스무 살을 약관(弱冠), 마흔 살을 불혹(不惑), 쉰 살을
지명(知命), 예순을 이순(耳順), 일흔 일곱을 희수(喜壽), 여든 여덟을 미수(米
壽), 아흔 아홉을 백수(白壽)라 한다.
◈곡학아세(曲學阿世)◈
029
(배운 진리보다 출세에 눈이 어두워지지 마라)

원고생이 무제에게 다시 부름을 받을 때 설나라 사람인 공손홍도 부름을 받았는데 원고생은 공손홍을 꺼려하며 흘기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공손군, 올바른 학문에 힘써 말을 하게.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부(曲學阿世)해서는 안되네."

「사기」의 '유림열전'에 나오는 말로, 전한 제 4대 경제 때 학문이 높아
박사라는 벼슬을 지냈던 원고생은 두려움 없이 바른말을 잘하는 성품이었는
데, 어느 날 경제의 어머니 두태후가 노자(老子)를 좋아하여 노자의 책에 대하
여 원고생에게 묻자 대답했다.
"그와 같은 책은 종들의 말에 불과합니다."
화가 치민 두태후는 그를 사육장으로 보내 돼지를 잡도록 했다.
그러나 경제는 원고생을 청렴결백한 선비라고 여겨 얼마 후 청하왕(淸荷
王)의 태부(太傅)로 임명했다.
무제가 즉위하고 원고생은 나이 90에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무제는
다시 그를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 때 아부를 잘하는 공손홍도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공손홍이 위와 같은 충고를 한 것이다. 원
고생의 등용은 그의 연로함과 또 복직을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모함에 부딪쳐
이루어지지 못했다.
◈공명수죽백(功明垂竹帛)◈
030
(공을 세워 역사에 남기고 싶다)

"나는 다만 명공의 위덕이 사해에 더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얼마 안되는 힘이나마 바쳐 공명을 죽백에 드리우고자 할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의 '등우전'에 나온다.
등우는 소년 시절 장안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 때 유수(광무제)도 장안으
로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우연히 유수를 만나게 된 등우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는 친교를 맺었
다.
당시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의 폭정에 못 견딘 백성들이 도처에서 반기를
들고 한나라 왕실을 일으키려는 호걸들 밑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한나라 왕실
의 후예로 도읍을 장안에 정한 유현(更始帝)이 등우를 쓰려 했으나 등우는 유
현을 하찮은 인물로 보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수가 황하 이북땅을 평정하러 떠났다는 말이 들려오자 등우는
즉시 유수에게로 갔다.
유수는 반가워하는 한편 벼슬 부탁이나 하러 온 줄 알고 있었으나, 며칠이
지나도 그런 눈치가 없자 만나러 온 까닭을 물었다. 그 때 위와 같은 말로
대답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우는 장군이 되어 먼저 낙양(洛陽)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우게 되었다.
유수가 지도를 펴서 보이며,
"천하에는 이렇게 많은 고을과 나라들이 있는데 이제 나는 겨우 그 하나
를 손에 넣었을 뿐이오."
하자 등우는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백성들이 명군(明君)의 출현을 바라고 있습니다.
옛부터 천하를 얻는 것은 덕(德)의 후박(厚薄)이 문제였지 영토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유수는 이 말에 크게 감동을 받고 등우의 격려에 힘 입어 오래지않아 광
무제로서 천자가 되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등우의 힘이 컸다.
결국 그가 말한 대로 광무제의 위덕은 사해에 더하게 되고 등우의 공명은
죽백에 드리우게 되었다.
◈공중누각(空中樓閣)◈
031
(현실성과 진실성이 없는 일이나 생각)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늦은 봄에서 여름에 걸쳐 멀리 수평선 위로 누각들이 줄을 이은 도시가 보인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라고 말한다"
말과 행동이 허황된 사람을 가리켜 공중누각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 심괄「몽계필담」에 등주의 해시 이야기가 나오며, 청나라 적호는
「통속편(通俗編)」에 공중누각이라는 말을 썼다.
심괄이 해시라고 말한 것은 신기루(蜃氣樓)로서 「사기(史記)」에도, '신기
(蜃氣)는 누대(樓臺)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넓은 들의 기운이 흡사 궁궐을 이
룩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실성이 없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 허황된 주장을 공중누각 같다고 말하
는데, 현실성 여부에서는 다르나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에서 같은 의미로 사상
누각(砂上樓閣)이란 말과 같이 쓰인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신기루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듯이, 사람들은
공중누각 같은 허황한 이야기에 이끌려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과전불납이(瓜田不納履)◈
032
(사람들에게 혐의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마라)

군자는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
혐의를 받을 사이에 처하지 않는다.
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바로 잡지 말아야 한다.

문선(文選), 악부(樂府), 고사(古辭)의 네 수 가운데 '군자행(君子行)'에 있는
시이다.
악부는 시체(時體)의 한 가지로 그 제작방법과 내용, 분위기가 다소 가곡적
인 경향을 띠고 있다. 고사는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은 민간의 가곡을 말하
는데, 여기서 군자행은 군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말한 노래다.
군자(君子)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지혜가 있어야 하며,
혐의를 받을 일이나 곳에는 처신하지 말아야 한다. 즉, 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는 것을 멀리서 보면 외를 훔치는 것으로 의심을 받을 것이니 절대로 그와
같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군자행'에 나오는 인품을 지닌 모델로 주나라의 주공(周公)을 들 수 있
다.
천자의 작은 아버지요, 재상의 몸으로 모든 국민에게 몸을 낮추고, 밥먹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입에 든 밥을 뱉어내고 나가 맞았으며, 머리를 감다 손이
오면 머리를 손에 감아쥔 채 맞았기에 후세 사람들로부터 특히 성현으로 추
앙을 받았다고 한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033
(허물인 줄 알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공자가 말하길,
"성실과 신의를 위주로 삼고 나만 못한 사람을 벗하지 말라. 군자가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을 하여도 굳어지지 않는다. 잘못이 있으면 꺼리끼지 말고 고치라."

「논어」의 '자한편'과 '학이편'에 나오는 글이다.
공자(孔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허물이 있는데, 허물 그 자체보다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허물이라며, 허물을 고치는데 꺼리지 않도록 강조하
였다. 잘못이 있는데 고치기를 주저하면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위험이 있
고, 잘못은 새끼를 치는 습성이 있어 잘못이 또 다른 잘못을 낳을 수 있으므
로, 잘못을 고치는 데 꺼리지 말고 즉시 고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공자가 제자 안연(顔淵)을 칭찬하는 말 가운데,
"그는 두 번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두 번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다면 결국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성현이 아닌 이상 누구나 잘못을 범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성현
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과연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증자(曾子) 같은 현인도 하루 세 번씩 자기 자신을 반성했고, 자공은 '군자
는 잘못을 범했을 때 모든 사람이 이를 알 수 있도록 고쳐야 한다'고 했다.
잘못이 더 잘못되는 것은 고치는 것을 꺼리는 것이요, 잘못을 고치려고 노
력하지 않으면 진보가 없는 퇴보와 타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관견(管見)◈
034
(붓대롱 속으로 밖을 보는 좁은 소견)

"이것은 붓대롱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고, 송곳을 가지고 땅을 가리키는 것이니 어찌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님의 병 보는 방법은 마치 대롱으로 하늘을 내다보고 틈 사이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위의 글은 「장자」의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말로 위모(魏牟)와 공손룡과의 문답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아래로는 땅 속 깊이 발을 넣고 위로는 허공에까지 높이 올라 있어 남쪽도 북쪽도 없이 사방 만물 속에 꽉 차 있다. 또 헤아릴 수 없는 넓고 큰 경지에 잠겨 있어 동쪽도 서쪽도 없이 현명(玄冥)에 비롯해서 대통(大通)에 이르러 있다.
그런데 그대는 허둥대며 좁은 지혜로 이를 찾으려 하고 서투른 구변으로 이를 밝히려 하고 있다. 이것은 곳 붓대롱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고 송곳을 가지고 땅을 가리키는 것이니 또한 작다 아니하겠는가?"
「사기(史記)」의 '편작전'에 보면, 편작이 괵나라에 갔을 때 태자가 병으로 막 숨져 있었다. 편작은 중서자 벼슬에 있는 사람을 대궐 문 앞에서 만나 태자의 병과 죽은 시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의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 나름대로 긴 설명을 늘어 놓으면서 몹시 아는 체를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편작은,
"선생의 병보는 방법은 마치 대롱으로 하늘을 내다보고 틈사이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라며 태자는 죽지 않았다 하고,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들어가 태자를 다시 살펴보시오. 아마 그의 귓속이 울고, 콧구멍이 벌름해 있을 것이며, 두 넓적다리와 사타구니가 아직도 따뜻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눈 앞이 아찔해진 중서자는 혀가 굳어져 잠시 말을 못하고 있다가 다시 대궐로 들어가 편작이 한 말을 임금께 고했다.
임금이 놀라 대궐 문 밖까지 나와 울며 편작에게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이에 편작이 들어가 제자들을 시켜 침을 놓게 했더니 태자는 곧 정신이 들어 깨어났다. ◈관포지교(管鮑之交)◈
035
(관중과 포숙과의 두터운 우정)

관중은,
"내가 젊어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나는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라고 회고하였다.

「사기」의 '관중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관중과 포숙은 죽마지우로 장사
도 동업을 했고 전쟁도 함께 했다. 제환공이 즉위할 때 포숙은 환공 편이었
고 관중은 반대로 규를 받들었으나, 제환공에게 적이었던 관중을 죽이지 말고
쓰도록 추천한 사람이 포숙이었다.
후에 관중이 국정을 맡게 되어 제환공은 패자가 될 수 있었고 제후를 규
합해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게 된 것도 관중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포숙의 우정이 없었다면 관중의 영달이나 제나라의 융성은 이루어
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공한 후 관중은 포숙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젊은 시절 장사를 같이 했던 일로 시작하여 몇 번씩이나 벼슬에 나갔으
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나를 무능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가운이 안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적도 있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
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하여 동료 소홀(召忽)은 싸
움에서 죽고 나는 묶이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는 나를 염치없다고 비웃지 않
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기보다 공명을 천하에 알리지 못함을 부끄
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후 결론으로,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라고 술회했다.
이 관포의 우정은 개인 대 개인의 훌륭한 우정을 넘어, 국가와 천하를 개
인적 이익이나 영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대인군자의 우정이었기에 우정의
표본이자 대명사가 된 것이다.
◈괄목상대(刮目相對)◈
036
(학식이나 재주 등이 놀랍도록 향상됨)

"언제 그렇게 공부를 했는가? 이제 학식이 대단하니 이미 오(吳)의 시골 구석에 있던 여몽이 아니로군" 여몽은 대답했다. "선비가 헤어진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라네."

삼국(三國)이 대립하고 있을 당시 오나라 손권의 부하 중에 여몽이라는 장
수가 있었다. 졸병에 불과했던 여몽은 비록 무식했으나 전쟁에서 세운 공으
로 인해 장군까지 승진이 되었던 것이다.
손권은 여몽이 병법이론에 관심이 있음을 알고 그에게 학문을 깨우치도록
충고했고, 여몽은 충고대로 따랐다.
얼마 후 뛰어난 학식을 가진 노숙이 여몽과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
여몽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인 노숙은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의 박식함
에 깜짝 놀랐다.
노숙이 여몽의 박식함을 칭찬하자 위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대학(大學)」에는 '진실로 하루가 새롭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말이 있는데, 항상 자기 수양에 게을
러서는 안 된다.」
◈광풍제월(光風霽月)◈
037
(깨끗하고 맑고 고결한 인품이나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

황정견이 주돈이에 대하여 일컫기를 "천성(天性)이 고명(高明)하며 흉중(胸中)이 맑아서 비개인 뒤의 풍월(風月)처럼 밝고 시원하다"고 했다.

유가(儒家)는 북송 중기에 주돈이가 나와 「태극도설」과 「통서」를 저술
했고, 그 뒤에 정호와 정이 형제가 사서(四書)를 정하여 성도(聖徒)를 밝히었
으며, 주자가 이것을 집대성하여 형이상학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함으로써
비로소 성리학의 확립을 이루게 되었다.
주돈이는 옛사람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풀음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소식과 함께 북송시대의 시(詩)를 대표하는 황정
견 역시 위의 표현처럼 그의 인품에 대한 깊은 경의를 나타내었다.
광풍제월은 훌륭한 인품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잘 다스려진
(고복격양, 태평세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괘관(掛冠)◈
038
(관직을 버리고 사퇴하다)

봉맹은 친구에게 '삼강(三綱)'은 이미 끊어졌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우
리들에게 재앙이 미칠 것'이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갓을 벗어 장안의 북문
인 동도문에 걸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요동에서 숨어
지냈다.

「후한서」의 '봉맹전'에 나오는 말로, 봉맹은 도둑을 잡는 정장이 되었는
데, 그 일에 싫증을 내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왕망이 정권을 잡고 평제를 세운 후, 평제의 어머니와 그 식구가 도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이 일을 간하는 장남 내외까지 죽이자, 봉맹은
친구에게 위와 같이 말하고 요동으로 숨었다.
봉맹은 음악에도 재주가 있어 왕망이 실각할 것을 미리 알고 시장거리에
서 큰 소리로 울면서 '아아, 신(新)나라여'하면서 곡조를 붙여 노래를 부르고
는 몸을 숨기곤 하였다.
왕망이 멸망하고 후한의 광무제가 즉위, 봉맹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괘관'은 여기서 유래된 말로, 도연명이 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간 귀거
래사(歸去來辭)와 함께 관직을 사퇴하는 말로 쓰인다. ◈괴여만리장성(壞汝萬里長城)◈
039
(만리장성 같은 존재를 없앤다)

너희들이 만리장성을 허문단 말이냐.

송서의 단도제전에 나오는 말로서, 북쪽의 위나라는 남쪽의 송나라를 정복
하고 싶었지만 단도제라는 인물이 있어서 문제였다.
송나라 중앙의 권신들도 단도제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고 왕족들
중에는 정권이나 찬탈하지 않을까 하여 일찌감치 없애자는 사람도 있었다.
이리하여 송왕(宋王)의 병이 위독한 틈을 타서 단도제 반대파들이 짜고 그
를 공중으로 불러들인 다음, 천자의 명령이라 속이고 하옥했다.
단도제는 위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우와 장비에 견줄만한 용력도 있어
서, 소인들에게 속아 잡히게 된 것을 알자 두 눈을 횃불같이 뜨고 '너희들이
만리장성을 허문단 말이냐'고 큰 호통을 쳤다.
만리장성 같은 존재였던 단도제가 죽자 두려울 것이 없어진 북위는 시시
때때로 송나라를 침범해 들어왔다.
이처럼 스스로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예는 우리 역사에도 존재
한다.
인조 때 평안감사로 있던 박엽이 인조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데, 그의 사후
에 청나라의 침략이 더욱 심해졌으며, 급기야는 병자호란이 터졌다.
후에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인조의 등을 치며 '이제야 박엽을 왜 죽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옥에 가둠으로써 왜
적의 침략을 더욱 부채질한 일이나, 김덕령 같은 명장을 누명의 씌워 죽인 일
등, 이 역시 나라의 만리장성을 허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맹자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할 짓을 한 뒤에 남이 망친다."
고 하였고 한유는,
"육국을 멸망시킨 것은 육국 자신이다."
라고 말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040
(비굴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을 하다)

공교로운 말과 좋은 얼굴을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적다.

집단 이기주의와 폐쇄적 국수주의가 판을 치는 춘추시대에 태어난 공자는,
정치에 있어서는 선왕(先王)의 지도를 펴려 하였고, 모든 인간들이 서로 사랑
하는 인(仁)사상을 펼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인(仁)사상만이 비인간화되어
가는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 본래의 모습을 찾아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속뜻과는 별개의 것으로만 '인'인 것을 가리켜, '듣기에만 좋은 말
이며 보기에만 이쁜 모습에는 사랑이 들어있지 않다'고 표현했으며, 또 '나는
자주빛이 붉은 빛을 뺏는 것을 미워하고, 정나라 음악이 아악(雅樂)을 어지럽
히는 것을 미워하고, 약삭빠르게 둘러대는 말이 나라를 뒤엎음을 미워한다'고
말했다.
「논어」의 '자로편'에 '강과 의와 목과 눌은 인에 가깝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강직하고 과감하고 순박하고 어둔한 사람은 자기 본심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교언과 영색은 꾸민 말과 꾸민 얼굴을 말하는 것으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참되고 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교주고슬(膠柱鼓瑟)◈
041
(규칙만 고수하며 융통성이 없는 고집불통)

"임금께서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을 뿐, 때에 맞추어 변동할 줄을 모릅니다."

조나라에 조사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는 괄이라는 아들이 있
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머지않아 병법에 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조사는,
"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으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
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괄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
라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을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조나라 염파장군은 늙어
서 싸움을 하기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서울 게 없다. 다만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 유언비어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극력 반대하면서, 조괄의 임명은 '교주고슬'이라며 위와
같이 주장했으나, 인상여의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
는 대군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학벌이나 지식만을 뽐내는 애송이를 상관으로 모시는 현장 경험자의 고충
이 이럴 것이고, 국민경제를 경제학의 실험대상처럼 이론에만 집착하여 추진
하는 고시파와 외국유학파들의 교주고슬식 행정착오를 겪는 나라가 지금도
많이 있을 것이다.
◈교칠지심(膠漆之心)◈
042
(두터운 우정)

4월 10일 밤에 낙천은 아뢴다.
"미지여, 미지여.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도 이미 3년이 지났네. 그대의 편지를 받지 못한 지도 2년이 되려고 하네. 인생이란 길지 않은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니 말일세. 하물며 아교와 옻칠 같은 마음 교칠지심(膠漆之心)으로 북쪽 오랑캐 땅에 몸을 두고 있으니 말일세."

당나라 때의 백낙천과 원미지는 동료이자, 천자(天子)가 친재(親裁)하여 등
용하는 과거에 함께 급제했고, 시(詩)의 혁신에도 뜻을 같이해서, 한(漢)나라
시대의 민요를 토대로 시대의 폐단인 백성들의 분노와 고통의 번뇌를 담은
악부(樂府)에 유교적인 민본 사상을 맥박치게 하는 신악부(新樂府)를 지었는
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두 사람 다 시골로 좌천되었다. 떨어져 있음에 서로
그리워지자 백낙천이 원미지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내용은 위와 같이 시작해서 '나아가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물러서
도 서로 잊을 수 없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어, 각자 흰머리가 되
려고 하네. 미지여, 미지여.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실로 하늘이 하신 것
이라면 이것을 어찌하랴!'로 끝을 맺는다.
교칠(膠漆)은 아교와 옻을 말한다. 아교풀로 붙이면 서로 떨어질 수가 없
고, 옻으로 칠을 하면 벗겨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딱붙어 떨어질 수 없는 그리운 마음을 교칠지심이라 하고, 그런 두
친구의 교분을 가리켜 교칠지교라고 한다. 교칠지심은 부부의 밀착된 정에도
쓰인다.
◈교토사량구팽(狡 死良狗烹)◈
043
(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잡아먹힌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죽음을 당하고,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은 감추어지고, 적국을 파멸시키면 모신은 망한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이미 죽게 되어 있다.

「사기」의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로서, 천하를 차지하여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정권유지에 장애가 될 인물과, 항우와 싸울 때 자기를 지나치게 괴롭
힌 자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전자로는 한신이 첫째면, 후자로는 항우의 용장이었던 종리매가 있었다.
한신에게 종리매를 체포하도록 명령했으나 종리매와 친교가 두터웠던 한신은
도리어 숨겨주고 있었다.
어떤 자가 이를 알고 한신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모함을 하자, 진평이 계
책을 내서 고조가 제후들에게 초(楚)의 진(陳)에 모이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를 받은 한신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며 고조를 배알하려고 하자, 평소 술수가 남다른 가신이 한신에게 속삭였다.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배알하시면 천자도 기뻐하시고 주군께서도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종리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종리매는,
"고조가 초나라를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네 집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고조에게 바치고 나면 자네 운명도 얼마 못 가네. 자네의 생각
이 그 정도라니 내가 자네를 잘못 보았네."
하고는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진으로 갔으나 종리매의 예측대로 체포되고
말았다. 그래서 화가 나 윗글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고조는 한신을 죽이지 않고 초왕의 자리에서 회음후로 좌천시켰
다.
범려는 월왕구천을 도와 오를 멸하고 곧 그의 곁을 떠나 장사를 했고, 한
고조는 모사꾼 장량도 초야에 묻혔다.
◈교토삼굴(狡 三窟)◈
044
(슬기로운 토끼는 도망갈 구멍 셋을 파놓는다)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은의(恩義)올시다. 차용증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 주고 사기 힘든 은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설(薛)땅은 맹상군의 아버지 전영의 봉지(封地)였다. 하루는 식객(食客) 풍
훤에게 설땅으로 가서 차용금을 거두어 오라고 시켰다.
풍훤은 설에 가서 부채가 있는 사람들을 전부 모았다. 그리고 부채 증서
를 전부 거두어 채무자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우고 부채는 전액 탕감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설의 백성들은 맹상군 만세를 부르며 매우 기뻐했다.
풍훤의 보고를 들은 맹상군은 어이가 없었다.
어이없어 하는 맹상군에게 풍훤은 윗글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맹상군은 제민왕의 노여움을 사서 재상 자리를 내놓고
영지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설 땅 사람들이 백 리 앞까지 마중나와 그를 기쁘
게 맞이했다. 풍훤이 맹상군을 위해 마련한 첫 번째 보금자리였다.
훙훤의 외교로 위혜왕이 맹상군을 재상으로 쓴다는 소식을 들은 민왕은
맹상군의 위치를 새삼 인식하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재상으로 다시 임명
했다. 이것은 두 번째의 보금자리의 마련이었다.
그 다음 풍훤은 설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울 것을 민왕에게 건의
토록 하여, 민왕이 설 땅에 종묘를 세웠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아무리 왕이라도 맹상군을 함부
로 대하지 못할 것이므로, 풍훤은 맹상군에게 세 번째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구밀복검(口蜜腹劍)◈
045
(앞에서는 남을 위하는 척하다가 돌아서서는 남을 끌어내린다)

"이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라고 말했다."

윗글은「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임보에 대한 평가의 일부이다.
당나라 현종 때 19년 동안 재상을 지낸 이임보는, 장량과 제갈량, 강태공
등과 맞먹는 나쁜 방면의 모사꾼이었고, 조조와 필적할만한 간사함도 지녔으
나, 조조는 대인(大人)이었고 임보는 소인(小人)중에 소인이었다.
안록산도, 이임보가 두려워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반란을 일으킬 만큼 그
를 두려워했다. 그가 서재에 앉아 깊이 생각하는 일이 있은 그 다음날은 옥
사(獄事)가 일어났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태자까지도 그를 두려워했을 정도였으나 양귀비에
게 빠져 있던 천자인 현종만 몰랐다.
구밀복검하는 신하가 많은 조정은 정치가 잘될 수 없다.
임금에게는 갖은 아양과 아첨을 하고 국가의 흥망보다 자신의 영달만 노
리는 자들이 바로 구밀복검하는 인물들이다.
◈구사일생(九死一生)◈
046
(죽을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나다)

굴원은,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분간하지 못하고, 참언과 아첨하는 말이 왕의 밝은 지혜를 가리고, 간사하고 비뚤어진 말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상처내어, 마음과 행실이 방정한 선비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근심스러운 생각을 속에 담아 이소(離騷)한 편을 지었다.

윗글은「사기」의 '굴원전'에 나온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로 박학다식하고 변론에 뛰어
났기 때문에 많은 활약을 하였으나, 모략을 받아 두 번씩이나 쫓겨나는 수모
를 당한 뒤에는 멱나수에 빠져 죽었다.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몽환적(夢幻的)인 세계를 묘사하여 고대문학 가
운데 드물게 서정성을 띠고 있으며, 당시 조정 간신들의 발호, 임금에 대한
헌신을 알아보지 못함을 원망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굴원의 사부와 그의 문하생 및 후인의 작품을 모은 책인「초사(楚辭)」에
수록된 작품 25편 가운데 이소(離騷), 천문(天問), 구장(九章)등이 남아 있다.
윗글에는 굴원이 이소를 지은 동기가 나와 있다.
이소의 내용에는 '길게 한숨 쉬고 눈물을 닦으며 인생의 어려움 많음을 슬
퍼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선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아홉 번 죽을
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여기서 유래된 말로 '아홉 번 죽어서 한 번을 살아나
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는 뜻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다로 변했다.
◈구상유취(口尙乳臭)◈
047
(입에서 젖내가 난다 상대가 어리고 유치하여 얕잡아보다)

한왕이 한신을 시켜 위왕표를 치게 하면서 물었다.
"위나라의 대장이 누구인고?"
좌우의 사람들이 대답했다.
"백직(柏直)입니다."
그러자 한왕이 말했다.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구나. 어찌 우리 한신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구상유취는 한고조가 반란을 일으킨 위왕표를 치라고 하면서, 그의 장수가
백직이라고 하자 한신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이다.

김삿갓이 어느 여름날 한 곳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개를 잡아놓고 시회(詩
會)를 벌이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그가 말석(末席)에 앉았는데, 초라한 행색이어서인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김삿갓은,
"구상유취로군."
하고 일어섰다.
그 소리에 기분이 상한 선비들은 하인들을 시켜 김삿갓을 끌고 와서 누가
구상유취냐고 물었다.
"선비님들이 내 말을 오해했소. 나는 개초상에 선비가 모였다(拘喪儒聚)고
했소."
그의 재치에 선비들이 잘 대접했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일화일 뿐이지만 젊다고 다 구상유취인 것은 아니며, 그렇
다고 천방지축해서도 안될 것이다.
젊음도 하나의 좋은 자산이다. 그러나 실력이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되
지 못했을 뿐더러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향락만 일삼고, 이론에 치우쳐
왈가왈부한다면 제(濟)나라를 망친 병법이론의 대가 조괄과 같은 실패를 부를
수 있다.
◈구우일모(九牛一毛)◈
048
(많은 것들 중에서 극히 적은 것)

설사 내가 법에 복종하여 죽임을 받을지라도 아홉 마리 소에서 한 개의 터럭(九牛一毛)을 잃는 것과 같아 벌레가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문선(文選), 한서(漢書)에 보면「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자기가 이
릉(李陵, 전한 무제 때의 무장, 흉노와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무제는 화가
나서 그 가족을 죽였다)을 변호했기 때문에 거세의 형벌을 받아 천하의 웃음
거리가 되었고, 그것이 너무도 슬프기는 하지만 투옥된 자의 하소연 할 수 없
는 괴로움을 세상의 속인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
의 끝부분은 몹시 자조적(自嘲的)이다.
"나의 아버님은 부부단서(剖符丹書)를 받을 만한 공적도 없는 문사성력(文
史星歷)의 계원으로 점장이의 부류였으며, 원래 천자가 희롱하여 노니는 것을
상대하여 천한 배우와 같이 양성되어 세상 사람들이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었
다."
라며 이어서,
"내가 법에 의해 죽을지라도 구우일모를 잃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는, 괴로움에 충만된 자조적인 독백을 한다.
그러나 자신을 구우일모와 같이 하찮은 존재로 비하했던 그가 훗날 환골
탈태되어 역사상 불후의 명작인「사기(史記)」를 썼다.
사람의 장래는 모르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의, '천재는 1%의 영감에
99%의 노력의 결정체'라는 말을 기억하여, 비록 현재 가진 것은 없더라도 세
상에 무언가 남기는 사람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인공휴일궤(九 功虧一 )◈
049
(조금만 더 했으면 완성됐을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

"아아, 임금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 까지 천하의 정치를 힘써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작은 행위에서 신중함을 결여한다면 큰 덕을 손상시키기에 이를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흙만 쌓아 산을 만들어 한 삼태기의 흙을 보태면 아홉 길에 이르게 될 때,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운반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지금까지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주왕조를 열어
그 위엄이 사방의 오랑캐에까지 미쳤을 때, 서쪽의 여국(旅國)으로부터 '오
(獒)'라는 개를 선물 받았다. 그 개가 사람을 뜻을 이해하고 사람을 잘 따라
무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 개를 진귀한 동물로 여기자, 그 아우인 소공(召公)이
이같은 무왕의 마음 빼앗김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는데, 위의 내용이 그 일부
이다.
또「맹자(孟子)」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아홉 길을 파들어 가다가
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만두면 그것은 우물을 버린 것과 같다."
고 했다.
한 삼태기의 흙만 더 파내면 샘이 솟아나게 되어 있더라도, 거기까지 계속
하지 못하고 그만두면 아홉 길을 파내려간 지금까지의 노력을 포기한 것과
다름 없으니, 그야말로 공휴일궤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나라 공산품 가운데 불량품이 많은 가장 큰 원인은 끝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끝을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050
(입이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 된다)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 혀는 곧 몸을 자르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

풍도는 당나라 말기에 태어나,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진나라와 거란과 한
나라의 여러 왕조에서 벼슬을 한 사람으로, 이 동란의 시기에 73세의 장수를
누린 사람이다.
바로 그와 위의 시를 지었다.
우리말에 '화는 입으로부터 나오고(禍自口出)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온다(炳
自口入)', '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炳從口入) 화는 입을 좇아 나온다', '모든
중생은 화가 입 때문에 생긴다'고 했다.
부부싸움의 반은 입을 잘못 놀린 데서 오며, 직장에서의 불화도 남을 칭찬
하기보다는 비방하는 데서 온다.
조선조 당쟁사에서는 말 한 마디 잘못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가 허다
하다.
현재도 일본의 고관자 지식인들이 고의적으로 망언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
것을 고치지 않는 한 동남아에서 일본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
다.
◈국사무쌍(國士無雙)◈
051
(둘도 없는 뛰어난 인물)

여러 장군들이라면 쉬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신과 같은 사람이면 나라에 둘도 없는 인물입니다. 주공께서 한중의 왕으로 만족하시려면 한신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두고 다투시려면 한신 이외에는 군략을 도모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신은 회음 사람으로 젊어서 가난하여 방탕하였고, 관리나 장사도 못하여
먹고 살기에 급급하였다. 빨래하는 노파에게 밥도 얻어먹고, 바지 아래로 기
어나가는 모욕도 당했다.
한신은 처음에는 초나라 군대에 몸을 담고 있었다. 아무리 군략(軍略)을
항우에게 제안해도 채택이 안되자 초군에서 나와 한군으로 갔는데, 승상 소하
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소하의 추천을 받아도 유방이 써주지 않아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 즈음에 관동 각 지방에서 유방을 따라온 부장들 중에 향수를 이기지
못하여 도망가는 자가 많았는데 한신도 그 속에 끼어 탈출했다.
한신이 도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소하는 급히 그 뒤를 쫓았는데, 소하도 도
망갔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어 유방은 크게 낙담도 하고 화도 났다.
이틀이 지나 소하가 나타나자 유방은 한편으론 화를 내고 한편으론 기뻐
하며 성급히 물었다.
"승상인 당신도 도망을 쳤소?"
"도망한 것이 아니고 도망한 자를 찾으러 갔던 것입니다."
"누구를 쫓아갔단 말이오?"
"한신입니다."
"뭣이, 한신이라고! 수십 명이 넘는 장수들이 도망가도 뒤쫓는 일이 없었
는데 한신 따위를 쫓다니 진심이오?"
그 때 소하는 한신이 '국사무쌍'이라는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얼마 후 유방은 한신을 한나라의 대장군으로 삼았다. 한신은 자신의 재능
을 발휘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소하가 본 대로 유방의 통일 천하는 한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신이
유방을 도왔기에 한나라는 설 수 있었고 항우는 패망을 한 것이다.
유능한 사람을 보고 쓸 수 있는 것은 국가경영이나 기업 경영에 매우 중
요하다.
◈국척(  )◈
052
(겁이 많아 어떻게 할 줄 모른다)

"하늘이 제 아무리 높다 해도
몸 굽히지 않고는 살 수 없다네
제 아무리 땅이 단단하고 두텁다 해도
감히 조심해서 걷지 않을 건가
여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니
슬픔은 오늘날 사람들의
도마뱀 모양 떨고 있음이여."

위의 글은「시경」에 있는 주나라 조정의 아가중에 나오는 시이다.
조금 더 쉽게 풀이하면,
"하늘이 아무리 높다지만 허리를 굽혀 걸어야만 하고, 땅이 아무리 두텁다
지만 발을 조심해 디뎌야만 한다. 슬프다. 오늘의 정치가가 모두 독사나 도
마뱀처럼 독을 품고 있단 말인가? 어째서 이 넓으나 넓은 천지에 걸음마저
마음놓고 걸을 수 없게 만든단 말인가?"
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 치하, 스탈린 치하의 소련, 이조 때 사화가 일어나던 때의 선비, 유
신 치하의 민주투사, 5공 치하의 반체제 인사, 지금 이 시간도 쿠바와 이라크
와 북한의 민중들은 마음을 놓고 살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시경(詩經)」의 이 시는, '간신들이 국정을 어지럽혀 뜻 있는 선비가 몸
을 굽히고 조심조심 처신하며 겁을 먹고 떨고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3공의 유신체제와 5공의 공포정치 시절에 민주공화국인 한국에서 많은 국
민들이 국척거렸다. 지금도 행정권 남용과 법집행의 잘못으로 국척거리는 국
민이 없는지 정부와 관료들은 항상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053
(나라가 망해 국민은 흩어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만 남았다)

나라는 파괴되었어도 산과 내는 있고
성에 오니 풀과 나뭇가지가 무성하다.
때때로 느끼어 꽃을 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이별을 한하여 새에도 마음 놀라네.
횃불은 석 달 동안 이어지고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되네
흰머리 긁으면 다시 짧아지고
모두가 비녀찌름보다 낫지를 않네.

두보의 춘망시(杜甫, 春望詩)에 나오는 말이다.
두보는 10여 년 동안 벼슬을 구하기 위해 고관들이나 정상배들에게 허리
를 굽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당현종 15(756) 6월에 장안(長安)이 안록산에게 합락되고, 태자인 형(亨)이
7월에 피난지인 영무에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두보는 단신으로 임금에게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장안으로 보내어져 포로의 몸이
되었다.
두보가 위의 시를 읊게 된 것은 이듬해 봄의 일로서, 포로의 신세를 한탄
한 그의 심정이 뼈에 사무칠 만큼 잘 묘사되어 있다.
같은 해 여름 4월에 장안을 탈출해 봉상에 있던 숙종(肅宗)의 행차를 만나
고, 그 이듬해 5월에 좌습유에 임명되었다. 비로소 벼슬하고자 하는 뜻이 이
루어진 것이다.
개개인의 존재는 '나라의 존립'을 그 기본전제로 한다. 나라가 없으면 개
인의 행복도, 나라에 대한 충성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통치기간'이 주는 교훈은 그만큼 깊다고 할 수 있다.
◈군계일학(群鷄一鶴)◈
054
(평범한 사람들 중에 뛰어난 한 사람)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죽림칠현 중 혜강의 아들인 혜소가 있었는데, 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
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에서 벼슬하던 산도
가 무제에게,
"「서경(書經)」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혜강은 도륙당하였음). 비록 혜
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뛰어납니다. 그에게 비서랑 벼슬을
시켜 주십시오."
라고 아뢰자 무제는,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하고 말하면서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비서승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
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
요."
이 말을 듣고 왕릉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네가 그의 부친을 애초부터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네."
혜소는 아버지만큼 학식이나 기량이 없었는지는 모르나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군계일학답게 자신의 몸이 적의 칼에 맞아 죽으면서까지 진문
왕을 지켜 많은 닭 속의 한 마리 학 같은 인물이 된 것이다.
황희, 이율곡, 이순신, 조광조, 송시열, 김옥균, 김구, 안창호 등은 우리 역
사에 군계일학 같은 인물이다.
당시 사회는 이런 인물들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인사가 만사'이듯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돕고 믿어주어 경륜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사
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
055
(전쟁 수행중의 장수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거역할 수 있다)

양저는 소리높여 말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제경공 때 진나라와 연나라에 연패하자 안영이 양저를 천거했다.
양저는 임금에게,
"신은 미천한 몸이라 장병들이 아직 미더운 생각이 적을 것이니 임금께서
신임하시는 사람을 감독으로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임금은 장가라는 총신을 감군으로 허락했는데, 평소에도 그는 임금의 총애
를 믿고 무척이나 교만했으므로 군문에 한나절이나 늦게 도착했다.
양저는,
"지금 적국이 깊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소동이고, 사졸들은 변경에서 죽음
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임금께서는 잠도 못 주무시오. 온 백성들의 생명이
당신에게 달려 있는데 송별 잔치 때문에 한나절이나 늦게 군문에 도착한 거
요!"
하고 크게 화를 내며 군정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 약속시간을 어기고 늦게 온 사람은 어떻게 다스리오."
"목을 베게 되어 있습니다."
장가는 그제야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임금에게 구원을 청하게 하는 한편
양저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임금의 특사가 오기 전에 장가의 목은 이미
떨어져 삼군 앞에 내보여졌다. 삼군은 장가의 목이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떨어지자 떨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특사령을 가지고 온 임금의 특사가 군중으로 뛰어들었고, 이 때 양
저가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군정에게,
"군중에서 달릴 수 없는 수레를 사자가 달렸다.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가?"
하고 다시 물었다.
"목을 베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임금의 사신을 죽일 수는 없다. 대신 말을 몬 사람과 왼쪽에 있
는 말의 목을 베어라."
이 소식이 적군의 밀정에 의해 알려지게 되자 적군은 싸우기도 전에 달아
났고 양저는 그 뒤를 추격하여 잃었던 땅을 다시 평정하고 돌아왔다.
오왕 합려가 손자가 병법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궁녀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보라고 했다. 총희 두 명을 대장으로 훈련을 시키는데, 왕의 사랑을 받
는 그들이 손자의 호령에 잘 따르지 않아 대장격인 종희 두 명을 왕의 사정
에도 불구하고 목을 베었다. 그 후로는 궁녀들의 훈련이 잘 되었음은 물론이
다.
◈군자삼락(君子三樂)◈
056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 인생 삼락이다)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을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음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

「논어(論語)」를 보면 공자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은 어
떤 실수가 있을 때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항시 옆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또
앞의 가르침과 뒤의 가르침이 틀리다고 제자가 반문하면 제자의 말이 옳고
또 앞의 말은 장난이었다고 자신의 그릇된 판단을 솔직히 시인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반면 맹자는 위와 같은 경우에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자는 성인이요 맹자는 아성(亞聖)인지 모르나, '군자삼락'은 자신을
몰라주는 군왕들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군자삼락은 국가를 경영할 경륜도 없고 백성을 사랑하는 인자함도 없으면
서, 왕도정치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전쟁을 통해서, 백성들의 형편이
야 어찌 되든 패자가 되려고만 했던 당시 군왕들에게, 왕노릇보다 기본적인
사람이 되라는 공자의 질책이었다.
◈군자여소인(君子與小人)◈
057
(인격자와 비인격자)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을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만 생각한다. 군자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룩해 주고 사람의 악한 것을 이룩해 주지 않으면 소인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윗글은「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군자의 소인에 대한 비교들을 보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
"군자는 어느 경우나 태연자약한데 소인은 언제나 근심걱정으로 하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
"군자는 작은 일을 알지 못해도 큰 것을 맡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을 맡
을 수 없어도 작은 일을 알 수 있다."
"군자는 쉬운 것에 처하면서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일을 행하며
요행을 바란다."
"군자를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고, 소인은 섬기기는 어렵고
기쁘게 하기는 쉽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남의 악함을 이루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괴롭게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괴롭기 여기지 않는다."
"군자는 의(義)로 바탕을 삼고 예로 행동하며, 겸손함으로 나오고 믿음으로
이룬다."
또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과 벼슬이 높은 사람'을 군자라는 한 단어속
에 넣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고관은 당연히 군자라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비자는,
"임금의 주위엔 군자보다 소인이 더 많다."
고 탄식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군자다운 사람보다는 소인만 늘어가는 감이 없지
않다. 사회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군자다운 면모를
갖추도록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군자원포주(君子遠 廚)◈
058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짐승 죽이는 것을 못 보아 푸줏간을 멀리 하다)

군자는 누구나 새나 짐승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 산 모습을 보고서는 그들의 죽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 죽는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하기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 한다.

맹자는 제선왕과 왕도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차마 하지 못하
는 마음, 즉 인자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왕도정치를 하는 발
판임을 강조하고, 제선왕이 흔종(소의 피로 북에 바르는 일)에 쓰일 소가 끌려
가는 가운데 떨면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마음이
바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므로 제선왕도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설득한다.
공자는 낚시질은 하되 그물질은 하지 않았고, 주살을 하되 잠자는 새는 쏘
지 않았다.
푸줏간을 멀리하는 마음, 낚시질만 하고 잠자는 짐승을 잡지 않는 마음은
어진 성품이 짐승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맹자는 제선왕이 왕자(王者)가 될 자질이 있으면서 천하에 왕노릇을 못하
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왕도정치 쪽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않기 때
문이라고 했다. 또한 공자의 옷을 입고, 공자의 말을 하고, 공자의 행동을 따
라하면 공자가 되고, 도척의 옷을 입고, 도척을 따라가면 도척이 된다고 했다.
도덕정치, 왕도정치, 위민정치를 알고 외치던 유학자들이 많았던 조선조에
왕도정치를 했던 왕이 왜 세종 다음으로 성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을까?
◈군자표변(君子豹變)◈
059
(군자는 확실하게 선하게 변한다)

군왕은 호랑이로 변한다.
군자는 표범으로 변하고 소인은 얼굴을 혁신한다.

「역경(易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군주는 호랑이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털을 갈고 변하는 것처럼 말이나
행동이 뭇사람들의 표준이 된다.
군자는 표범의 털이 가을이 되어 아름답게 변하는 것처럼 행위가 빛난다.
또 만일 덕이 없는 소인이라면 얼굴을 혁신하고 새로운 군주에게 따르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것이 '대인호변(大人虎變)'과 '군자표변'의 원 뜻이다.
군자표변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면, 표범의 털가죽이 가을이 되면 선명하고
아름답게 변하듯 군자의 공로와 업적이 찬란하게 빛나고, 지위도, 덕도 없는
작은 사람들은 태도를 바꾸어 임금에게 충성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개혁을 오래 계속하게 되면 도리어 나쁜 결과를 빚게 된다는 것이다.
호변(虎變)이나 표변(豹變)이나 모두 좋게 달라진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행동이 싹 달라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자신의 영달과 욕망 때문에 정의나 의리를 흙 버리듯 표변하는 무리가 날
로 늘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은 어린아이로만 머물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습도 변하고, 성
품도 지식도 취미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변화
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소인의 방향이 아닌 군자의 방향을 택해서, 표범
의 털가죽이 아름답고 선명하게 변해가듯 덕행이 높아가고 달라져 가야 하는
것이다.
◈권선징앙(勸善懲惡)◈
060
(착한 행동을 권하고 악한 행동을 징계하다)

춘추(春秋)시대의 호칭은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
인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은 권한다. 성
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위의 글은「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글이다.
「한서」의 '가이전'에는 '경축하고 상을 줌으로 선을 권하고 형벌로써 악
을 징계한다'했고, 「한서」의 '한연수전'에는 '상과 벌을 가지고 이것으로 선
을 권하고 악을 금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지은「춘추(春秋)」는 노(魯)나라 12대 240년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지만, 역사에 대한 공자의 비판이 담겨 있는 책으로, 역사서에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세상의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두렵게 하여, 어느 경
전보다 권선징악적 기술이 많다.
공자는 「춘추」를 자신의 분신처럼 알아 후세 사람들의 비판과 모범을
춘추로 받으려 했을 만큼 심혈을 기울여 지었으며, 후세에 당당하게 내놓을
만한 내용을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양면성이 있다. 중국역사상 대부분의 왕들은 공자나 맹자의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알았고, 도덕적 권선징악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행면에서
는 한비자의 법가(法家)식 권선징악을 더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양면성이 있다 하더라도 '권선징악'을 현대에 계승하는 일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징악(懲惡)보다는 권선(勸善)쪽에 보다 주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토중래(捲土重來)◈
061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 세력을 되찾는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다.
부끄러움을 안고 참는 것이 남아라
강동의 자제는 호걸들이 많아서
땅을 맡아 다시 오면 알 수도 없을 것을

항우가 24세 때 8천 명의 강동 군사를 이끌고 일어나 8년 동안 그야말로
승승장구한 전과를 올렸으나, 유방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한신이 항우를 잡기 위해 수십만 대군으로 항우를 포위했으나 그는 무사
히 탈출하여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탔다.
적과 싸울 때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볐으나 막상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고향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순간, 패군지장으로 그것도 8천 군사를 다 잃고
단신으로 강동의 부형을 대할 생각에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진 항우는 오강에
서 스스로 목을 치고 말았다.
항우가 죽은 지 천여 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두목이란 사람이 오강 나루
터에 서서 항우의 인품을 그리며, 너무 빠른 그의 죽음(31세)을 애석해 하고
'강동 부형에 대한 수치를 참고 견디었더라면, 강동은 우수한 인물이 많아 만
회할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하고 항우를 애석하게 여기는 심정
으로 위의 시를 지은 것이다.
나약한 현대인들, 고속성장 속에서 자란 요즘 젊은이들은 작은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고 때로는 자살 같은 극단적인 도피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한국
이 자살률 세계 6위국이라는 보도는 심각한 사회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7전8기의 정신, 정신일도하사불성의 각오, 살아있으면 희망은 있다는 격언
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귀매최이(鬼魅最易)◈
062
(감상자가 잘 모르는 것이 그리기 쉽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어렵소?"
"개나 말 같은 게 가장 어렵습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그리기 쉽소?"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게 가장 쉽습니다. 개나 말은 사람들이 잘 아는 것이고 아침, 저녁으로 눈앞에 보이므로 그와 똑같게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는 형체가 없는 것이어서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쉬운 것입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나라 어떤 임금이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 그의 궁전에는 이 사람 저
사람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했으며 화가들도 많이 출입했다.
위의 내용은 궁전에 와서 그림을 그리던 어떤 화가와 임금의 대화 내용이
다.

어떤 사기꾼이 연나라 임금에게 죽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
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그것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런데 죽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자가 얼마 후에 먼저 죽어 버렸다.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운명에 대해 교묘한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
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남의 운명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고 자신부터 화
를 피하고 부귀를 누리라'고 하면, 운명이라 안된다고들 대답한다. 숙명(宿命)
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고칠 수 있다하여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
게 돈을 받는가?
이름을 짓는 사람에게 몇 번을 가도 역시 이름을 고치라고 한다. 자기 자
신이 지어주고 다시 고치라는 것은 모순 중에 모순이지만 그래도 작명가는
존재한다.
이 세상 사기꾼의 50%는 이런 미신놀음에 종사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이 사기꾼들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늘어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욕심으로 인해 진리를 모르
기 때문이다.
또 숱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신을 믿어왔다. 그런데 거기에 빌
붙어서 얼마나 많은 사이비 종교와 유사 종교가 사람들을 울리고 있는가?
터무니없는 미신놀음에 국민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정치가, 종교가, 행정가,
교육가들이 잘 막아주고, 솔선수범 하여 그 사회에서 발본색원한다면 '귀매최
이'는 없어질 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
063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 하룻동안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인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

「논어」'안연편'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에는 인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 이유는 공자의 대표적 사상인 인
(仁)이었기 때문이며, 극기복례도 인의 정의 중 하나이다.
「논어」에는, '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인한가?
모든 사람이 인 때문에 살면서 인을 모르고 인을 외면한다'고 했으며 '인 좋
아하기를 색(色)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도 했다.
윗글은 안연의 인에 대한 질문에 공자가 대답한 것이다.
안연이 그 조목을 묻자,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고 했다.
공자는 인이란 말을 도(道)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해 왔다고 볼 수 있는
데, 많은 제자들이 이 인에 대해 질문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공자는 각각 그들
의 정도에 따라 다른 대답을 했다.
수제자 안연에게 대답한 극기복례가 인의 정의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다.
안연은 극기복례가 인의 최고경지인 줄 알았기에 '회(回, 안연)가 비록 우
둔하지만 청컨데 이 말씀을 받들겠나이다'하고 대답했다.
논어의 주석에는 '안연이 극기복례의 공부를 시작한 뒤 석 달을 인에서 벗
어나지 않던 것이 그때의 일'이라고 쓰여 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극기는 마음의 욕망과의 싸움보다는 극기주의(금
욕주의), 극기훈련 등 육체적 훈련과정을 많이 지칭한다.
◈걸견폐요(桀犬吠堯)◈
013
(개는 자기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

"도척 같은 도둑놈의 개도 요임금을 보면 짖습니다. 요임금이 어질지 않
아서가 아니라 개는 원래 그 주인이 아니면 짖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신은
다만 한신을 알고 있을 뿐, 폐하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걸왕의 요왕에게 짖는다.' 라는 이 말은 '개는 주인만 따르듯 대립되는 상
대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편을 들 수밖에 없다.' 는 것을 뜻한다.
다음은 「사기」의 '회음후편(淮陰後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한신을 없애려고 장안을 잡아 왔으나 별 증거를 잡
을 수 없자 초왕에서 회음후로 계급을 깎는다. 그 뒤 정말 역적으로 물려 여
후(呂后)의 손에 죽게 되자 한신은,
"나는 괴통의 꾀를 듣지 않고 아녀자의 속인 바 된 것을 후회한다.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며 한탄하였다.
괴통의 꾀란 '항우가 남쪽, 유방이 서쪽을 차지하고 있어 동쪽인 제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왕(한신)이 어는 편에 가담하느냐에 천하 대세가 좌우되니
삼분천하(三分天下)하여 대세를 관망하라'고 하는 것이다.
한신이 남긴 말을 전해들은 한고조 유방은 곧 괴통을 잡아 들여 물었다.
"네가 한신에게 반역하라고 한 적이 있느냐?"
괴통은 태연히 대답했다.
"신이 반역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철부지가 신의 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망친 것입니다. 만일 그 철부지가 신의 꾀를 썼다면 폐하가 어떻
게 그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화가 치민 한고조는 괴통을 삶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괴통이 말했다.
"내가 삶아진 이유가 뭐고?"
"네가 배반하라고 한신을 충돌하지 않았느냐?"
"진나라가 정권을 잃은지라 온 천하가 이를 쫓았습니다. 결과는 폐하 것
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윗글과 같이 도척과 요임금 이야기를 한 다음 ,
"폐하와 반대되었던 사람을 다 삶아 죽일 작정이십니까?"
하자 , 화가 치밀었던 고조도 괴통의 말이 옳게 여겨 그를 곧 석방했다.
◈근화일일영(槿花一日榮)◈
064
(사람의 영화는 덧없다)

태산은 터럭끝을 속일 필요가 없으며 32세에 죽은 안자가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를 부러워 않는다.
소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끝에는 썩고
무궁화꽃은 하루를 피어도 스스로 영화로 여긴다.

백락천이 44세 때 조정의 미움을 사서 강주의 사마로 가는 도중, 원진이
'방언'이란 시를 보내준 데 대해 같은 제목으로 답해 지은 것이다.
원진은 백락천과는 둘도 없는 친구로 그도 강릉으로 좌천되어 슬픔에 싸
여 있을 때였다.
윗 글은 칠언율시(七言律詩) 5수 중의 첫 수로서 이렇게 이어진다.

어찌 세상을 그리워하여 항상 죽음을 근심하랴.
그렇다고 몸을 싫어하며 함부로 살지 말 것이다.
삶이 가고 죽음이 오는 것은 모두 환상이니
환상의 인간이 슬픔과 즐거움에 어찌 정을 맬 것인가?

백락천은 사람의 영화는 무궁화꽃과 같이 하루동안 피었다 지는 것이라며,
인생은 모두가 환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므로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금란지교(金蘭之交)◈
065
(쇠를 끊을 수 있는 향기로운 난초와 같은 우정)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孔子)가
말했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역경」의 계사상전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금란지교라는 말이 나왔다.
「세설(世說)」에 나오는 백락천의 시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이 '금
란지계'라고 하는 말이 나오며, 대홍정이라는 사람이 친구를 얻을 때마다 그
것을 장부에 기록하고 향을 피워 조상에 고하였는데, 이 장부 이름을 금란부
(金蘭簿)라 했다는 고사가 나온다.
◈금상첨화(錦上添花)◈
066
(좋은 일에 좋은 일이 더한다)

강물은 남원으로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울어지는데, 바람에 수정빛이 있어 이슬에 꽃다움이 있네. 문 앞의 버드나무는 고인이 될 도령의 집이고, 우물가의 오동나무는 전날 총지의 집일세. 좋은 초대를 받아 술잔에 술을 거듭하니, 아름답게 노래 불러 비단 위에 꽃을 더하네. 문득 무릉도원에 술통과 고기의 손님이 되니, 내 근원에는 아직 붉은 노을이 적네.

왕안석은 북송시대 중기 군사비 팽창에 의한 경제적 파탄을 구원하기 위
해 신법을 실시한 정치적 귀재이자, 송나라 시대의 시풍을 대표하는 시인으
로, 위의 시는 그가 만년에 정계를 떠나 남경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옛날에는 장권급제 하여 정승반열에 오르는 것, 외침을 막아 나라에 공을
세우고 장수가 되는 것, 세도가의 집에 장가들어 음관이 되는 것이 금상첨화
였다.
지금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대기업에 스카웃 되는 것, 고시 합격이나 의
시 또는 재벌 사위 되는 것, 연예인이나 체육인으로 스타되고 돈방석에 앉는
것,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 중소기업 경영자가 세계적 발명을 하는 것
등을 금상첨화라 생각한다.
◈금성탕지(金城湯池)◈
067
(가까이 가기 힘든 견고한 성)

반드시 영성을 굳게 지키면 다 금성탕지가 되어 공격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서」의 '괴통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진시황이 죽자 진나라의 가혹한 법과 자유의 억압에 항거하는 반란과 소
요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무렵 무신(武神)이라는 자가 조나라의 옛
영토를 평정하고 무신군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때 범양에 있던 괴통이라는 변설가가 범양의 현령인 서공에게 자기가
무신군을 만나서,
"만일 범양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현령을 섣불리 취급한다면 다른 현령
들은 그 항복이 헛수고임을 알고 금성탕지처럼 반드시 성을 굳게 지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양의 현령을 후하게 맞이하고 다른 곳으로 사자를 보내
면 그것을 보고 모두 싸우지 않고 항복할 것이다."
라고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무신군도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것
이었다.
서공은 그 말대로 따르기로 했다.
과연 괴통이 말한 대로 일이 잘 되자 범양 사람들은 서공을 덕이 있는 인
물이라고 칭송했으며, 30여 개의 성이 무신군에게 항복했다.
금성(金成)에는 '몹시 견고한 성'이란 뜻이 있으며, 금성탕지는 여기서 유
래된 말이다.
위나라 무후는 오기와 서하에서 배를 타며, '위나라는 천험의 요새로서 금
성탕지'라고 자랑했다.
오기는,
"왕이 어진 정치를 하지 않으면 이 배 안의 사람도 적국인이 된다."
고 말하고는, '나라가 견고한 것은 지형보다 마음의 단결을 통해서 이루어져
야 하며, 이것이 바로 금성탕지'라고 말했다.
◈금의야행(錦衣夜行)◈
069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 남이 알아주지 않는 보람없는 행동)

"부귀를 이루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알아줄 사람이 누구겠는가?"

「한서」의 '항우(項羽)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항우가 홍문연 잔치에서 유방을 죽이려다 시기를 놓친 다음, 유방이 한 번
거쳐 간 진나라 도읍 함양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했다. 유방이 살려준 진왕의
아들 영을 죽이고, 유방이 보존해둔 진의 궁궐 아방궁에 불을 질러 버렸다.
그 불은 3개월간이나 타올랐다.
항우는 재물과 보화를 약탈하고 미녀들을 잡아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려 하였다.
그러자 한생이 항우를 설득했다.
"함양은 산과 강이 사방을 험하게 막고 있으며, 땅이 비옥하여 이곳을 도
읍으로 삼으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천자가 되기 위한 도읍지보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므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윗글
과 같이 말하였다.
한생은 항우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물러나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갓 쓴 원숭이라더니(원숭이는 띠를 둘러도
오래 참지 못함을 비꼬는 것) 과연 사실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이 항우의 귀에 들어가자 한생은 죽임을 당했다.
한생의 염려대로 항우는 유방에게 천하를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항우는 24세에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3년 만에 패권을 잡았다. 그러나 천
하재패를 눈앞에 둔 대치상황에서 '금의야행' 운운하며 고향에 돌아가 자랑하
고자 하는 얄팍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항우가 '원숭이가 관을 쓴 격'이니
'수자( 子)'니 하는 평을 들을 정도의 인물밖에 안되었음을 말해 준다.
◈기사회생(起死回生)◈
070
(죽은 목숨을 다시 살리다)

노나라 사람 공손작이 '나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하여 사람들이 방법을 물어보니, '나는 반신불수를 고칠 수 있다. 반신불수를 고치는 약을 배로 늘리면 그것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고 했다.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오왕 부차는, 과거에 그의 아버지 함려가 월나
라에 의해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자 월왕 구천
은,
"군왕(君王)이 월나라에 있어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사람을 일으켜
서 백골에 살을 붙인 것과 같다. 과인은 감히 하늘의 재앙을 잊지 못하고 감
히 군왕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라는 말을 했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 대하여 그만큼 큰 은혜를 베푼 것이다.
기사회생이란 말은 현대에는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되살린다'든가 '위기상
황에서 구원해 사태를 호전시킨다'는 뜻으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과 독일은 기사회생하여 각각 세계에서 경
제순위 1위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기우(杞憂)◈
071
(공연한 쓸데없는 걱정)

기(杞)나라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붙일 곳이 없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잠자는 것과 밥 먹는 일을 그만두었다.

「열자(列子)」의 '천서편'에 나오는 우화 가운데 위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
다. 그의 근심하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그에게 가서 깨우쳐 주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은 기운이 쌓인 것뿐이며, 어디든 그 기운이 없는 곳이 없네. 종일
토록 하늘 가운데 있어도 몸을 굽히고 펴고 호흡함이 그치는 일이 없네. 어
찌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을 것을 근심하는가?"
그러자 근심하던 사람이,
"하늘이 과연 기운이 쌓인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은 마땅히 떨어지지
않겠는가?"
하고 묻지 이것을 깨우쳐 주려는 사람은,
"해와 달과 별들도 또한 기운이 쌓인 가운데 빛남이 있는 것일세. 만일
떨어진다 할지라도 다칠 염려는 없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땅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겠나?"
하고 묻지 깨우쳐 주려는 사람은,
"땅은 덩어리가 쌓였을 뿐이며, 사방의 빈 곳을 채우고 막아서, 어느 곳도
덩어리가 없는 곳이 없네. 종일토록 땅 위에서 걸어도 그 행함이 그치는 일
이 없네. 어찌 땅이 무너질 것을 근심하겠는가?"
하자 그 사람이 마음을 놓고 크게 기뻐했다.
이것을 깨우쳐 주려는 사람도 또한 크게 기뻐했다.
열자(列子)는 이 소리를 듣고,
"천지가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도 역시 잘못이다. 인간이 천지 조
화를 어찌 다 알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또한,
"하늘과 땅이 무너지든 무너지지 않든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무
심(無心)의 경지가 중요한 것이다."
라고 했다.
쓸데없는 걱정, 안해도 될 걱정을 뜻하는 '기우'혹인 '기인지우'는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기호지세(騎虎之勢)◈
072
(도중에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상태)

독고황후는 사람을 시켜 고조(高祖)에게 말했다.
"대세는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 호랑이를 탄 형세로서 내려올 수가 없소. 이것에 힘을 다하시오."

「수서(隨書)」의 '독고황후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북조 시대에 최후의 왕조인 북주의 선제가 죽고 난 후 외척인 한인(漢
人) 양견이 재상이 되었다. 그는 평소에 한인이 이민족에게 점령당해 가는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여 한인이 천하를 다시 호령할 야망을 키우고 있었는데,
선제가 죽자 그의 아들이 어리고 영특하지 못함을 구실로 제위를 양도받아 8
년 후 남조의 진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수나라를 세웠다.
그가 북주의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후에 독고황후가 된 그
의 부인이 사람을 보내 위와 같은 말을 하였는데 이 말에 크게 고무된 양견
은 드디어 수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내가 똑똑하다하여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 당초에 남편에게 첩의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는
데, 그때 나이가 14세였다. 황후가 된 후에도 어찌나 질투가 심한지 언제나
후궁에 대한 감시의 눈을 늦추자 않아 그녀가 쉰 살이 되어 죽을 때까지 후
궁에게서 자식을 하나도 두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조정에 두 성인이 있다'. 즉 천자가 둘이라고 했고 수의 문제
는 호랑이(황후) 등에 타고 있어 행동반경이 매우 좁다고 수군거렸다.
많은 통치자들이 '기호지세'를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했다.
일으키지 않아야 할 전쟁을 일으키거나 국고와 맞지 않는 공사를 벌여놓
고는, 기왕 시작한 것이니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국민을 담보로
한 강행군을 도모해 왔던 것이다.
◈기화가거(奇貨可居)◈
073
(차지하여 잘 보관해 두면 큰 이익이 남을 것이다)

자초는 진나라의 많은 서손으로 제후에게 볼모로 와 있었다. 자초는 수레를 타는 것도 넉넉하지 못하고 거처도 곤궁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장사차 한단에 갔다가, 그를 보고 '이 사람은 기이한 보화이므로 데려가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기」의 '여불위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불위는 한나라의 도읍인 양
적에 사는 큰 장사꾼이었다.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싼값으로 물건을 사서
비싼 값에 팔아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진나라 소왕 40년에 태자가 죽자 42년에 소왕은 차남인 안국군을 태자로
세웠다.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또 몹시 총애하는 첩이 있어,
그녀를 정부인으로 세워 화양부인(花陽夫人)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화양부
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안국군의 아들 가운데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자초라는 아들이 있었는
데, 조나라는 진나라가 자주 공격을 하자 자초를 예로 대우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자초를 기화(奇貨)로 생각한 여불위가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소양왕도 연로하시어 곧 당신의 아버지 안국군께서 진왕이 되실 것입니
다. 그러나 정실인 화양부인에게는 세자가 없고 서자는 당신을 포함해서 20
명이나 됩니다. 누가 대를 이을지는 지금으로서 단정지을 수 없으나 이렇게
멀리 인질로 와 있는 당신 차례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진나라
에 가서 당신이 태자로 책립되도록 힘을 써드리겠습니다."
여불위는 자초와 뒷날을 굳게 약속한 다음 진나라로 가서, 그를 화양부인
의 아들로 입적시켜 안국군의 후사를 잇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초의 환심을 사고 화양부인을 달래기 위해 천금이란 거금을 교제비로 썼다.
그러나 여불위는 약속 외에 무서운 음모를 품고 있었다. 즉, 자신의 아이
를 잉태한, 얼굴이 예쁘고 춤과 노래에 뛰어난 조희란 여자를 교묘하게 자초
의 아내가 되게 하였는데, 이 여인이 낳은 아이가 바로 진시황이었다.
자초라는 기화(奇貨)가 여불위라는 장사꾼 손을 거쳐 그 값이 폭등한 것이
다.
여불위는 물건을 볼 줄 알아야 하는 장사꾼답게 불행 속에 있는 자초를
기화로 삼아 일거에 천하를 차지하여 진나라 승상이 되고 10만 호의 봉록을
먹으며 천하에 그의 이름과 세력을 떨쳤으니, 장사꾼의 출세로는 그가 아마
첫손 꼽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돈밖에 모르고 남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여불위는, 결국 자기 친아
들이라고 할 수 있는 진시황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
◈낙백(落魄)◈
074
(뜻을 얻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역생이기는 진류의 고양 사람이다. 글 읽기를 좋아했지만 집이 가난하고 영락하여, 의식으로 삼을 직업이 없었다.

위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역생이기는 마을의 문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
무도 부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진류현에서는 모두가 그를 '미친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진나라 말기에 세상이 어려워지자, 역생은 한나라 폐공 유방의 측근을 만
나 이렇게 말했다.
"패공은 거만하고 사람을 바보취급하지만, 책략에 몹시 뛰어나 있다고 하
니 이런 사람에게 한 번 봉사해 보고 싶구나."
역생의 평범치 않음을 알고 있던 측근이,
"패공은 선비를 싫어해서, 선비가 갓을 쓰고 있으면 갓을 벗겨서 거기에
오줌을 눌 정도라구. 신비로서 패공을 설득하려 해서는 안된다구."
라고 말했으나 역생은 태평스런 얼굴로,
"상관없으니까 만나도록 해주게."
하고 부탁했다.
드디어 패공을 알현할 때, 패공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아무렇게나 하고
서 두 여인으로 하여금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는데,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
았다.
역생도 고개만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진나라를 도와서 제후를 공격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 하는 것인가?"
패공은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역생에게 말했다.
"이 조그만 선비놈아,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고 있는 것도 모르
느냐?"
그러나 역생이 말했다.
"의병을 모아서 무도하게 진나라를 치려면, 다리를 내리고서 어른을 만나
봐야 할 것 아닌가?"
그 소리에 패공은 얼른 태도를 고치고, 역생을 상좌에 앉히고서 얘기를 들
었다.
이 이후로 역생은 패공의 세객(說客)이 되어 제후들 사이를 오가며 활약하
게 된다.
한신은, 역생이 말 몇 마디로 제나라를 평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시
기해서 제나라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자기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한 제왕
에 의해서 팽사(烹死)를 당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낙백의 경험이 있다. 순풍에 돛 단 듯
이 목표 달성을 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대부분은 맹자에 있는 '필선고기심지
(必先苦其心志)'의 절차로 낙백에 처한다. 낙백을 못이기고 좌절해 버리면 끝
이 나지만 참고 단련하며 강태공이 낚시하듯 기다리면 역생이기처럼 언젠가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
075
(책이 호평을 받아 종이를 사서 베끼므로 종이 값이 오른다)

사공(司空)인 장화가 한 번 보자 감탄하여
"이것은 반고(班固)와 장형(張衡)의 작품과 같다. 이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하고도 남음이 있어, 오래 되어도 다시 새롭게 함이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부호하고 귀한 집안에서 다투어 서로 전사(轉寫)하여, 낙양에서 종이의 값이 올라갔다.

「진서(晋書)」의 '문원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晋)나라에 좌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좌옹은 하급 관리였으
나 그의 학식으로 전중시어사(지금의 검찰총장에 해당)라는 높은 벼슬까지 이
른 사람이다.
좌사는 젊어서 글을 배웠으나 별다른 진보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버지가 친구에게,
"내가 젊어서는 저렇지 않았는데…."
하는 말을 들은 뒤부터는 사람들과의 모든 접촉을 끊고 집안에 틀어박혀 학
문에만 모든 정력을 쏟았다.
이윽고 제나라 서울이었던 임치의 모습을 엮은「제도부」라는 서사시를
완성하였는데, 이로 인해 좌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좌사는 삼
국시대의 촉나라 서울 성도와, 오나라 서울 건업과, 위나라 서울 업을 노래한
「삼도부」를 지을 생각을 했다.
많은 참고서적과 선배들을 찾고, 대문에서 담 밑까지 종이를 놔두고 시상
이 떠오를 때마다 적고 하는 노력을 한 지 10년이 되었다.
자신의 지식이 부족함을 절감하고 자진하여 비서랑이란 직책을 얻어 많은
자료를 수집해 삼도부를 완성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가, 당시의 유
명한 시인 장화가 우연히 이 시를 읽고 격찬을 하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당시 귀족, 부자들이 앞을 다투어 사본하려
고 종이를 사는 바람에 마침내 낙양의 종이 값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당시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던 육기라는 학자도 좌사 같은 생각을 하고 있
다가 좌사가 지은 시를 읽은 후 시 짓는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고 한다.
종이가 발명된 지 200년 밖에 안되는 당시였던 만큼 낙양의 종이 값이 올
랐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난의포식(暖衣飽食)◈
076
(생활에 부자유스러움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도(道)가 있으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살지라도, 가르침이 없으면 새와 짐승에 가까워지게 된다. 성인이 또 이것을 근심하여, 설( )로 하여금 사도(司徒)를 삼아, 오륜을 가르치게 했다.

「맹자」의 '등문공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맹자가 60세가 지나 등문공에게 초대되어 갔을 때, 주(周)나라처럼 정전법
을 실시하여 등나라를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도록 설득했다.
이때 묵자의 영향을 받은 중농주의자인 허행이 송나라로부터 등나라에 와
서, 등문공으로부터 살 집과 전토를 받고 자기가 짠 거친 옷을 입고 자기가
경작하여 지은 양식을 먹고 사는 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유교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허행과 같은 생활을 시작한 진상이란 사람이
맹자에게, '등나라 임금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손수 농사 지어서 먹어야 하
지 않느냐'고 질문을 했다.
맹자는 '인간의 생활이란 분업을 하는 것이지 원시적 자급자족이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하고, '허행도 농기구나 그릇 등을 물물교환해 쓰지 않느냐'고
깨우쳐 주면서, '우임금 같은 분은 8년 동안 아홉 개의 큰 강을 막아 다스리
느라고 세 차례나 자기의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못 들어갔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임금과 선각자들이 강을 막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어 지금의 백성들
이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고(飽食暖衣) 사는 것이라고 말해 준 데서 포
식난의가 유래된 것이다.
아직도 빈부의 격차는 존재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난의포식하는 사
람은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만큼 나태와 불성실의 추세도 늘어가는 경향이
있다. 고도성장과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졸부들이 많이 생겼고, 거기에 따라
태어난 오렌지족, 야타족들이 그 한 부류일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배불리 먹고 빈둥빈둥 노는 것보다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것이 낫다."
고 했는데, 미래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가 아니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난형난제(難兄難弟)◈
077
(형, 동생을 구분하기 어렵다, 서로 비슷하다)

진원방의 아들에게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동생의 아들 효선과 각각 그 아버지의 공덕을 논하여 다투되 결정하기를 못했다. 그래서 태구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구는 이렇게 말했다. 원망이 형이 되기도 어렵고, 계방이 동생 되기도 어렵다.

「세설신어」의 '덕행편(德行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상군자'란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진태구가, 낭능후를 지
낸 순숙의 집을 아들 진기(陳紀, 元方)과 진심(陳諶, 李方), 진군(陳群, 長文)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한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은 어린 막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
부름을 시켰다.
이를 보고 궁중 점성가인 태사(太史)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덕성(德星, 眞人)이 동쪽 순의 집에 다 모여 있습니다."
라고 했다.
진기가 일곱 살 때는 이른 일도 있었다.
아버지 진식이 친구와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정오에 떠나자
고 약속했는데, 시간이 되어도 친구가 나타나지 않아 먼저 출발했다.
그 뒤에 친구가 찾아와서, 문 밖에서 놀고 있는 진기에게 아버지의 일을
물었다.
진기가,
"아버지는 오랜 동안 손님을 기다리시다가, 오시지 않아서 먼저 떠나셨습
니다."
라고 하는 말에 친구가,
"사람과 약속을 해놓고서 혼자서 먼저 떠나 버린다는 것은 무슨 경우인
가?"
라며 화를 내자 진기가 말했다.
"손님은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셨죠? 그런데도 정오에 오시지
않은 것은 신의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 또 아들을 보고 아버지의 욕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친구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수레에서 내려 사과하려고 했지만, 진기는 그를
상대도 하지 않고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며, 이 진기의 아들인 진군 역시 수
재로, 뒤에 위나라 문제 때 벼슬하여, 사공(司空)과 재상이 되어 구품관인법을
입법한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기의 아들과 진심의 아들 사이(사촌)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
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의 진식(진태구)에게 판
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 진식은,
"원망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
고 말했던 것이다.
◈남가일몽(南柯一夢)◈
078
(덧없는 인생과 부귀영화)

생은 남가의 허무함을 느끼고,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아, 드디어 마음을 도문(道門)에 살게 하여, 주색을 끊어 버렸다. 뒤에 3년을 지나 해가 정축(丁丑)에 있을 때 또한 집에서 죽었다. 이때가 나이 47세였다, 장차 숙계(宿契)의 연한과 일치하였다.

이공좌의 「남가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강남 양주 교외의 순우분이란 협객이 있었다. 그의 집 남쪽에 큰 느티나
무가 있어 그 아래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리다가 나무 그늘 아래서 잠
이 들었다. 그 때 자줏빛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저희들은 괴안국 국왕의 사자이온데, 당신을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하였다.
순우분은 그들을 따라가서 국왕의 사위가 되고 남가군의 태수가 되어, 20
년 동안 남가군을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니, 왕도 그 소식을 듣고 재상으로
삼았다. 재상이 된 지 얼마 안되어 단라국의 군대가 침입을 해와 3만의 군대
로 용감히 싸웠으나, 패하여 많은 군사가 죽고 아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
다.
그는 낙담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울로 왔으나, 그의 명성에 많은 사람들
이 모여들어 세력이 날로 커지자 괴안국 왕은 불안을 느꼈다.
"자네도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으니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어떤가?"
왕이 순우분에게 물었다.
"저희 집이 여기인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자네는 원래 속세의 사람으로 여기는 자네의 집이 아니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사자를 따라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그는 느티나무 아래서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일어나 꿈 속에서 들어갔던 느티나무 구멍을 살펴보니, 그 속
에 성 모양을 한 개미집과 그 남쪽에 또 하나의 개미집이 있었는데, 이것이
각각 괴안국과 남가군이었던 것이다.
그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덧없음을 깨닫고 도술(道術)에만 전념하다 세상
을 떠났다.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이 이야기는 개미의 나라라는 기발한 착상이 좋
았던지, 명나라의 탕현조에 의해 「남가기」로 연극화되어 민중들 사이에 널
리 보급되었다.
◈남귤북지(南橘北枳)◈
079
(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모양과 성질이 달라진다)

강 남쪽에 심는 귤을 강 북쪽에 옮기면 탱자가 된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의 영왕이 그를 초청했다. 그의 소문에 대한 호기심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영왕은 인사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나라에는 사람이 없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길 가는 사람은 어깨를 마주 비비고 발꿈치
를 서로 밟고 지나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필 경과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낸 이유가 뭐요?"
안영의 키가 작은 것을 비웃는 말이었다. 초나라 왕은 당시 제나라를 우
습게 보았기 때문에 이런 심한 농담을 함부로 대했다.
안영은 서슴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 까닭은 이러하옵니다.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서 보내는 관계가 있습니다. 즉,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
을 보내고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
에 속하기 때문에 초나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은근히 상대방을 놀려주려다가 보기 좋게 반격을 당하게 된 초왕은 자기
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첫 번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두 번째 계획이 진행되었는데, 왕이
바라보고 있는 뜰 아래로 멀리 포졸들이 죄인을 묶어 앞세우고 지나갔다.
왕은 포졸을 불러 세웠다.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제나라 사람입니다."
"죄명이 무엇이냐?"
"절도죄를 지었습니다."
초왕은 안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오?"
계획 치곤 참으로 유치하고 무모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안영에게
는 이 이상 더 큰 모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영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듯 초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강 남쪽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 북쪽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
는 것은 토질 때문이옵니다.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
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나라로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엔 줄로 아옵니다."
그 기지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
려."
하고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남상(濫觴)◈
080
(사물의 처음이나 근원)

자로가 옷을 잘 차려 입고 공자를 뵈었다.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유야, 이 옷자락은 무엇이냐? 옛날에 강은 민산(岷山)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 처음에 나옴에 그 근원은 가히 술잔에 넘칠 만하였다."

「순자」의 '자도편'과 「공자가어」의 '삼서편'에 있는 공자의 말이다.
윗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강의 나루에 이르러서는, 배를 늘어놓지 못하고 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건너지 못하였다. 오직 하류에 물이 많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너도
이미 의복을 이미 성하게 차려입고, 얼굴빛이 충만 되었구나. 천하에 장차
누가 즐겨 너에게 간하랴!"
이 뒤에 자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왔다.
공자는 또 말했다.
"유야, 여기에 뜻을 두라. 내 너에게 말하리라. 말을 자랑하는 사람은 화
려하고, 행동을 자랑하는 사람은 뽐내고, 앎을 얼굴에 나타내어 유능한 체하
는 사람은 소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
을 모른다고 말한다."

고려 고종 때 주열은 지방장관이었는데, 내신(內臣) 최중경이라는 자가 봉
명사신으로 와서 의복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이를 한심하게 여긴 주열이 떨어진 옷을 입고 그 옆에서 이를 잡으며 이
야기를 하니, 중경이 부끄러워 자리를 피하고 다시는 옷 자랑을 하지 않았다
고 한다.
◈남취(濫吹)◈
081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체 하다)

제나라 선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우(芋)를 불게 할 때는 반드시 3백명이 함께 불
게 했다. 남곽처사(南郭處士)가 청하여 왕을 위하여 우를 불렀다. 선왕이 이것을
기뻐하여 수백 명 분의 창고의 곡식을 주었다. 선왕이 죽고 민왕이 즉위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는 것을 듣기를 좋아했다. 처사는 도망쳤다.

「한비자」'내저설상칠술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임금이 신하를 다스리는 일곱 가지 술법이 적혀 있는데,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일곱 가지 술법이란, 첫째 여러 가지 일의 발단을 참고하여 볼 것, 둘째
잘못된 일은 반드시 처벌하여 위엄을 밝힐 것, 셋째 잘한 일은 상을 주어 능
력을 다하게 할 것, 넷째 매일 신하들의 말을 들어 볼 것, 다섯째 의심나는
명령을 내려보고 거짓으로 잘못을 시켜 볼 것, 여섯째 아는 것을 감추고서 물
어볼 것, 일곱째 마을 거꾸로 하여 반대되는 일을 해볼 것, 이 일곱 가지는
임금이 사용해야 할 것들이다."
그 한 예로 든 것이 남취 이야기다. 남취는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체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현맹인(玄孟仁)이 일찍이 사간으로서 대축(大祝, 축문을 읽던 벼슬)이 되어
친행제(親幸祭)를 지낼 때, 손에 축문을 가지고 망연히 한 마디도 읽지 못하자
조선조 태종이 크게 노하여,
"문신으로서 축문을 읽지 못하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는 한직으로 쫓아 버렸다.
◈남풍불경(南風不競)◈
082
(힘이나 기세를 떨치지 못하다)

약관인 사광은 말했다.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자주 북풍을 노래하고, 또 남풍을 노래했지만, 남풍
은 다투지 않아 죽음의 소리가 많다. 초나라는 반드시 공이 없을 것이다."
역수가(曆數家)인 동숙이 말했다.
"하늘의 도는 서북쪽에 많이 있으며, 남쪽의 초나라의 군대는 때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공이 없을 것이다."
치가인 숙향이 말했다.
"그 임금의 덕에 달려 있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진(晋)나라를 중심으로 연합군이 결성되어 교만한 제(齊)나라를
합곡한 적이 있었다.
평소에 찬탈을 꿈꾸던 정(鄭)나라 자공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
고 사전에 내통이 있던 초(楚)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였
다.
초나라 재상 자경은 명분이나 의로움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초의
장왕은,
"나는 즉위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외국에 군대를 파견한 적이 없소. 국민
들이 내가 게으르거나 안일만을 탐내어 위대한 선군의 유업을 망각하고 있다
고 생각할지 모르나 재상은 파병을 해주시오."
하고 명령했다.
자경은 자신이 반대해도 소용없을 것을 알고,
"그러면 한 번 싸워보겠습니다. 만약 전세가 불리하여 회군을 해도 외국
에 파병하는 것이니 주상께 불명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정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정나라 군대는 자공의 야심대로 싸움을 상대해 주지 않았으며, 자
경의 군대는 겨우 성 아래서 며칠 주둔하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자경의 군대는 철수 도중 큰 비와 추위를 만나 많은 동사자를 내며 전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진나라에서도 초군이 출동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사광, 동숙, 숙향 세
사람이 초군이 승리 못할 것을 예언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
083
(유능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자연히 그 존재가 드러난다)

무릇 현명한 선비가 세상이 있으면, 비유컨데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그 끝이 즉시 나타나는 법이오. 지금 그대는 나의 문하에 있은 지 3년이 되었지만 내 좌우의 근신이 아직도 그대를 칭찬한 적이 없으며, 나도 그대에 관해서 들은 바가 없소. 이것은 그대가 지닌 재능이 없는 까닭이오.

「사기」의 '평원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나라가 조나라와 싸워 크게 이긴 1년 후에 다시 조나라를 치기 위해 군
사를 일으켜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계속하여 진의 군대가 증강되자 조나라는 부득이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
어 구원병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평원군은 약 3천의 식객 중에서 문무의 덕
을 겸비한 20명을 뽑아 수행원으로 데려가기로 조나라 왕과 약속하고, 식객
가운데서 19명은 뽑았으나 한 명의 인재를 못찾고 있었다.
이 때 모수라는 자가 찾아와 스스로 자원하자, 평원군이 윗글과 같이 말하
면서 그를 뽑지 않으려 했다.
그 때 모수가 자신있게 말했다.
"저는 오늘 비로소 주머니 속에 넣어주기를 청원했을 뿐입니다. 저를 좀
더 빨리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었더라면 송곳 끝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
마 송곳 자루까지 나왔을 것입니다."
마침내 평원군은 모수의 힘에 결정적인 도움을 입어 초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평원군은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고 이후로 다시는 인물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평원군이 초나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가면서 19명을 뽑았으나 한 사람을
못 뽑고 있을 때 모수가,
"저를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했다는 데서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내우외환(內憂外患)◈

(안의 근심, 밖의 재난. 인간은 근심 속에서 산다)

그 위의 성인이라면 안으로부터의 근심도, 밖으로부터의 재난도 지니지 않고 견
디지만, 성인이 아닌 우리들에게는, 밖으로부터의 재난이 없으면 반드시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근심이 있다. 초나라와 정나라는 잠시 놓아두고서 밖으로부터의 근심을
내버려두지 않겠는가?

「국어」의 '진어(晋語)'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중엽에 막강한 세력의 초와 진 두 나라가 대립한 시대가 있었다.
당시에 진나라의 내부에서는 극씨, 낙씨, 범씨 등의 대부들이 정치를 좌우
할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나라와 충돌하기 전에 낙씨는 진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원령을 내린 후, 스스로 중군의 장군이 되고 범문자가 부장군이 되어 전열
을 가다듬었지만, 막상 진과 초의 두 군대가 충돌하게 되자 낙씨는 초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범문자는 이에 반대하여, '제후로 있는 사람이 반란하면 이것을 토
벌하고, 공격을 당하면 이를 구원하여 나라는 이로써 혼란해진다. 따라서 제
후는 어려움의 근본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이어서 윗 이야기를 한다
내우외환은 여기서 유래했다.
명심보감에는 원려(遠慮)가 없으면 근우(近憂)가 있다고 했으며, 불가에서
는 해탈이 없는 한 인간의 삶은 근심뿐이라고 하여 인간의 삶을 고해(苦海)라
고 규정하고 있다.
◈내조지공(內助之功)◈
085
(아내가 집안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다)

옛날 제왕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밖에서 돕지 않으면 안에서 돕는 것이 있었
다.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이 이로 말미암고 성하고 쇠하고 이로 쫓아 되어진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조가 위나라 왕이 되고 나서 후계자로 장자인 조비를 정할 것인가, 똑똑
하고 문장이 뛰어난 조식으로 정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나이와 장자라는 명분
으로 조비를 황태자로 정했다.
그러나 뒤에 조비의 황후 곽씨가 책략을 썼다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군
(郡)의 장관(長官)인 그녀의 아버지 곽영이,
"나의 딸은 여자 중의 왕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똑똑하였기 때문이다.
조비가 즉위하자 조예(曹叡, 3대 明帝)를 낳은 원후를 참소하여 죽였는데,
머리로 얼굴을 덮고 겨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자 중랑(中郞)인 잔잠이 위의 내용으로 상
소하였다.
이어서 경계해야 할 전례로「역경」이나「춘추좌씨전」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신분이 천한 사람을 귀한 자리에 앉히는 위험을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곽씨를 황후로 삼았으며, 여기서 내조지
공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남편의 사회 생활이나 출세에 미치는 아내의 도움을 내조의 공이라고 말
하는데,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지면서 외조지공(外助之功)이라는 말도 요즘에
는 자주 쓰인다.
◈노마지지(老馬之智)◈
086
(하찮은 인간이라도 나름대로의 장점과 특징이 있다)

제나라의 명재상인 관중과 습붕 두 사람이 제환공을 따라 고죽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했다. 그런데 갈 때는 봄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되어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관중은,
"이럴 때에는 늙은 말의 지혜가 도움이 된다."
고 말하고 늙은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라가니, 이윽고 길을 찾게 되었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제환공이 관중과 습붕을 대동하고 고죽국을 징벌하러 갔다가, 오
는 길을 잃어 관중의 늙은 말을 이용하여 윗 글과 같이 길을 찾는다.
한 번은 산중을 진군하는데 물이 없어 목이 말랐다.
습붕이,
"개미는 겨울엔 양지, 여름엔 산의 음지쪽에 사는데, 개미둑이 한 치만 되
면 그곳에는 물이 있는 법이다."
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관중과 습붕처럼 지혜 있는 현인도, 늙은 말의 지혜나 개미의 환경을 본받
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처럼 하찮아 보이는 존재도 다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기 마련이다.
의학의 발달로 노인인구가 증가되면서 새로운 노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데, 그 가운데 하나가 '노인인구의 노동력 활용'문제일 것이다. 고령으로 인
해 다소 둔하고 기민한 적응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들의 오랜 경험은 어디
서도 구할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의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지혜를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라는 한비자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우리도 무조건 은퇴만 시키기보다 활용할 묘방을 찾아야 할 것이
다.
◈노이무공(勞而無功)◈
087
(애만 쓰고 애쓴 보람이 없다)

옛날과 지금이란 물과 육지나 같은 게 아닙니까? 주나라와 노나라는 배와 수레
나 같은 게 아닙니까? 지금 주나라의 방식을 노나라에 행하려 한다는 것은 마치
육지 위에서 배를 밀고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수고롭기만 했지 아무런 성과도 없
을 것이며 자신에게 반드시 재앙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윗 글은「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순자(荀子)」의 '정명편'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막연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번잡하고 통일이
없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말은 하지만 요
령이 없고, 몹시 애를 쓰지만 공이 없다."
고 했고,「관자(管子)」의 '형세편'에도,
옳지 못한 것에 편들지 말라. 능하지 못한 것을 강제하지 말라. 알지 못
하는 사람에게 이르지 말라. 이 같은 것을 가리켜 수고롭기만 하고 공이 없
다고 말한다."
고 했다.
◈노익장(老益壯)◈
088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건강해진다)

"무릇 대장부가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며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

「후한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後漢) 광무제 때의 명장 마원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글을 배우
고 예절을 익혔으며, 무예에도 정통하여 그의 형은 그를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형이 젊은 나이고 죽게 되자 마원은 상례(喪禮)를
정중히 모셔 치른 후 예를 다하여 형수를 받들었다.
그 뒤 마원이 부풍군 독우관이란 벼슬에 있을 때 명을 받들어 많은 죄수
들을 압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죄수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애통하게 부
르짖는 것을 보고는 동정심이 우러난 나머지 모두 풀어주어 제각기 제 살 길
을 찾아가도록 하고 자신은 북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마원은 북방으로 가서 소, 말, 양 따위를 놓아먹이면서 지냈다. 부지런하
고 수완이 좋은 그는 수년간 정성껏 가축을 길러 그 규모가 수천 두까지 이
르렀다. 그래서 생활이 윤택해지고 많은 돈을 벌게 되자 가까운 친구가 이웃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었고, 자기는 오히려 떨어진 양가죽 옷을 걸치고 소
박한 식사를 하는 등 극히 근면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후 A.D. 41년에는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하고, 45년에는 흉
노 토벌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그의 형이 말한 대로 대기만성(大器晩成)하게
되었다.
위의 글은 마원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요임금은 '수즉다욕(壽則多辱, 오래 살수록 그만큼 욕되는 일이 많음)'이라
고 하였는데, 또한 오래 살면서 병들어 고생한다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건
강에는 육체와 정신이 있는데 적당한 건강관리 운동, 맑고 깨끗한 마음에 건
전한 정신을 소유하고, 백절불굴의 의지와 인간적인 사명감에 열중하면서, 공
자의 말대로 늙음이 오는 것조차 모르고 산다면 틀림없이 노익장할 수 있을
것이다.
◈녹림(綠林)◈
089
(세상을 피한 호걸들이 모인 도적의 소굴)

이 때 남군의 장패, 강하의 양목, 왕광 등이 운두(雲杜) 녹림(綠林)에서 일어나, 이름하여 하강(下江)의 군대라고 말했다.

「후한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과 후한 사이에 왕망이 세운 신(新)이란 나라가 15년간 계속된 일이
있었다.
왕망은 한나라를 빼앗아 황제가 된 다음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
책을 실시했다. 자질도 없는 왕망의 급격한 개혁으로 생활고와 혼란을 겪게
된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거기다 남방에 흉년이 들어 사
람들은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이 때 신시(新市)사람 왕광과 왕봉은 이들 난민들을 잘 조종하여 추대를
받아 수령이 되었고, 관군에게 쫓겨 도망쳐 다니던 마무, 왕상, 성단 등이 그
들 밑으로 몰려와 함께 이향취(離鄕聚)란 마을을 공략하여 녹림산 속에 근거
지를 차렸는데, 몇 달 사이에 7, 8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왕광 등은 형주
자사가 이끄는 2만의 관군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그들을 잘 물리쳤으며, 이후
각지에서 떠돌던 세력들을 흡수하여 5만이라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윽고 유수(광무제)의 유현이 군대를 일으키자 왕광등은 이에 합류하여
왕망군에 대항하는 큰 세력이 되어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녹림'은 푸른 숲이란 뜻으로서 '산림(山林)'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
을 혼동해서 '녹림처사(綠林處士)'란 말을 쓰는데 이것은 오류다.
옛날에는 벼슬도 세속도 마다하여 산 속에 파묻혀 글이나 읽고 있는 사람
을 산림처사라 불렀는데, 특히 이름난 학자에게는 나라에서 산림이란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 따라서 산림과는 달리 녹림에는 처사가 있을 수 없고, 있다
면 세상을 등진 호걸만이 있을 뿐이다.
당나라 이섭이 도적을 만난 후 지은 시에 도적들을 가리켜 '녹림의 호객
(綠林之豪客)'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뒤로 '녹림'은 도적을 뜻하게 되었다.
◈농단(壟斷)◈
090
(권력을 독점하여 국정을 좌지우지하다)

"옛날의 시장이란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없는 것과 바꾸는 곳으로, 관리는 그것을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천한 사나이가 있어, 반드시 우뚝한 곳을 구하여 그곳에 올라가 좌우를 바라봄으로써 시장의 이익을 휩쓸어가자, 사람들이 다 그것을 천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위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상인으로부터 세금을 거둔 것은 이 천한 사나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맹자」의 '공손추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가 제선왕의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은 시자라는 사람
을 통해,
"서울 중심지에서 큰 저택을 제공하고 만종(萬鍾)의 녹을 주어 제자를 양
성시킴으로써 모든 대신들과 국민들로 하여금 본보기가 되게 하고 싶다."
라고 말했다.
맹자는 말했다. 내가 만일 녹을 탐낸다면 어찌 10만종 녹을 받는 객경의
자리를 사양하겠는가? 옛날 계손이란 사람이 자숙의를 평하면서 말하기를,
'자신이 뜻이 맞지 않아 물러났다면 그만둘 일이지 또 그 제자들로 대신이 되
게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부귀를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부귀 속
에 혼자 농단을 해서야 쓰겠는가'라고 하였소."
이어서 농단이 이 세상에 처음 나타난 경위를 이야기 하였다.
정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소박한 상행위의 성립과 이에 대한 세금의
성립 등 경제사적인 설명으로, 맹자가 이야기를 한 것은 농단, 즉 이익의 독
점 행위가 정당한 일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귀를 독점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지금은 경제적 독과점이나 권력의 독점, 친인척의 발열화를 농단이라고 하
는데, 농단이 있는 곳에 억울한 사람이 많이 생기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 많이
볼 수 있다.
◈누란지위(累卵之危)◈
091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져 깨질 위험한 상태)

진나라는 지금 계란을 쌓아 놓는 것보다 정세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자기를 받아들인다면 진나라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이런 내용을 알릴 길이 없다기에 신이 모시고 왔습니다.

「사기」의 '범수채택열전(范 蔡澤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나라 범수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부하로 있을 때 수가를 따라
제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가의 미움을 사
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위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진나라 사신 왕계의 도움을
받아 장록(張祿)이란 이름으로 진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왕계가 진왕에게,
"위나라 장록 선생이란 사람은 천하에 뛰어난 변사입니다."
하고 소개하면서 범수란 사람은 현실을 윗 글과 같이 말한다고 부연한다.
이런 일이 있은 1년 후에 범수는 진왕을 만나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대외
정책만이 진이 육국을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진언하여 진소왕에 의해 재상
이 되고 크게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국가존망지추(國家存亡之秋)' 역시 '누란지위'와 비슷한 말이다.
하나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위급한 시기는 언제든지 닥치게 마련이다. 문
제는 그 위급함을 깨닫고 대처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있더라
도 나라에서 얼마나 현명하게 잘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조의 이율곡 선생은 그러한 위급함을 깨닫고 10만 양병론을 제시한
현명한 분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092
(글씨에 능한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구양순 선생과는 어떨까요?"
"그는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사용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글씨를 쓴다고 한다. 자네는 아무래도 안 될 거야."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네가 붓을 사용하는 데는 아직 딱딱한 데가 남아 있네. 그것을 없애면 대성할 것일세."

「구양순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는 중국의 남북 문화를 융합했을 뿐 아니라 서역, 인도, 로마의 문
화를 흡수하는 데 힘써 총합적인 문화를 완성시켰다.
당의 3대 서예가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은 해서(楷書)의 완성자들로서, 그
들은 진나라의 대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배워, 각자 구양순의 엄
정함, 우세남의 온화함, 저수량의 곱고 아름다움은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
다. 서도의 스승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젊은 저수량은 건국공신 위징의 추천에 의하
여 우세남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가 하루는 우세남에게 이렇게 물었다.
"저의 글씨를 지영 선생(智英 先生)과 비교하면 어떠할까요?"
지영 선생이란 우세남이 글씨를 배운 사람이다.
"지영 선생의 글씨는 한 글자에 5만 냥을 내도 좋다는 사람이 있는 것 같
지만 자네는 아무래도 안될 거야."
그 다음에 윗 글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나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능력을 자랑한 말일 뿐 글씨를 쓰는
사람이 붓을 택하지 않을 리가 없다. 무장이 말과 칼을 고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니취(泥醉)◈
093
(술에 몹시 취해 진흙과 같이 흐느적거리다)

양양의 어린이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거리를 가로질러 다투어 백동제를 노래하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빌려 묻기를 무슨 일로 웃는가?
산공이 술에 만취하여 진흙과 같음을 웃는다네.

이백의「양양가」에 나오는 시이다.
중국의 2대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이백은 40대가 되어서야 궁정 시인이 되
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대부분의 시기는 호북성을 중심으로 유람하며 세
월을 보냈다. 그 무렵 양양 부근의 명소 고적을 읊은 시 '양양가'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떨어지는 해 현산의 서쪽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거꾸로 흰 모자를 쓰고 꽃 아래를 방황하네.

그리고 위의 시가 이어진다.
'니취'란 일설에는 '니'라는 벌레가 뼈가 없어 물속에서는 활발히 움직이지
만, 물이 없어지면 진흙과 같이 된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나, 역시 술
에 몹시 취하여 흐느적거리는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
이백이 장안에 있을 때, 이틀 동안이나 술에 취하여 자고 있었는데, 심향
정에서 모란을 구경하고 있던 현종과 양귀비에게 호출되어 술과 음악을 갖춘
시를 짓게 되었다.
이백은 불려나갈 때 '니취'해 있었기 때문에, 환관인 고력사의 눈앞에 다리
를 내밀고, 신발을 벗기게 하는 방약무인한 행동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백의 술은 위(魏), 진(晉)의 죽림칠현이나, 도연명의 주도와 통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노장사상의 허무적이며 낭만적인 인생관, 우주관에 근거를 두
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백을 주선(酒仙) 또는 시선(詩仙)이라고도 하는지
모른다.
◈다다익선(多多益善)◈
095
(감당할 능력이 있으면 많을수록 좋다)

한신이 잡혀와 있을 때 어느 날 조용한 틈을 타서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수들의 능력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그 때 고조가 물었다.
"그럼 나는 어느 정도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다고 보는가?"
"폐하께선 십만 명 정도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어느 정도인가?"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 고조는 어이없이 웃으며,
"그렇게 다다익선인 그대가 왜 내게 잡혀 왔는가?"
"폐하께선 군사를 거느리는 데는 능하지 않지만 장수는 잘 거느리십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에게 사로잡히게 된 까닭입니다. 그리고 폐하의 경우는 이른바 하늘이 주신 것으로 사람의 힘은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기」의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고조는 천하를 통일한 후, 한나라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여기던 한신을,
항우의 모사였던 종리매를 숨겼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그의 계급을 왕(王)에서
후(侯)로 강등시켰다.
위의 내용은 한신이 잡혀와 있을 때 한고조와 한신이 서로의 군사운용 능
력과 함께 어떻게 해서 한쪽은 잡히는 신세가 되고 한쪽은 천자가 될 수 있
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세상에는 많을수록 좋은 것들이 있다. 지식, 재산, 경험, 친구, 기술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활용하면 오히려 없는 것만 또는 적은 것
만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바로 용인술(用人術)이다. 사람을 쓸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주변의 제반 여건들의 향방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다사제제(多士濟濟)◈
096
(훌륭한 사람도 옆에 인재가 많아야 일할 수 있다)

대대로 크게 밝아 그 계획 신중해라.
아름다워라. 많은 신하들 이 나라에 태어나고
나라는 인재를 낳아 주나라의 동량이 된다.
훌륭한 선비들이여, 문왕이 그대들로써 편안하시겠도다.

「시경」의 '대아편'에 나오는 시이다.
'대아편'에 '문왕'이라는 시가 있다. 주나라를 개국한 문왕의 덕을 찬양한
것으로 모두 7절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3절만 소개하겠다.

문왕이 위에 계시어 아아 하늘에서 밝게 빛나시니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그 받은 천명이 새롭기만 해
주나라가 크게 밝고 상제의 명이 알맞춰 내리셨다.
문왕께서 오르내리시며 상제 옆에 늘 계신다.
문왕께서 힘써 그 아름다운 성예(聲譽) 끊이지 않으신다.
상제께서 주나라에 많은 복 내리신다.
문왕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문왕의 자손들이 백세토록 흥성하고
무릇 주나라의 신하들도 대대로 크게 밝으리라.

윗 시는 그 다음절에 나오는 시이다.
'제제(濟濟)'란 이처럼 많은 인재들이 있기 때문에 문왕의 혼령도 편히 계
시게 되었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성왕, 명군, 성인이라 평가되는 위인들을 보면 그 주변에 훌륭
한 인재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볼 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업적 뒤에는 집현전 학자들 같은 인재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숨어 있
는 것이다.
◈단기지교(斷機之敎)◈
097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는 것은 짜던 베의 날을 끊는 것과 같다)

소년시절 공부를 하러 나가 있던 맹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베를 짜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나?"
"아직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는 칼로 끊어버렸다.
맹자가 섬칫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후로 맹자가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 배움이 힘써 천하의 대유(大儒)가 되었다.

맹자는 전국시대 중엽에 태어난 사람이다.
주자에게 재평가되어 아성으로 불려지게 된 맹자는, 부국강병에 광분하여
백성들을 혹사하는 권력주의적인 제후들에게 인간 본위의 덕치정치를 설득한
위대한 사상가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와 같은 큰 나무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아울러 한나라의
유향이 엮은 '열녀전(烈女傳)'에 전해지고 있다.
맹자는 가난한 선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손
에 의해 자라났다.
스승을 찾아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 중간에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짜던 베를 잘라서 교훈을 말하면서 말을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군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
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 두었다.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여자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떨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
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단장(斷腸)◈
098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

"환온이 촉나라로 가는 도중, 삼협(三峽)을 배를 타고 갈 때, 대오 중의 한 사람이 원숭이의 새끼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그리워하여, 언덕을 따라 슬피 울부짖으며 달리기를 백여 리나 하되 가지 않더니, 드디어 배 위로 뛰어들어 왔지만 그대로 곧 숨이 끊어졌다. 그 뱃속을 가르고 보니, 창자가 다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세설신어」의 '출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원숭이와 원숭이 새끼의 모성애 관계를 잘 묘사한 이야기로, 화가 난 환온
이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온 그 사람을 내쫓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삼협 땅에는 원숭이들이 매우 많았던 것 같은데, 그것은 그 고장의 원숭이
소리를 슬프게 노래한 시가 많다는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당나라 시인 왕창령이 지은 송별위삼의 마지막 구절에도,
"슬프게 들리는구나, 원숭이의 맑은 소리 꿈속에 길다."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단장'은 직역하면 창자가 끊어진다는 말이다. 우리말에 '애가 탄다'는 말
이 있는데, 이 '애'는 '창자'를 뜻하며, '탄다'는 것은 '타는 듯하다'는 표현의
과장이다. 이미 원숭이의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표현이 모성애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데, 이 때 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단장이라고 하게 되
었다.
◈당랑거철(螳螂拒轍)◈
099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덤벼들다)

"저것은 소위 사마귀라는 벌레입니다. 이 벌레는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은 모릅니다. 이 벌레는 제 힘은 생각하지 않고 적을 가볍게 아나이다."
그러나 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이 벌레가 만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천하에서 날랜 사나이가 될 것이다."
하고 수레를 돌려 피하여 가게 했다.

제나라 장공(B.C. 794~773)이 사냥을 나갔을 때 벌레 하나가 장공이 타고
가는 수레바퀴에 치이려 했다.
장공은 말몰이에게 물었다.
"저것은 어떤 벌레인가?"
그 때 마부가 윗글과 같이 대답하였는데 장공은 미물이지만 피했다고 전
한다.
또「장자」의 '천지편'에 보면 장자가,
"광포잔인하고 더구나 지혜가 없는 군주를 섬기는 데 어떻게 하면 좋은
가?"
라는 질문을 받고
"우선 신중하게 자신의 품행을 바로잡아 상대를 감화해 가도록 힘쓰시오.
당랑과 같이 두 발을 치켜들고 차바퀴에 덤비는 식이라면 소임을 다하지 못
할 것이오."
라고 말하고 있다.
문선(文選)에 실려 있는 진림(陳琳)의 원소를 위한 예주(豫州) 격문에도 '당
랑지부'란 말이 다음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조조의 군사는 겁을 먹고 밤낮 없이 도망쳐, 마침내는 오창
을 본거지로 하여 황하로 앞을 막고 당랑의 도끼로 큰 수레가 가는 길을 막
으려 할 것이다."
당랑거철은 어머어머한 힘의 차이를 가진 강적 앞에 분수없이 날뛰는 것
을 뜻한다.
살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
때 뻔히 안될 줄 알면서도 의욕과 욕심만을 앞세워 무모하게 덤비기보다는
다른 방안을 모색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
100
(큰 인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각고 끝에 이루어진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형상이 없다. 도는 숨겨져서 이름이 없다. 대저 도는 잘 빌려주어 또 이룬다

「노자」41장에 나오는 글이다.
"상등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등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있
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며, 하등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
는다. 웃지 않으면 족히 도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세운 말에
이런 것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것 같고, 평탄한 도
는 험한 것 같다. 최상의 덕은 골짜기와 같고, 너무 흰 것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덕은 부조한 것 같고, 세운 덕은 변하는 것 같고, 큰 네모에는 구석이
없다."
그리고 이 말에 이어서 '대기만성'이 나오는데, 여기서 '만성'이란 아직 이
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큰 인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것이 '큰 인물은 늦게 이루어진다'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에 최염이란 유명한 장수가 있었다. 그에게 최림이
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별다른 재능이 보이지 않자 친척들은 그를 바보취
급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최염은,
"아우는 대기만성 형이다."
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했는데, 훗날 과연 최림은 천자의 고문역까지 이르렀다
고 한다.
◈대동소이(大同小異)◈
101
(크게 생각하면 같고 작게 분류하면 다르다)

하늘은 땅보다도 낮고, 산은 연못보다도 편편하다. 해는 장차 중천에 뜨지만 장차 기울어지고, 만물은 장차 태어나지만 장차 죽는다. 크게 보면 한 가지이지만 작게 보면 각각 다르다. 이것을 소동이(小同異)라고 말한다. 만물은 크게 보면 한가지이지만 각각 다르니,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고 말한다.

「장자」의 '천하편'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는 '천하편'에서 묵가와 법가 등의 학설의 논점을 비판하고 도가사상
을 선양한 다음, 자신의 친구인 혜시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비판하는데, 혜시
의 말 가운데 윗 글과 같은 대동소이론이 있다. 대동소이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주자도 중용장구를 쓰면서 뜻은 대동소이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당나라의 노동과 마이도 서로 사귐을 맺으면서,
"어제의 같음은 같음이 아니고 다름은 다름이 아니다. 이것을 크게는 같
고 작게는 다르다고 말한다."
고 표현하고 있다.
◈대의멸친(大義滅親)◈
102
(대의를 위해 부자의 정도 희생시킨다)

석작은 충성된 신하다. 주우를 미워하여 내 자식인 후까지 죽였다. 대의를 위해 옥친의 정을 버린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춘추좌씨전」은공 34년조에 나오는 이야기로, 춘추시대 주환왕 원년, 노
은공 4년(B.C. 719)의 일이다.
위나라 공자 주우가 임금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형제로 주우는 서자였다.
일찍이 석작이 장공에게 주우에 대한 염려를 표시했으나 장공은 주우를
사랑한 나머지 방탕하게 길렀다. 석작에게도 석후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주
우와 한패거리로 환공을 죽일 때 같이 끼어 있었다.
주우는 자기 지위를 굳히기 위해 무력으로 이웃 나라를 침공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인심 획득의 방법을 모색하던 아들 석후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석작에
게 물었다.
그러나 석작은,
"주왕실을 찾아 뵙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왕실과 사이
가 좋은 진나라에 중계를 부탁해 보아라."
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미리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주우와 석후는 임금을 죽인 반역자이니 적절히 조치하여 주시오."
하고 뜻을 전했다.
석작의 부탁을 받은 진나라에서는 주우와 석후가 도착하자 그 즉시 잡아
가두고 위나라로 처형에 입회할 사람을 보내 달라고 청했다.
석작은 혹시 자기 체면을 생각해 자기 아들 석후를 살려 보내지나 않을까
하는 여멸에서 자신의 심복을 보내 직접 석후를 처형하도록 시켰다.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대의멸친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얼마 전 대학 부정입
학사건 때 나타났듯이, 높은 관리나 청렴한 인사도 자식 때문이라면 법을 어
기는 일에 불감증이 되거나 불이익이라도 감수하려는 것이 부모의 진심이다.
그렇게 볼 때 석작이 보여준 대의멸친은 살신성의보다 어려운 결단이라 할
수 있다.
◈대장부(大丈夫)◈
103
(남자다운 남자, 위대한 남자)

천하의 넓은 곳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지위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하고, 귀하여도 능히 음란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천하여도 능히 옮기지 않으며, 위엄과 무용도 능히 굽히지 못하는 것, 이것이 이른바 대장부이다.

「맹자」의 '등문공하'에 나오는 말이다.
경춘이란 사람이 맹자에게,
"공손연과 장의는 어찌 참으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그들이 한 번 성을
내면 제후들이 행여나 싶어 겁을 먹고, 그들이 조용히 있으면 온 천하가 다
조용하다."
고 말했다.
공손연과 장의 두 사람은 맹자 당시에 소진과 더불어 유명한 변사이지 책
략가들이다. 만약 출세가 사나이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들은 사나이 중의 사
나이였다.
그러나 맹자가 보는 관점은 달랐다.
"그들이 어떻게 대장부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예를 배우지 않았던가?
장부가 갓을 처음 쓰게 될 때는 아버지가 교훈을 주고, 여자가 시집을 가면
어머니가 교훈을 주는데, 어머니는 너의 집에 가거든 공경하고 조심하여 남편
에게 어기는 일이 없게 해라. 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정당한 것을 삼는 것
은 아내가 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라고 충고한다.
이 말은 공손연과 장의가 집권층의 비위에 맞게, 갖은 아부와 교묘한 말재
주로 상대방의 마음을 낚아채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마치 교활한
첩이나 영리한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그런 수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통렬히 비난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윗 글과 같이 대장부의 정의를 언급하였다.
「후한서」'조전전'을 보면 그의 조카 조온이,
"대장부란 마땅히 웅비해야 한다. 어떻게 능히 가만히 엎드려 있을 수 있
겠는가."
라며 경조승(수도장관의 속관) 벼슬을 그만 두는데, 이는 뜻이 있는 남자라면
당연히 크게 활동을 해야지 하찮은 벼슬에 몸을 담고 기가 죽어 지낼 수 없
다는 것이다.
조온은 흉년 때 집에 쌓아둔 식량을 풀어 만 명 이상의 굶주리는 자를 도
와주기도 했으며, 헌제가 장안으로 도읍을 옮길 때 시중으로서 동행하여 강남
정후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과연 웅비했다고 할 수 있다.
맹자와 경춘, 조온이 말하는 대장부의 정의에 다소 차이점은 있다.
그러나 뜻있는 사나이의 의기를 보여주는 것은 비슷하다.
◈도량(盜糧)◈
104
(도둑에게 식량을 준다, 이익 없는 일로 적을 이롭게 하다)

그러므로 제나라가 크게 패한 까닭은 초나라를 정벌함으로써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위 적의 군대를 빌어 도둑에게 식량을 가져다 준 것이다.

「사기」의 '범수채택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범수는 위나라를 탈출하여 진나라로 갔으나, 진의 실권이 소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와 그의 동생 양공에게 있어, 진나라의 위태하기가 누란지위라는 설득
에도 불구하고 1년이 넘도록 배알조차 못했다.
어느 날 궁실에 들어가게 된 범수는, 일부러 임금을 뵈러 온 척하면서 다
른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한 신하가,
"거기는 임금이 계신 곳이 아니오."
라고 일러주었다.
그 말에 범수는,
"이 진나라에도 임금 같은 것이 있는가? 태후와 양공이 있을 뿐이 아닌
가?"
라고 말했다.
당시 진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둘러싸여 있어, 공격과 수비가 유리하고, 백
성들은 용감하여 여러 제후를 평정하기에 족한 요인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은 양공이 주변의 한과 위
나라를 넘어 멀리 있는 제나라를 공격하는 이른바 원공근교의 책략을 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실권을 갖지 못해 불만이 대단했던 소왕은 범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곧 불러들여 그의 책략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범수는 소왕에
게,
"옛날에 제나라 민왕이 멀리 있는 초나라를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 자의 땅도 넣지 못했습니다.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확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제후들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
는 심한 꼴을 당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범수는 위의 내용을 인용하여 원교근공책을 건의하였고, 그것을 받아들인
진나라는 과연 여러 제후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도불습유(道不拾遺)◈
105
(나라가 태평하게 잘 다스려지다)

"자산이 정사를 다스리는 5년 동안 나라에 도둑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갖 않고, 과일이 길이 덮어도 따 가는 사람이 없고, 연장을 잃어버리면 사흘 만에 돌아오는 등 3년 동안 변함없이 하니 백성들이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사기」의 '상군전' 공자세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① 전국시대 진나라 효공이 공손앙을 써서 부국강병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형명학을 공부한 법치지상주의자였던 상앙은 집권하자 연좌제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실시하고, 법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법이 좋다고 와서
말하는 자도, 나쁘다고 말하는 자도 변방으로 쫓아 버렸다. 또한 태자가 법
을 범하자 태자 대신 보육관인 공자건을 벌하고, 태자의 사부 공손가를 자자
형(刺字刑)에까지 처하는 등 엄격한 법을 시행한 지 10년,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는 자가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졌으며, 전쟁에도 연전연승할 만큼 국
민이 용감해졌다. 그러나 효공이 죽고 혜문왕이 위에 오르자 상앙은 거열형
(車裂形)으로 되었다.
②노의 정공 14년, 56세가 된 공자는 대사구(법무구 장관)에 임명되어 재상
으로 직무를 보았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자 공자의 덕화정책은 노나라 구
석구석에까지 미쳤다. 물건을 매매할 때 속이는 법이 없어졌고 남녀간의 성
문란이 사라졌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아 제나라의 여행자가 노나라
에 이르면, 관의 손은 빌리지 않고 사람들이 물품을 주어 여행자를 만족시켰
다고 한다.
③「한비자」에 보면 윗 글과 같이 정자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불습유는, '나라가 잘 다스려져 태평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형용하는데,
그것을 성인인 공자는 3개월 만에, 현인 자산은 5년만에, 형법학자 상앙은 그
이상 걸려 이루어내었다.
◈도원결의(桃園結義)◈
106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 정원에서 의형제를 맺음)

생각건대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비록 성은 다르나 할지라도, 이미 형제를 맺으려고 하니, 곧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힘을 합쳐 곤란함을 구원하고 위태함을 도와,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편안하게 하리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은 외척에 의해 망했고 후한은 환관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 원인은 황건적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과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태평도의
교조 장각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
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진압하기 위한 관군의 세력은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
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서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
고, 이어 의용병 모집 게시판이 여기저기 나붙었다.
이를 본 유비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비였고, 그 다음이 관우였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나라 일을 걱정하던 세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함께
일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장비의 집 후원 복숭아 밭에서 의형제를 맺음으로
써 천하를 위한 그들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은 조조, 손권과 함께 촉나라를 세워 삼국
시대를 이루었다.
위에서 말한 도원결의는 작가의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이며, 소설이 끼친
영향은 너무도 커서 중국 민중들 사이에는 이 '도원결의'가 의형제를 맺을 때
서약의 모범이 되고, 한 어머니 배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뜻과 마음
이 맞으면 친형제 보다 더 큰 협력의 힘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원경(桃源境)◈
107
(속세를 떠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 이상향)

진나라 태원연간에 무릉의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 골짜기를 올라가던 중, 길의 원근을 잊어버리고 홀연히 양쪽 언덕에 복숭아 꽃이 만발한 것을 만나서 수백 보 가운데 다른 나무는 없고, 복숭아 꽃이 매우 아름답고 수많은 복숭아 꽃이 펄펄 춤추며 날렸다.

도연명「도화원시병기」에 위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어부가 복숭아 꽃에 취하여 강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숲이 끝나는
곳에서 자그마한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엔 넓
은 평야가 있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
져 있었다. 그 곳 사람들은 옛날 진나라 때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온 뒤 외
부와는 교통을 끊고 계속 이곳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부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며칠 쉬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찾
아가고 싶어 돌아올 때 길에 표시를 하며 왔다.
어부는 이 일을 태수에게 말했고, 태수는 어부의 말을 따라 그곳을 찾으려
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결국 찾지를 못했다.
고사(高士) 유자기도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으려고 했지만 병으
로 쓰러져 목적을 다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도원경(무릉도원)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도연명이 살던 시대는 불안정한 정부, 호족과 귀족, 군인들의 야망과 투쟁,
지방 군벌의 반란, 이민족과 한민족과의 혼란한 싸움 등으로 서민의 생활고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도원경은 도연명 한 사람만이 동경하던 유토
피아가 아니라 민중들의 간절한 유토피아였다고도 할 수 있다.
도원경을 꿈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듯하다. 인공위성에서
곡식의 풍흉작까지 사진을 찍는 시대임에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도원
경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기에 지금도 산골 깊은 곳에 살면서 좀 더 가
까이 도원경에 접근해 보려는 움직임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다기망양(多岐亡羊)◈
094
(목적을 망각하고 지엽적인 일에 매달리지 마라)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을 배움으로써 삶을 잃는다. 학문도 원래 그 근본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인데도, 그 끝은 이와 같이 다르다. 오직 한 가지로 돌아가 다시 하나로 돌아가면 얻고 잃음이 없다고 한다.

양자(楊子, 楊朱)의 이웃 사람이 양을 한 마리 잃어버려 모든 하인을 양을
찾으러 내보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냅니까?"
"갈림길이 많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간 사람들은 그냥 돌아왔다. 그 이유는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
이 있어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자 맹양손은 심도자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함께 양자를 찾아갔다.
우선 심도자가 양자에게 물었다.
"옛날 세 아들이 유학을 갔다 돌아오자 인의(仁義)에 대해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몸을 소중히 하고 이름을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라고 했고, 둘째는
'내 몸을 죽여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몸과 명성을
다 온전히 얻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과연 누가 옳은 대답을 하였습
니까?"
이 말을 듣고 양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황하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헤엄을 아주 잘 치기 때문에 배
로 사람을 건네주고 많은 돈을 벌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헤엄치는 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까운 사람이 헤엄을
배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들은 헤엄을 배우러 왔지 빠지는 것을 배우러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을 버는 사람과 목숨을 잃는 사람과는 차이가 많
다. 그대는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맹양손과 심도자는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맹양손이 말하기를,
"당신의 질문은 너무나 간접적이고 선생님의 대답은 분명치 않아 뭐가 뭔
지 도무지 모르겠소."
라고 하자, 심도자가 윗글과 같이 이야기하면서,
"자네는 선생님의 문에서 자라고, 선생님의 도를 익히면서도 선생님의 경
지에 이르지 못하니 슬픈 일이오."
라고 말했다.
다기망양은 학문의 길이 너무 여러 갈래여서 진리를 얻기 어려움을 뜻한
다. 제자백가의 학설을 일일이 구분하기 힘들었던 춘추전국시대에 나옴직한
말이다.
지금은 여러 갈래의 선택 상황에서 어느 것을 취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경우와 자기 잘못에 대한 변명의 경우에 쓰인다.
◈도주지부(陶朱之富)◈
108
(중국의 억만장자, 최고의 부자)

주공(朱公)은 도는 천하의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제후의 나라들과 통하며 물건들이 교역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주공은 산업을 닦고 재산을 쌓아, 때를 놓치지 않고 매매로 이익을 올리되, 사람들로부터 쥐어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교묘하게 생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잘 이용하여, 때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리하여 19년 동안에 세 차례나 천금의 재산을 만들어, 그 중에서 두 번은 그 재산을 가난한 친구들이나 멀리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기」의 '화식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월왕 구천은 재상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오나라를 침입했다가 크게 패하
여 인간으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적 화해를 하고, 복수를 위해 쓸개를 맛보며
부국강병에 힘써 20년 뒤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상장군 범려는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시기에,
"구천과 환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영화는 함께 할 수 없다."
고 하면서 제나라로 떠났고, 그곳에서 치이자피로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시작
하여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제나라에서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는데, 그
것도 잠깐이었고, 얼마 안 가 범려는, 그는 재상의 자리에 잠깐 취임했다가
곧 사퇴하면서,
"천금의 부를 누리고 재상까지 된다는 것은 영화의 극치다. 명성을 오래
누리려 하면 좋지 않다."
고 하며 벼슬을 그만두고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제나라 사람들에게 나누
어주고 도(陶) 땅으로 이사했다. 도에서도 장사를 시작해 또 다시 부를 축적
하였는데, 이때부터 도주공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19년 동안에 세 번이나
큰 부를 얻어 그 중 두 번씩이나 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주로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자손들도 그의 재주를 물려받아
더욱 부를 늘려 나갔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는 도주공의 이름은 부자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도청도설(道聽塗說)◈
109
(들은 것을 생각 없이 써먹는 경박한 행동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공자는,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위의 말은 그 자리에서 들은 말을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
은 덕을 버리는 일이라는 뜻인데, 본디 사람이란 선한 말을 들으면 그것을 마
음 속에 간직하여 깊이 생각하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길에서 들은 말을 깊이 음미하거나 실천해 보지도 않고 무책임하
게 사람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덕을 버리는 처사라고 평해도 별 수 없는 것이
다. 또 사실 무근의 풍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든가, 다른 사람의 나쁜
말을 듣고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은 덕을 버리는 처사가 되는 것이다.
「순자」의 '권학편'에도,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말한다.
귀와 입 사이는 4촌 밖에 안되니 이렇게 하고야 일곱 자의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고, 후한 시대 반고의「한서예문지」중 '제자략'에는 소설
가를 평하여,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길거리에서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기
록하고 있다.
◈도탄지고(塗炭之苦)◈
110
(진흙의 수렁이나 숯불에 떨어진 고통, 학정의 고통)

아아, 이 하늘이 백성들을 내심에 하고자 함이 있어 임금이 없으면 곧 어지러워지나이다. 오직 하늘이 총명함을 내시어 이에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한 나라가 있었으나 덕이 어두워 백성들이 도탄에 떨어졌나이다. 하늘이 곧 왕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시어 만방에 올바름을 나타내시어, 만왕의 옛 옷을 짜게 하시니, 여기에 그 떳떳함을 따르시고 하늘의 명을 받들어 따라야 하나이다.

「서경」의 상서 '중훼지고'에 나오는 말이다.
하의 걸왕은 요염한 미녀 말회와 함께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일삼는 반
면, 백성들에 대해서는 포악한 정치를 펴다가 은나라를 세운 탕왕에게 망한
다.
그러나 탕왕은 무력 혁명에 의하여 왕위를 얻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후세 사람들이 내가 한 행동으로써 구실을 삼을 것이 두렵도다."
라고 하였다.
중훼가 이 말을 듣고 탕왕에게 아뢰기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기 위
하여 무력을 쓴 것을 정당하다'며 그의 혁명을 긍정하고, 걸왕 밑에서 신음하
던 백성들을 도탄의 괴로움에서 구원하는 것이 천자에 오른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하였는데, 위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남북조시대 전진의 국왕 부견이 후연과 후진의 침략으로 죽자, 부견의 아
들 부비가 황제가 되어 전진의 각지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내 무력을 규합
하여 후진과 후연을 응징하자고 주장했다.
"선제(부견)가 도적에 붙잡혀 수도 장안은 야만인들의 소굴이 되었다. 나
라도 황폐하여 백성은 도탄의 어려움에 빠져 있다."
'도탄지고'는 이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111
(백 번 읽으면 뜻이 나타난다)

"동우는 가르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반드시 먼저 백 번을 읽으라'고 했고 '글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절로 나타난다' 말했다."

「삼국지」의 '위지' 13권에 나오는 말이다.
동우는 후한 말기 사람으로, 당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재주를 유력자
에게 팔아 출세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출세에 뜻이 없던
동우는 가난 속에서 몸소 일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여 손에서 책을 놓는 일
이 없었다.
그의 학문은 위나라 때 시중(侍中), 대사농 등 대신의 지위까지 오르고,
「노자」와「춘추좌전」의 주석을 할 만큼 깊었다.
따라서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내게서 배우기보다 집에서 혼자 읽고 또 읽어보게. 그러면 자연 뜻을 알
게 될 테니."
라고 거절하면서 백 번 읽을 것을 강조하였다.
백 번은 여러 번을 말하며 또한 알 때까지라는 뜻도 포함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것도 병이지만, 가르쳐 주
어야 할 것을 스스로 터득하라는 것도 잘한 일은 아니다.
왜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 넘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광야에 가득했겠
는가?
공·맹·정·주 네 부자 중에 정부자가「논어」는 평생 읽어도 그 뜻을
다 알기 어렵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으로 성경의 뜻을, 불교인으로
불경을 다 알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삼라만상 가운데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고,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 종교적 진리, 성령 충만과 대오의 경지, 우주의 신비 등이 바로
깨달아야만 하는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소위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배우
면서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독안용(獨眼龍)◈
112
(외눈 장수, 사납고 용감한 장수)

이극용의 그 때 나이는 28세, 다른 여러 장군들 중에서 가장 젊어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되찾았으니 공로는 제일이다. 군대의 세력이 가장 강해 모든 장군들이 다 그를 두려워했다. 이극용은 한쪽 눈이 아주 작아 거의 감겨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독안용(獨眼龍)이라고 불렀다.

당의 희종 말년(873) 대홍수와 큰 가뭄이 있었고, 거기에 막대한 세금까지
징수되자 농민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산동 일대의 농민 봉기의 기세를
타고 황소가 난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어 수십 만의 병력을 헤아리게 된 황
소는 낙양을 함락하고 수도 장안으로 진격, 스스로 제제라 칭하고 대제국을
세웠다.
성도로 난을 피하고 있던 희종은 돌궐의 사타족 출신인 이극용(후당의 태
조)을 기용하여 황소의 군대를 제압하게 하였다.
이극용은 각 절도사 휘하의 관군과 연합하여 그 선두에 서서 황소군의 부
수령 상양이 이끄는 15만 군대를 격파하고, 이어서 대승을 기록하며 황소를
장안에서 몰아내었는데, 「자치통감」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동공이곡(同工異曲)◈
113
(처리하는 방법은 같은데 만들어진 것은 차이가 나다)

"시(詩)가 올바르고 빛나는 것은 장자와 굴원의 이소(離騷)에 미치고, '태사(太史)'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는 양웅과 사마상여는 공정은 같되 곡을 달리한다. 선생의 글에 있어서는 그 가운데를 덮고 그 밖을 마음대로 한다고 이를 만하다."

한유는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복고문을 부르짖은 중당의 대문호다. 그
가 34살 때 국자사문박사에 임명되어 대학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문답
식 교육을 했다.
어느 날 한유가,
"설사 세상에서 벼슬 자리를 얻지 못해도 관직의 불공평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자신의 학업을 닦지 못한 부족함을 책망하고 한층 노력하는 일
이야말로 중요하다."
고 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선생님은 대문장가요 인격자인데도 주위의 신임도 못 받고, 친구의 도움
도 별로 없고, 자칫 죄를 받을지도 모르며 가정 생활은 어려운데, 처세의 도
리 운운함이 과연 가당합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한유는,
"공자나 맹자 같은 대성현들도 불우했는데 박사라는 한가한 벼슬에 붙어
있는 것도 과분하다."
라고 말했다.
'동공이곡'이란 말은 학생들이 한유의 문장을 윗 글과 같이 칭찬하는 것으
로, '그 글을 짓는 방법이 옛날의 문장과 비슷한데 그 흥취는 다르다'는 뜻이
다.
오늘날은 칭찬의 의미보다 '표면은 다른데 내용이 같다'는 경멸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똑같은 내용의 것을 다른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경우와, 표면은 다른데 내용이 똑같은 경우를 꼬집어 말할 때 쓰인다.
◈동병상련(同病相憐)◈
114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다)

"같은 병은 서로 불쌍히 여기고 같은 근심은 서로 구원한다. 놀라 나는 새는 서로 따라서 날고, 여울 아래 물은 따라 함께 흐른다."
"호마는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 월나라 제비는 햇빛을 찾아 노는 법이오."

「오월춘추」에 나오는 시이다.
아버지와 형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은 후 초나라를 도망쳐 오나라로 망
명해 온 오자서는, 관상을 보는 피리라는 사람의 추천에 의하여 오나라 공자
광에게 추천된다.
훗날 오자서가 오나라의 실권자가 되었을 때 초나라의 백비라는 자가 망
명차 오자서에게 몸을 의탁하러 왔는데, 그의 아버지 역시 억울한 죽음을 당
하였다.
오자서는 원수를 같이 한다는 것 하나로 그를 동정하여 왕에게 천거해서
대부 벼슬을 시킨다.
이미 대부의 위치에 있던 관상가 피리가,
"당신은 어째서 백비를 한 번 보고 그토록 믿는 것이오?"
하고 묻자 오자서는,
"그것은 나와 같은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오. 옛 노래가 있지 않소."
하고 윗 글과 같은 시를 인용했다.
그러자 피리는,
"내가 보는 바로는 그의 눈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범을 닮았소. 그것은
사람 죽이기를 보통으로 하는 잔인한 상이오. 절대로 마음을 주지 마시오."
하고 말했다.
오자서는 피리의 충고를 무시하고 백비를 태재까지 올렸다.
그러나 백비는 적국인 월나라의 뇌물에 넘어감과 함께 자신이 더 크기 위
해 자기를 이끌어 준 큰 은공을 원수로 갚고 말았다.
◈동호직필(董狐直筆)◈
115
(죽음을 무릅쓰고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한 동호의 곧은 뜻)

뒤에 공자는,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을 굽히지 않고 곧게 썼다. 조순은 옛날의 훌륭한 대부다. 법을 위하여 악명을 잠자코 받았다. 아깝도다. 국경을 넘어갔더라면 악명을 면했을 터인데."
하고 아쉬워했다.

「춘추좌씨전」선공 2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진나라 영공은 제후의 덕이 없는 사람이었다. 잔인한 성품에 과
중한 징세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으며, 충신을 미워하고 하찮은 일로 사
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영공에게 조순이 자주 간하자, 이를 귀찮게 여긴 영공은 자객을 보
내 조순을 없앨 계략을 꾸몄다.
자객이 조순의 집에 숨어든 것은 아침 이른 시각이었고, 이미 궁궐로 들어
갈 준비를 끝낸 조순은 방문을 열어놓은 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존엄함에 압도된 자객은 죽일 생각을 못하게 되었고, 임금에 대
한 충성과 배반 사이에서 갈등하다 조순의 집에 있는 느티나무에 머리를 찧
고 자살했다.
영공은 이번에는 병사들을 숨겨놓고 조순을 술자리로 부른 후 죽이려 했
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호위관인 제미명이 조순의 손을 끌고 도망치려 하자,
영공은 큰 개 두 마리로 하여금 뒤쫓게 했다.
제미명이 그 개들을 때려죽이고, 다시 습격하는 병사들을 베어 죽일 때,
조순이 전에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는 영첩이란 사람이 병사들 가운데 있다
가, 창을 들고 병사들을 막아 조순을 도망치게 해주었다.
조순이 나라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국경의 산에 도착했을 때, 조천이 영공
을 죽였다는 전갈을 받고는 산을 넘지 않은 채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태
사인 동호가 궁정 기록에 '조순이 임금을 죽였다'고 써서 조정에 고시했다.
조순은,
"나는 임금을 죽이지 않았소."
라며 항의했고, 이에 동호가 대답했다.
"당신은 정경이면서도 도망쳤고, 돌아와서도 하수인을 처치하려 하지 않으
니 이 책임은 당신이 아니고 누구겠소?"
이 말을 듣고 조순은 탄식했다.
"아아, 시에 '나의 생각이 스스로 이 근심을 남겼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나
를 두고 이른 말이로구나!"
위의 글은 훗날 공자가 윗글과 같이 동호와 조순을 평한 글이다.
동호가 권세에 아부하거나 무서워하는 일이 없어 사실을 사실대로 올려
사관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권력층의 가슴을 놀라게 했다 해서, 후세에 권세
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쓰는 것을 동호직필에 비유해서 말한다.
◈득롱망촉(得 望蜀)◈
116
(농서 지방을 얻으니 촉 땅이 탐난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

"두 성이 만일 함락되거든 곧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촉나라 오랑캐를 쳐라. 사람은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미 농을 평정했는데 다시 촉을 바라게 되는 구나. 매양 한 번 군사를 출발시킬 때마다 그로 인해 머리털이 희어진다.

「후한서」'광무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의 유수(광무제)는 제위에 오르자 낙양을 수도로 정하고 모든 곳, 모든
세력을 정복하여 마지막으로 농서의 땅까지 평정하고 난 후, 구석에 있는 촉
땅만 남긴 상태에서 위의 내용처럼 명령과 함께 자신의 감회를 술회했다.
이 말은「후한서」의 '헌제기'에도 나온다.
촉나라 유비와 오나라 손권이 대립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위나라 조조는 한
중으로 쳐들어갔다.
이 때 조조의 부하였던 사마의가 조조를 보고,
"이 기회에 익주(촉)의 유비를 치면 틀림없이 우리가 승리를 거두게 될 것
입니다.
하고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조조는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사람은 만족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늘 괴로운 것이다. 이미 농을 얻었는
데 다시 촉을 바랄 수야 있겠느냐."
라면서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조조는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익주 진격을 포기한 것은 힘이
부족해서였다.
광무제의 솔직성과 조조의 간사스러움을 득롱망촉에서 대조해 볼 수 있다.
◈두찬(杜撰)◈
117
(근거가 확실치 못한 저술이나 틀린 곳이 많은 작품)

"두묵은 시를 짓는 것이 율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일이격에 맞지 않는 것을 두찬이라 한다."

왕무가 지은「야객총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두묵은 송나라 시인으로 그가 지은 시는 당시 구양수와 함께 인기가 있기
는 했으나 율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로 무엇이고 격식에 맞지 않는
것을 두찬이라고 이르게 되었다. 즉, 두묵이 이은 글이란 뜻으로, 그 원문이
윗 글의 내용이다.
두찬을 이렇게 설명한 왕무 자신도 자기의 설명이 '두찬'의 평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서인지 두(杜)란 글자의 뜻을 설명한다.
민간에서는 좋지 못한 밭이나 농장들을 두전(杜田), 두원(杜園) 이라고 한
다. 즉, '두'란 글자는 나쁘다든가 덜 좋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집
에서 빚은 맛없는 술을 두주(杜酒)라고 하는데, 임시 대용품이나 엉터리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근거가 확실치 못한 것을 '두찬'이라고 한다지만, 그 두찬이란 말 자체도
실상은 근거가 확실치 못한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두찬이란
단어도 퇴고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득어망전(得魚忘筌)◈
118
(목적이 달성되면 목적을 위해 사용한 도구를 잊는다)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고 만다. 제(蹄)는 토끼를 잡는 덫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고 만다. 내 어찌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얻어, 그와 더불어 말할 것인가!"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망전(忘筌), 망제(忘蹄), 망언(忘言)은 시비와 선악 같은 것을 초월
한 절대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상대를 추월하여 이 세상의 만물은 모두 하나라고 생각하는 절대적인 경
지에 이르면 옳고 그름도, 선하고 악함도, 아름다움과 추함도 없다는 것이 장
자의 주장인 것이다.
윗 글에서 말하는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란 '말에 구애되지 않는 사람'
을 뜻하며, '말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상대적인 논리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득어망전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평생 은혜를 잊지 않을 것처럼 하
다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망덕(忘德, 득어망전)하고 배은(背恩)하고, 심지어
토끼 사냥이 끝난 후엔 개를 잡아먹는다는, 즉 도와준 사람을 짓밟고 일어서
는 '토사구팽'까지 일삼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등용문(登龍門)◈
119
(입신출세의 관문)

이 때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기강이 퇴폐하였다. 이응도 홀로 바람과 같은 재가를 지녀 명성이 저절로 올라갔다. 선비들은 그의 얼굴을 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하여 '등용문'이라고 하였다.

「후한서」의 '이응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 말 환제의 시대는 환관들의 횡포가 극심한 시대였지만, 일부 정의파
관료들은 환관들의 사악한 횡포에 심하게 항쟁하여, 드디어는 소의 '당고지화'
를 불러왔다.
그 정의파 관료들의 영수로 지목되는 사람이 바로 이응이었다.
이응은 기강이 퇴폐된 궁궐 안에 있으면서도 선현들의 가르침을 지키어,
쉬지 않고 항상 고결하게 몸을 유지했다. 그러므로 그의 명성은 점점 올라
가, '천하의 모범은 이응'이라는 칭송을 받았거니와, 특히 청년 관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에게 인정받음을 윗 글에서와 같이 등용문이라고 불러 큰 명예로
생각했다.
용문이란 원래 황하 상류에 있는 산골짜기 이름으로, 물의 흐름이 매우 가
파르고 빨라 웬만한 물고기는 오리기 어려운 곳이었다. 용문 밑으로 모여든
수천 마리의 물고기 가운데 어느 것도 올라가지 못할 만큼 대단한 곳이었는
데, 만일 오르기만 하면 그 때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등용문과 반대되는 말에 점액(點額)이란 것이 있다. '이마 액, 흠 점'으로
직역되는 이 말은 이마에 상처를 입는다는 뜻으로 용문을 올라가려고 급류에
덤벼든 물고기들이 물살에 휘말려 근처에 있는 바위에 이마를 부딪혀 정신을
잃고 다시 하류로 전락하는 것을 말하는데, 출세를 위한 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한다.
등용문은 이응의 인정을 받음을 비유해 쓴 것이 시초였으나, 당대에 와서
는 오로지 과거급제만을 뜻하게 되었다.
◈등태소천(登泰小天)◈
120
(사람은 주어진 지위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공자가 노나라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를 구경한 사람에게는 어지간한 큰 강물 따위는 물같이 보이지가 않고, 성인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에게는 어지간한 말들은 말같이 들리지가 않는 법이다."

「맹자」의 '진심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가 위의 내용에 이어 계속해서 말했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여울물을 보아야 한다. 해와 달은
명(明)에 있으니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면 반드시 비치게 마련이다. 흐
르는 물이라는 것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군자
가 도에 뜻을 두었을 때도 일정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노나라 속에서는 노나라의 크고 작음을 느낄 수 없으나 동산에 올라가 노
나라 전체를 보면 별 것 아님을 안다. 또한 높이 솟아 있는 태산 위에 오르
게 되면 노나라는 작은 점으로 여겨지고, 천하마저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구경한 사람에게는 강물이 너무나도 작게 여겨지
고, 성인과 같은 위대한 분에게 조석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
게서 아무리 좋은 말들을 많이 들어도 한갓 말재주나 부린, 알맹이 없는 것으
로 느껴질 뿐이다."
맹자의 뜻하는 바는 노나라 중국 천하의 지형적 대소(大小)의 대비를 통해
성인의 교훈의 심천을 말하려 한 것이다.
맹자 자신은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사숙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공자의 직접 제자라 해서 공자의 학문과 교훈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
니다.
자로는 집에는 들어왔으나 방에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논어」에
나와 있다.
누가 자공에게,
"당신이 공자만 못한 게 무어냐?"
고 했을 때,
"공자와 같아진다는 것은 사다리로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다."
고 했다.
우리는 학문과 인격도야에 있어서 태산에 오르는 자세, 바다를 보는 자세
로 높고 깊고 넓음의 무한함을 알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이동풍(馬耳東風)◈
121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시나 부를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드네. 한가한 동풍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아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모양과 같네.

이백의「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에 나오는 시이다.
왕십이란 사람이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하여 심각한 비판을 제시하며, 자
신의 불우함을「한야독작유회」라는 시로 보내온 것에 이백이 답을 했다.
"술을 마셔 만고의 쓸쓸함을 씻어 버리게. 그대처럼 고결하고 뛰어난 인
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쓰이지 못함이 당연하네. 지금 세상은 투계-당시 왕후
귀족 사이에서 즐겨 유행되었다-의 기술이 뛰어난 인간이 천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만적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운 인간이 권력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는 세상이네. 물론 자네나 나는 그런 인간들의 흉내를 낼 수
없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
거나 부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이백은 윗 글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시를 듣고 마이동풍같이 여긴
다고 한탄한다.
다음에 이백은 보답 받는 일이 박했던 옛 사람들의 예를 열거하며, 억지로
영화 따위는 바라지 않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끝맺고 있다.
마이동풍은 남의 하는 남을 전혀 관심 없이 들어 넘기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우이독경과 같이 이쪽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상대에게 아무런 반응도 주
지 못하는 것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한다.
◈마혁과시(馬革 尸)◈
122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나이는 마땅히 변경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후한서」의 '마원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마원은 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으로, 용맹과 인격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지금의 월남인 교지에 이어 남부지방 일대를 평정하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모두 판에 박은 듯, 천편일률적인 인사만 하였다. 지모가 뛰어나
기로 유명한 맹익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마원이 맹익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인가. 옛날 복파장군 노박덕이 남월을 평정하고 일곱 군을 새
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의 작은 봉토밖에 받지 못했네. 그
런데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상이 너무 과분하니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좋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마원은,
"지금 흉노와 오환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하고 윗 글과 같이 사나이는 싸움터에서 죽어야 대장부답다고 강조한다.
그가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자 광무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마원
을 다같이 환송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마원은 그 후도 나라의 근심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계속 출정하여 무인의
의무를 다하였다.
◈막역지우(莫逆之友)◈
123
(마음에 조금도 거슬림이 없는 친구, 허물없는 친한 벗)

자사와 자여, 자리와 자래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했다.
"누가 능히 무(無)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사생존망(死生存亡)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그리고 마음에 거슬림이 없어,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

「장자」의 '대종사현'에 똑같은 형식의 두 가지 이야기가 실려있다. 하나
는 위에 있는 자사, 자여, 자리, 자래의 막역지심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
상호와 맹자반 그리고 자금강의 이야기이다.
장상호, 맹자반, 자금강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누가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누가 서로 도우랴. 누가 하늘에 올라가 안
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는
다하는 바가 없으랴'하고 하고는 서로 보고 웃으며, 마음에 거슬림이 없어 드
디어 벗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가(挽歌)◈
124
(상여를 메고 갈 때 죽은 자를 애도하며 부르는 노래)

해상( 上)해는 부충 내린 이슬, 어찌 그리 쉽게 마르는가.
이슬은 말라도 내일 아침에는 다시 내린다.
사람이 죽어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쏘냐.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의 유방이 초의 항우를 격파하고 한의 고조가 되었을 때, 유방이 파견한
화목사 역이기를 살해한 일이 있는 제왕 전횡은, 유방의 보복이 두려워 부하
5백여 명과 함께 섬으로 도망쳤다.
한고조인 유방은 전횡이 뒤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전횡을 용서
하고 불렀다. 그러나 전횡은 일단 섬에게 나와 낙양 못미처 30리까지 왔을
때, 유방의 포로가 되어 유방을 섬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살하였
다.
그리고 그 목을 고조에게 바쳤는데, 그를 따르던 사신도 뒤이어 전횡의 무
덤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을 잘라 순사했고, 섬에 남아 있던 5백여 명도 전횡
의 높은 절개를 사모해서 다 순사했다.
그 후에 문인이 '해로'와 '호리' 두 장의 추모가를 지어 전횡을 애도했는데,
윗 글은 그 중 하나인 '해로'의 내용이다.
그 후 한무제 때 악사 이연년이 앞의 두 장의 추모가를 두 곡으로 만들어
전자는 공경귀인을, 후자는 사서부인을 송장하며 부르게 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만가(挽歌)'라고 이름 붙였다.
죽음을 조사하는 말을 '만(挽)'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
다.
「진서(晋書)」의 '예지(禮志)'에는, 만가는 원래 무제 때 노동자들이 부르
던 노래였는데, 노랫소리가 가슴을 칠 만큼 슬프고 간절하여 드디어 죽은 사
람을 장송하는 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만록총중흥일점(萬綠叢中紅一點)◈
125
(많은 남자들 속에 아름다운 여인하나)

온통 새파란 덤불 속에 핀 빨간 꽃 한 송이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이 많음을 필요치 않게 한다.

왕안석의 '석류시' 가운데의 일부로,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온통 새파랗기만 한 푸른 잎 속에 한 송이 붉은 꽃이 방긋 웃고 있다. 사
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의 색깔은 굳이 많은 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복숭아, 오얏 등 수없이 많은 꽃이 어지러울 정도로 한꺼번에 활짝 피어 있는
것보다는, 무성한 푸른 나뭇잎 사이에 어쩌다 한 송이 빨갛게 내밀어 보이는
석류꽃이 사람의 마음을 더 끌게 한다는 그런 뜻이다.
여기서 '홍일점'이라는 단어가 강조되는데, 과거 여성의 사회진출이 적었던
시절, 여성을 직장의 꽃이란 의미에서 흔히 홍일점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
였다. 이 단어는 여성의 존재에 대해 '소중함'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관상용이나 양념 같은 존재임을 표현하는 이중성을 포함하고 있다.
◈만사휴의(萬事休矣)◈
126
(어떠한 방법도 강구할 수 없는 체념의 상태)

고보욱이 어린 아기였을 때,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종회가 특히 편애하여 그것을 질투하여 흘겨보는 사람이 있어도 그저 웃고 있었기 때문에, 형남 사람들은 만사휴의(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형남고시세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10세기 전반 당나라가 멸망한 뒤는, 당나라 때 절도사의 후신인 군벌에 의
한 군웅할거 시대로 소위 오대(五代)의 세상이 되었다.
그 사이 각지에 있는 절도사의 후예들은, 그 지방에서 은연중에 세력을 잡
아, 계속 일어난 제국에 교묘하게 추종하면서 독립된 왕구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형남에 있는 고씨 집안도 그 중 하나로, 시조인 고계홍이 당나라 말기에
형남절도사가 된 이후로 그의 아들 종회, 종회의 장남 보융, 열째 아들 보욱,
보융의 아들 계중으로 이어져, 4대에 걸쳐 57년동안 형남을 지배하다 송태조
에게 귀순했다.
그런데 4대째인 고보욱은 종회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은데다 반병신이었고,
허약하고 음란하였으며, 극도의 관음증이 있어 매일 같이 기생들을 모아놓고
병사들 중에서 건장한 사람을 골라 혼교를 시키고, 그것을 처첩들과 함께 밭
뒤에서 바라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눈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변태성욕자요, 반병신인 고보욱을 보고 형남 사람들은 '만사유의(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탄식했다는 것을 위의 글로 알 수 있다.
결국 그 아들대에 고씨집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만전지책(萬全之策)◈
127
(조금도 허술함이 없는 완전한 계책)

"조조는 반드시 원소를 격파한 다음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관망만하고 있으면 양쪽의 원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조조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만전지책이 될 것입니다."

「후한서」의 '유포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 말기 조조의 북방의 원소간에 결전이 벌어졌다. 당시 조조의 군대는
3만이었으나, 원소의 군대는 무려 10만이나 되었다.
조조는 한때 도읍인 허창까지 후퇴할 만큼 불리한 전세였음에도, 원소의
명장 안량과 문추를 쓰러뜨리는 등 적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대군을 거느리고도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던 원소는 형주 목사
였던 유표에게 원주를 청했다.
유표는 원주하겠다고 승낙은 하면서도 아무 움직임도 없이 관망하면서 양
쪽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있었다.
이것을 본 원소의 부하 한숭과 유선이 유표에게 윗글처럼 조조를 따르는
것이 만전지책이라고 설득했지만, 의심이 많은 유표는 결정하지 못한채 마설
이다가 뒤에 환근을 당하게 되었다.
'만전'이란 말은 「한비자」의 '해로편'에도 나오고 「사기회남왕전」에도
나온다.
'만전지책'은 가장 안전한 방책, 즉 조금의 실수도 없는 계책이란 뜻으로서
적절한 시간, 즉 적절한 시행시점과의 어우러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해서
는 안될 것이다.
◈망국지음(亡國之音)◈
128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음악 해로울 줄 알면서 몰두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화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니, 그 정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기 때문이다.

「예기」의 '악기', 「한비자」'십과편'의 내용이다.
「예기」가운데 '악기', 즉 음악의 의의를 설명한 일편이 있는데,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적인 발로이며, 따라서 사람은
음악을 들음에 의하여, 그 음악이 행하여지고 있는 나라의 정치적인 정세와,
인심의 소재까지도 알 수 있다.
무릇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감정의 움직임에 의해 소
리가 나타난다. 소리는 글을 이루니 이것을 음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윗 글과 같이 치세의 음과 망국지음을 설명한다.
망국지음이란 그 정치가 혼란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게으름으로 흐르고,
상하의 기강과 풍기가 문란하여 이윽고 멸망으로 이르는 나라의 음악을 가리
킨다.
「한비자」의 '십과편'에는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함으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예화가 있다.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이 진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 근처에서 한밤중에 절
묘한 음악을 듣게 되었다. 영공은 동행하던 악사장인 사연에게 그 악보를 익
히게 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평공이 베푼 환영의 술자리에서 사연을
시켜 복수에서 들은 그 이름 모를 곡을 타게 했다.
음악이 연주되던 도중 진나라 악사장인 사광이 사연의 연주하는 손을 누
르며,
"이것은 망국지음이오. 끝까지 타서는 안되오."
하고 중지시켰다.
진평공이 그 까닭을 묻자 사광이 답하였다.
"옛날 은나라의 사연이라는 유명한 악사장이 왕을 위해 음탕한 곡을 지어
바쳤는데, 왕은 그 음악에 너무 깊이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다가 주무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왕과 나라를 잃은 사연이 악기를 안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지금은 혼령이 떠돌아다니며 이 곡을 들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
래서 사람들은 이 곡을 망국지음이라고 하여 귀를 막고 다닌답니다."
평공은 사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연주케 했다.
그런데 연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폭풍우가 일더니 술자리를 휩쓸어 버렸
고, 긴급피난을 하던 영공은 병을 얻어 오래 앓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맥수지탄(麥秀之嘆)◈
129
(보리만 무성한 궁궐 터, 조국의 멸망을 탄식하다)

보리는 패어 점점 자라고
벼와 기장도 무성하네
저 사나운 아이 주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사기」의 '채미자세가'에 나오는 시이다.
중국 역사에서 인간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현한 것이 요순의 정치라면,
나라를 망치는 정치의 상징은 걸왕, 은주왕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은나라 주왕에게는 미자, 기자, 비간 등 세 명의 어진 신하가 있었다.
그러나 주왕은 그들의 간절한 충언을 듣지 않았다.
미자는 주왕의 이복형으로 아무리 간해도 주왕이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
을 하였다.
기자는 그의 간곡한 충언을 들어주지 않자 목숨이나 부지하여 나라를 구
할까 하는 생각으로, 거짓으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숨어 살았고, 비간은
능지처함을 당하였다.
충신의 간함을 듣지 않던 은나라는, 주나라가 세워지면서 결국 역사의 뒤
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공자는「논어」에서,
"미자는 떠나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라며 이 때를 회고하기도 하였다.
훗날 기자가 주나라로 향하면서 옛 은나라의 도읍을 지나게 되었다. 번화
하던 그 옛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황폐해진 궁궐 자리에 보리와 잡초만
이 무성한 것을 보자, 지난날의 감회에 젖어 맥수의 노래를 읊으면서 조국의
멸망을 탄식하였다.
우리는 역사에서 맥수지탄을 여러 번 읊을 뻔한 민족이다. 특히 동족상잔
인 한국전쟁은 45년이 흐른 오늘에도 나이든 사람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제
는 우리만 통일을 못하고 대치상태에 있다. 맥수지탄을 부르지 않도록 온 국
민이 경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명경지수(明鏡止水)◈
130
(사념이 없는 아주 깨끗한 마음)

거울이 밝으면 티끌과 먼지가 앉지 않으며, 티끌과 먼지가 앉으면 밝지 못
한다. 오래도록 현자와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다.

「장자」의 '덕추부편'과 '응제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신도가는 형벌로 발이 잘렸으나 정자산과 더불어 함께 백혼무인을 스승으
로 삼는 사람이다.
자산이 신도가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머물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머물겠네."
그 다음날 또다시 만나게 되어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자산이 신도
가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머물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머물겠네.
이제 내가 나가고자 하는데 자네가 남아주겠나, 남아주지 않겠나? 또한 자네
는 집정인 나를 보고 피하지 않으니, 자네는 집정인 나와 같은가?"
그러자 신도가가 말하였다.
"선생님 문하에 자네 같은 집정이 있음이 언제부터인가? 자네는 자네의
집정을 기뻐하여 사람을 뒤로 하는 자일세.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
는가?"
하고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또 '응제왕편'에는,
"지인(知人)의 마음가짐은 저 환하게 밝은 거울에나 비유할 수 있을 것이
다. 명경은 사물의 오고감에 내맡긴 채 자신의 뜻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인
이 오면 미인을 비추고, 추한 자가 오면 추한 자를 비추어 어떤 것이라도 응
접을 하나 그 자취를 남기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얼마든지 물건을
비추면서도 본래의 맑음을 상하게 하는 법이 없다. 그와 같이 지인의 마음가
짐도 사물에 대해 차별이 없고 집착도 없으므로 자유자재일 수가 있다."
고 했다.
'명경지수'란 말은 그 후 송대의 유가나 선가에서 즐겨 사용되면서 명경이
나 지수가 지닌 허무의 의미가 없어지고, 오직 '고요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사
용되게 되었다.
◈명모호치(明眸皓齒)◈
131
(밝은 눈동자와 흰 이, 미인을 일컫는다)

"밝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피로 더러워진 떠도는 혼은 돌아가지를 못하네
맑은 위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은 깊은데
촉나라로 끌려가 사니 피차간 소식이 없네."

두보의 시 '애강두'에 나오는 구절이다.
당나라 현종 말년,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은 탓에
국정은 혼란해지고, 양귀비의 종형인 재상 양국충의 방탕한 생활과 불법이 자
행되고 있었다.
당시 자신의 야욕을 펴고자 했던 안록산이 현종의 총애를 빌미로 군대의
증강과 사유화를 도모하여, 755년 20만 대군으로 반란을 일으켜, 756년 정월
낙양을 함락하고 대연황제가 되었으나 9년만에 평정되었다.
두보는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는 해에 벼슬길에 올라, 현종이 천자로 있
다는 영무로 가다가 안록산 반군에게 체포되어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체포되기는 했지만 두보는 하급관리였기 때문에 비교적 몸이 자유로웠다.
어느 날 현종과 양귀비도 와서 즐길 만큼 당시의 왕후나 귀족들의 유람명
승지였던 곡강지를 둘러보던 두보는, 옛날의 영화에 대한 그리움에 이 강두
(곡강지가 있는 지명)를 슬퍼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위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명모호치'는 양귀비의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양귀비는 피탄길에 군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혀 죽고 말았다.
◈명철보신(明哲保身)◈
132
(이치에 밝고 사리에 분별력이 있어 적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잘 보전하다)

"지엄하신 어명을 받들어 증산보가 그대로 행하도다.
나라의 선과 악 중산보가 밝히는 도다.
밝고 어질게 처신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아침 저녁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여 오로지 임금 한 분을 섬기었도다.

「서경」의 '설명편', 「시경」의 '대아증민편'에 나오는 시이다.
은나라 무정이 부왕인 소을에 이어 은의 국왕으로 즉위, 망부의 3년상을
치르고도 정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 채 조용히 신하들을 지켜보고만 있었
다. 후에 열이라는 현자를 발탁하여 보좌로 삼고 선정을 펴서 만백성에게 존
경을 받았다.
이 무정에 대해 군신이 일제히 올린 말이 '설명편'에 있다.
"천하의 사리에 통하고 무리에 앞서가는 것을 명철이라고 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진정 정치 도덕의 법을 정하는 분입니다."
이처럼 명철이란, '천하의 사리에 통하고 무리들에 앞서 아는 사람'을 말하
고 보신이란, '사리에 따라 나옴과 물러남을 어긋나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해
석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명철보신을 '난세에 요령있게 처세하는 사람'을 뜻
하는 말로 쓰인다.
◈모순(矛盾)◈
133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

초나라 사람에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방패를 칭찬할 때는 '나의 방패의 견고함은 능히 꿰뚫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또 창을 칭찬할 때는 '나의 창의 날카로움은 물건을 꿰뚫지 않음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의 창으로써 자네의 방패를 꿰뚫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응답하지 못하였다.

「한비자」의 '난일편'에 보면,
"역산의 농부들이 밭이랑을 침범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순임금이 가서 밭
을 갈자, 1년 만에 밭 사이의 두렁과 밭이랑이 올바르게 다스려졌다. 황하(黃
河)가에 어부들이 어장을 다투고 있었는데, 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자, 1년
만에 연장자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동방의 이민족 도공들이 만드는 그릇은
늘 일그러졌는데, 순임금이 가서 질그릇을 만들자, 1년 만에 품질이 견고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공자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밭 가는 일도, 낚시질하는 일도, 질그릇을 만드는 일도 순임금이 하실 일
이 아니다. 그런데도 순임금이 가시어 하신 것은 피폐한 풍습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 순임금이야말로 진실로 어진 분이었다. 그리하여 몸소 친히
가시어 고생하셨으므로 백성들이 거기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덕
으로 교화하는 것'이라고 일러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유자(儒者)에게 물었다.
"그 당시 요임금은 무엇이었습니까?"
"요임금은 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자께서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신 것은 어떤 뜻일까요? 성인
이 밝은 지혜로써 통찰하면서, 천자의 지위에 있는 것은 천하에서 간사함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농부들이나 어부들이 다투지 않고, 질그릇을 일
그러지게 만들지 않았다면 순임금은 무슨 덕을 베풀어 교화할 여지가 있었을
까요? 순임금이 피폐한 풍속을 바로 잡았다는 것은 요임금에게 실정이 있었
다는 것입니다. 순임금을 현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밝게 살핌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
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니, 이것을 양립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창과 방패의 예를 인용하였다.
"무엇으로도 꿰뚫을 수 없는 방패와, 무엇이나 꿰뚫을 수 있는 창은 때를
같이하여 양립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요임금과 순임금이 함께 칭찬을 받는
것은 창과 방패의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목탁(木鐸)◈
134
(하늘이 공자를 문교의 목탁으로 삼는다)

의(儀)의 봉인(封人)이 뵙기를 청하여 말했다.
"군자가 이곳에 오시면, 내 일찍이 뵙지 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공자를 뵙게 하였더니 그는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 어찌 잃은 것을 근심하십니까? 세상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늘이 여러분의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논어」의 '팔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위나라의 국경 근처의 의(儀)라는 마
을에 도착하자 봉인이 공자에게 면회를 하여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목탁이란 나무로 만든 방울로, 쇠로 만든 것보다 소리가 부드럽다. 무사
에 관한 명령을 내릴 때는 쇠방울을 울렸고, 문교에 관한 명령을 내릴 때는
목탁을 울렸다. 그러므로 의봉인의 말은, '하늘이 장차 공자로 하여금 문교의
목탁으로 삼을 것'이라는 뜻이다.
봉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자의 문교, 도덕의 진흥에
대한 정열에 감복하여 목탁으로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산지몽(巫山之夢)◈
135
(무산에서 꾼 꿈, 남녀의 밀회나 정사)

"저는 무산 남쪽의 험준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구름이 되어 산에 걸쳐 있고, 저녁때는 비가 되어 양대 아래에서 아침 저녁으로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국시대 초양왕이 송옹(초나라 대부, 굴원의 제자)과 함께 운몽의 고당관
에 갔었다. 산 위에 구름이 걸쳐 있는데 그 구름이 다른 때와 달리 여러 형
태로 변하는 것이었다. 양왕이 구름의 변형에 대하여 송옥에게 묻자, 송옥은
그 구름을 조운이라 지칭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옛날 선왕이 희왕이 고당에서 잔치를 베푼 후 잠시 잠이 들었다. 이때 요
염하게 꾸민 한 여인이 나타나 왕에게,
"저는 무산에 사는 여자인데 고당에 와보니 임금님이 계시기에 함께 있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리하여 왕은 그 여인과 함께 밤을 지내게 되었고, 여인은 떠나면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꿈에서 깨어난 희왕이 다음날 아침 일찍이 무산 쪽을 바라보니 과연 꿈
속의 여인이 말한 대로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희왕은 그 여인을 그리면서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조운묘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양대'는 무산의 남쪽에 있으므로 해가 잘 비치는 대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성교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남녀가 남몰래
사랑을 나누는 것을 '양대'라고 하게 되었으며, 한 번 정을 나누고 다시는 만
나지 못하는 것을 '양대불귀지운(陽臺不歸之雲)', 남녀가 성교하는 것을 '무산
지몽(巫山之夢)'이라고 하게 되었다.
◈무양(無恙)◈
136
(모든 일이 평안, 무사하다)

해도 무양한가, 백성들도 무양한가, 왕도 무양한가.

제나라 왕이 조나라 위태후에게 사신을 보내 문안 인사를 전하도록 했다.
사신을 맞이한 위태후는 왕의 서신을 펴보기도 전에 제나라 사신에게 윗
글의 내용과 같이 안부를 물었다.
해가 무양함은 농사에 알맞게 기후가 순조로움을 뜻하는데, 그 의미를 못
깨달은 사신이 물었다.
"나라에는 왕이 첫째이므로 왕의 안부를 먼저 묻고 그 다음 백성의 안부
를 묻는 것이 순서 아닙니까?"
그러자 위태후는 사신에게,
"풍년이 들어야 백성이 평안하고, 백성이 평안해야 왕이 정치를 해나갈 수
있으므로 그 근본부터 묻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고 타일렀다.
현재는 '무양'대신 '무고'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주변에서 '별래 무양하시오?'는 흔한 인사말이었다.
어떤 학자는 위태후의 인사가 있은 후 국가간의 외교인사에 해, 백성, 임
금의 삼무양을 인사로 주고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용지용(無用之用)◈
137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것이 때로는 무엇보다도 더 유용하게 쓰인다)

산의 나무는 스스로를 해치고, 등불은 스스로를 불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그 칠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진다. 사람들은 다 쓸모 있음을 알되, 쓸모 없음의 씀을 알지 못한다.

「장자」의 '인간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다음은 '외물편'에 전해지는 장자와 친구 혜자의 대화 내용이다.
혜자가 장자에게,
"자네의 의론은 무용하기 짝이 없네."
라며 비판하자 장자가 말하였다.
"아니 무용하기 때문에 쓸모도 있다네. 인간이 서기 위해서는 발을 딛고
설 여지만 있으면 그만이지만 그 자리만 남기고 둘레의 땅을 지하세계 밑까
지 모두 파버렸다고 생각해 보게. 그래도 발 밑의 땅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
가?"
"그야 도움이 안되지."
"그렇다면 쓸모 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 또한 알 수 있지 않은
가?"
또 '산목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다.
장자가 제자와 길을 가다가 매우 구불구불하게 크게 자란 나무를 보고는
제자에게,
'이 나무는 쓸모가 없는 덕택으로 자기 천수를 다할 수가 있었군."
하고 말했다.
그날 밤 친척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는 기러기를 두 마리 기르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는 잘 울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잘 울지 않았는데,
잘 울지 않는 것이 쓸모가 없다면서 잡아 대접해 주었다.
이것을 본 제자가,
"나무는 쓸모가 없어 천수를 다하고 기러기는 쓸모가 없어 일찍 죽었습니
다. 선생님은 무용(無用)과 용(用) 어느 편을 취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장자는,
"나는 중간이다. 진정으로 도(道)에서만 놀아 아무런 누(累)도 남기지 않
겠다."
고 하였다.
진정한 '유용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려를 결여한 채 빠져든 '유용'에 대
한 집착이 환경파괴 등 많은 부조리를 낳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연과
온전히 합일할 수 있는 방안을 한 번쯤 모색해 보는 것이 어떨까?
◈무위이화(無爲而化)◈
138
(뚜렷한 행위 없이 감화에 의해서 이룩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르기를,
"내가 함이 없으면 백성들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 스스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일이 없으면 백성들 스스로 부자가 되고, 욕심이 없으면 백성들 스스로 순박해진다."

「노자」의 '59장',「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는, '올바름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기계(奇計)로서 군대를 쓰고, 일없
음으로써 천하를 취한다. 내 무엇으로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것으로 안다.
천하에 꺼리는 일이 많으면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그릇이
많으면 나라는 혼란해지고, 사람들에게 잔재주가 많으면 기이한 물건이 생겨
나고, 법령이 엄하여지면 도둑이 많아진다'고 말하고는, 윗 글과 같이 부연한
다.
'스스로 교화된다'는 말은 무위자연에 따라 사는 것, 인위적인 잔꾀를 부리
지 않고 자연의 소박함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하지만, '위정자가 덕을 지니
고 있으면 행함이 없어도 백성들은 그 덕에 교화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
람도 많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139
(먹고 살 만한 살림이 없으면 떳떳한 마음이 없어진다)

"일정한 살림이 없어도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떳떳한 살림이 없으면, 따라서 떳떳한 마음이 없게 됩니다. 참으로 떳떳한 마음이 없어지게 되면, 방탕, 괴벽, 부정, 탈선 등 모든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게 된 뒤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의 '양혜왕상'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묵자와 함께 백성의 생활을 늘 걱정하던 성현 중의 한 사람이다.
어느 날 제선왕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맹자는 위와 같이 답하면서,
"어떻게 어진 임금이 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 할 수 있습니까?"
라며 반문한다.
즉, 임금은 백성이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안 된다면 임금으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임금의 자리란 하늘이 조금 높은 지위를 준 것으로, 자리를 천작(天作)으로
만드느냐 인작(人作)으로 만드느냐는, 하늘이라 할 백성에게 어떠한 삶과 얼마
만큼의 평안을 제공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유항
산(有恒産)해서 유항심(有恒心)하게 하면 왕도의 길은 자연히 열린다는 것이
맹자가 주장하는 바이다.
◈묵수(墨守)◈
140
(의견, 주장, 소신 등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지키다)

묵자는, 초나라의 공격을 저지시켜 송나라를 구했으나, 송나라 사람은 묵자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스림이 신묘하면 사람들은 그 공을 모르고 싸움에 밝은 자는 사람들이 알아준다.

「묵자」의 '공수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수반은 송나라 사람으로 기계제조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송
에서 푸대접을 받자 초나라로 가서, 송을 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즉, 그의
재주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기 위한 전차와 구름사다리를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묵자는 초나라로 가서 공수반을 만났다.
공수반이,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묵자는,
"북방에 나를 경멸하는 자가 있어 그를 죽이는 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
니다."
라고 했다.
공수반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묵자는 일어나 두 번 절을 하고 물었다.
"나는 선생이 새 기계를 만들어 송나라를 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당신
을 다소 푸대접했다는 이유로 송나라를 치는 것은 착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반대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앞뒤가 맞
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대답이 궁해진 공수반은 왕의 핑계를 댔다.
묵자는 초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고, 초왕을 만난 묵자는 '부강한 나라
가 가난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비단 옷을 입는 자가 이웃집의 헌 옷을 훔
치는 행위와 같다'면서 초왕을 설득했다.
대답이 궁해진 초왕이 '공수반의 재주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둘
러대자, 즉시 초왕 앞에서 아주 묘한 승부가 벌어졌다.
묵자는 띠를 풀고 성처럼 버티고서 작은 나무 조각을 방패 대신 기계로
만들었고, 공수반은 아홉 번에 걸쳐 임기응변의 장치를 만들어 공격했으나 묵
자는 아홉 번을 다 굳게 지켰다.
묵자는 초왕에게 고했다.
"공수반은 나를 죽이려 했고, 나를 죽이면 송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
을는지 모르나, 내 제자들은 내가 수비했던 기계를 가지고 송으로 가서 초의
침입을 기다릴 것입니다. 나를 죽여도 송을 항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초나라는 송나라를 치려던 계획을 그만두었다.
묵자는 이처럼 비공설(非攻設)을 가지고 각지로 설득과 유세로 뛰어다녀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지지 못하고 묵자의 굴뚝은 검어지지 않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문경지교(刎頸之交)◈
141
(목을 벨 정도의 위험에도 생사를 같이 할 절친한 교재)

염파가 이 말을 듣고 맨 몸으로 가시를 지고, 빈객들로 인하여 인상여의 문에 이르러 죄를 사하여 말했다.
"비천한 사람이 장군의 관대함이 여기에 이를 줄은 몰랐나이다."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즐거워하여, 목에 칼을 들이대는 사귐을 이루었다.

「사기」의 '인상여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두 왕의 회동에서 큰 공을 세우자, 조의 혜문왕은 신하
무현의 식객에 불과하던 인상여가 명장 염파보다도 높은 상경(上卿)에 임명했
다.
염파는 이에 분개했다.
"원래 신분이 미천한 그의 밑에 있게 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번에 그를 만나게 되면 크게 모욕을 주어야겠다."
상여는 이 말을 듣고 염파를 만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갈 때도 염파와
부딪치는 것을 가능한 피했다.
이러한 행동에 수치심을 느낀 그의 부하가 떠나겠다고 하자 상여는 말했
다.
"강대국 진나라 왕과 그의 군신들 면전에서도 꾸짖은 바 있는데, 하물며
염장군이 두려워서 피하겠는가? 우리가 서로 싸우면 어느 한쪽이 쓰러지게
되고, 그러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된다. 내가 염장군을 피하는 이유는 국
가의 위급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의 원한을 뒤로 하기 때문이네."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윗 글에 있는 대로 맨몸에 가시를 지고가 사죄
를 하니, 두 사람의 우의가 더욱 두터워지고,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게 되
었다.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142
(손님의 발길이 끊겨 새그물도 칠 수 있다)

처음에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자, 손님들이 문에 가득찼다. 면직을 당하자 문 밖에 새그물을 쳐놓을 만큼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졌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다시 손님들이 오려고 했다. 적공이 이에 그 문에 큰 글씨로 써서 말하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고, 한 번 귀하게 되고 한 번 천하게 됨에 사귐의 정을 곧 볼 수 있느니라."

「사기」의 '급정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무제 때의 급암과 정당시는 각각 개성이 강하고 탁월한 인물들이었지만,
영달과 좌천을 거듭하는 험난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사마천은 그들을 칭찬하는 글에서,
"급암과 정당시의 현명함으로도 세력이 있으면 손님은 10배로 늘어나고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
러할 것이다."
라고 한탄한 다음 위와 같이 적공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문전성시(門前成市)'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당(唐)의 백낙천의 시에, '손님들은 이미 흩어지
고 문 앞에 새그물을 친다 (賓客亦已散門前雀羅張)'는 내용으로 등장하기도 한
다.
◈문일지십(聞一知十)◈
143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사(賜一子夏)가 어찌 감히 회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논어」의 '공야장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제자 3천 명 가운데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었으
며, 철인(哲人)으로 꼽힌 사람도 10명이나 되었다.
제자 중에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주유천하
하는 자금의 대부분을 대었고, 안회는 매우 가난했으나, 3개월 동안 어질었다
고 인(仁)을 허여 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그래서 공자는 스스로 재주를 자부하고 있는 자공의 안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이에 자공은 서슴치 않고 윗글과 같이 자신은 지이(知二)요 안회는 지(知
十)이라고 대답했고, 공자는 이 대답에 크게 만족해했다.
문일지십은 한 부분만 들으면 전체를 안다는 것이고, 문일지이는 반쯤 들
어야 결론을 얻게 되는 자질임을 뜻한다.
◈문전성시(門前成市)◈
144
(세도가 있어 찾아오는 사람이 붐빈다)

그대의 집 문에는 저자의 사람들과 같다. 무엇으로써 주상을 금하여 끊으려 하는가? 정승이 대답해서 말했다.
"신의 집 문앞이 저자와 같을지라도, 신의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 원컨대 생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나이다."

「후한서」의 '손보전', '정숭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後漢)의 애제(哀帝)는 20세에 천자가 되었으나 실권은 외척들에게 빼
앗긴 채 황제라는 빈 자리만 지키다 7년 만에 죽고 말았다.
애제를 받들고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애쓴 신하가 정숭이었다. 상서복야
(현재의 국무차관)로서 외척들의 전횡을 두고 볼 수 없어 자주 애제에게 대책
을 건의했으나, 하루 따뜻하고 열흘이 추우면 싹이 자랄 수 없다는 맹자의 말
처럼, 결국 차츰 정숭을 멀리했다.
애제와 정숭의 벌어진 사이를 보고 그를 미워하는 상서랑 조창이 애제에
게 정숭을 모함했다.
"정숭이 왕실의 여러 사람과 빈번하게 내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음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취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애제는 조창의 말만 믿고 정숭을 불러 윗 글과 같이 문책하고는 감옥에
가두었다.
사간(司諫)인 손보(孫寶)가 조창의 중상을 공격하고 정숭을 변호했으나, 황
제는 손보마저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정숭은 옥에서 죽게 했는데, '문전성시'란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미망인(未亡人)◈
145
(남편이 죽고 홀몸이 된 여자)

"돌아가신 왕께서는 이 무악을 군대를 훈련하시는 데 사용하셨다. 지금 영윤은 이것을 원수를 치는 데 사용하지 않고서, 이 미망인의 곁에서 하고 있다. 또한 이상하지 아니한가?"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나라 재상인 자원이 문부인(초문왕의 부인)을 유혹하기 위해 궁궐 곁에
저택을 짓고 그 곳에서 만의춤(은나라 탕왕이 시작했다는 춤)을 추게 하자, 문
부인은 그 음악소리를 듣고 울면서 윗 글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 위정공은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서실인 경사 부인의 아들 간(刊)
을 태자로 삼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나 간이 아버지 죽음에 대해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자 정공의 정실
강씨는 상만 치르고 음식을 전폐하며 탄식하였다.
"저놈이 필시 나라를 망치고 미망인인 나를 학대할 것이다. 아, 하늘이
위나라를 저버리는 것일까! 전야(강부인의 아들)가 어려 제위에 오르지 못하
다니!"
이 말을 들은 간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는 강씨를 친 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한다.
미망인이란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것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란 뜻으로 과부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었지, 지금처럼 다른 사람을 일컫는
말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좌전(左傳)」에도 몇 군데 쓰여진 곳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자기를 낮추
는 데 쓰여졌다.
◈미봉(彌縫)◈
146
(임시변통으로 순간을 모면하다)

그래서 만백이 우익군이 되고, 채중족이 좌익군이 되고, 원번과 고거미가 중군을 이끌어 장공을 모시고, 어리지진(물고기가 늘어서는 것처럼 수레와 사람들이 늘어서는 진)을 짰다. 즉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보병이 여기에 뒤따르고, 보병으로 전차의 틈을 연결시키는 전법이었다.

「춘추좌씨전」의 '주환왕전(周桓王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초기 주의 환왕은 쇠약해진 주의 세력을 복구하기 위한 방편을
모색하던 중, 당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정(鄭)의 장공(莊公)을 토벌하여
세력을 만회하기로 하였다.
환왕은 우선 장공에게 종래 왕조의 경사(卿士)로서 맡기고 있던 정치상의
실권을 박탈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정장공은 왕실에 대한 조공을 일체 중지해 버렸
다.
환왕은 이를 구실로 삼아 괵, 채, 위, 진 등 네 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
라로 진격했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정장공은,
"진나라는 극심한 내란으로 전투에 미진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나라를 치
면 반드시 격파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연합군도 혼란이 올 것이다. 그 다음
왕이 지휘하는 군대를 집중 공격하면 승리는 우리 것이다."
라고 말하고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뒤따르는 보병으로 하여금 전차의 틈을 연
결시키는 '오승미봉(伍承彌縫)전법'을 사용하여 토벌군을 무너뜨렸다.
군사들이 도망가는 연합군을 계속 추격하려고 하자 장공은 이를 제지시키
면서,
"군자란 약자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를 업신여길 수
야 있겠느냐. 나라의 안전만 보전하면 그 뿐이다."
하고 말했다.
이 싸움으로 장공은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고, 뒤에 제환공에 의해 실
현된 패자( 者)의 길을 열게 되었다.
◈미생지신(尾生之信)◈
147
(미련하고 우직하게 지키는 약속)

미생(尾生)은 믿음으로써 여자와 더불어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밀려와도 떠나지 않아 기둥을 끌어안고서 죽었다.

「장자」의 '도척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노나라에 미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과의 약속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개울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밀물로 인해 개울물이 점점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릎, 다음엔, 배, 그 다음엔 목까지 물이 차 올라왔으나 미생은
약속을 지킨다는 생각만으로 떠나지 않고 있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
다.
장자는 이러한 미생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들은 물에 떠내려 가는 돼지, 깡통을 손에 든 비렁뱅이와 같이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로,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패거리이다.'
◈반근착절(盤根錯節)◈
148
(구부러진 뿌리, 뒤틀린 마디, 세력이 뿌리가 깊어 제거하기 어렵다)

뜻은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일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사람의 직분이다. 구부러진 뿌리와 뒤틀린 마디를 만나지 않는다면, 어찌 날카로운 칼날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후한서」의 '우후전(虞珝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등줄은 후한의 안제(安帝)의 외삼촌으로, 안제의 어머니 등태후의 섭정으로
대장군에 오르게 된 인물이다.
그 무렵 서북 변경의 이민족이 병주, 양주를 침입해 왔다.
등줄은 국비 부족을 이유로 양주는 포기하고 병주만 방어하자고 했다.
그러자 수재로서 낭중의 직책에 있던 우후가 여기에 반대를 했다.
"함곡관의 서쪽에서는 장군이 나오고 동쪽에서는 재상이 나온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열사무인(烈士武人)으로 관서의 양주 출신이 많지 않습니까? 이러
한 땅을 이민족에게 맡긴다는 것은 결코 안될 말씀입니다."
좌중 인사들은 다 우후의 의견에 찬성했다.
등줄은 이 사건으로 우후를 미워하게 되었는데, 조가현(朝歌縣)에서 폭도들
이 군장을 죽이고 고을을 장악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나자, 우후를 조
가현의 장(長)으로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우후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조문(弔問)을 했다고 한다. 자
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후는 위와 같이 당당한 기세로, 조가현에 부임하여 지혜와 용맹
으로 마침내 폭도들을 평정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외척이나 환관들을 비롯
하여 국가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다. 반
근(槃根)은 반근(盤根)으로도 쓴다. 즐
◈반식재상(伴食宰相)◈
149
(재능이 없으면서 유능한 사람 재상 옆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사람)

심복의 시종인 제한(齊澣)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떤가? 나는 재상으로서 합격인가?"
"정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재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이후로 노회신은 자기의 재능이 요숭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어떤 일이나 요숭을 앞세우고 자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노회신을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고 말하였다.

「당서」의 '노회신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노회신은 당현종 밑에서 1년간 요숭과 함께 재상 일을 본 적이 있는 사람
이다.
노회신은 원래 조심성이 많고, 청렴결백하며 검약을 좋아하여 재상직에 있
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녹봉을 역시 어려운 이웃들에
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가 요숭과 함께 재상직에 있었을 때, 요숭이 10여일 동안 휴가를 취한
일이 있었다. 그 동안 노회신 혼자서 정사를 보았는데, 하기 어려운 현안문
제가 산처럼 쌓였다.
그런데 요숭이 나오자 쌓였던 현안문제가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것을 보고,
정사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재능이 요숭에게 미치지 못함을 깨달은
노회신은 이후로 모든 일에 요숭을 앞세우게 되었고, 결국 반식재상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노회신은 전혀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도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감찰어사 한사언이,
"이 아이는 기량(器量)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며 감탄했다는「노회신전」의 기록이 그것이다.
◈발본색원(拔本塞源)◈
150
(근본적으로 어떤 폐단을 해결하다)

나에게 큰아버지가 계신 것은, 마치 의복에 갓과 면류관이 있고,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고, 백성들에게 지혜로는 임금이 있는 것과 같다.
큰 아버지께서 만일 갓을 찢고, 면류관을 부수고, 근본을 뽑아 근원을 털어막고, 오로지 지혜로운 임금을 버리신다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 남음이 어찌 한 사람에 있으리오.

윗 글은「춘추좌씨전」소공 9년에 나오는 주나라 왕의 말로 여기에서 '발
본색원'이란 말이 나온다.
명나라 철학자 왕양명의 발본색원(拔本塞源論)도 있는데,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가 평소에,
"하늘의 이치를 지니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
고 제창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주장한 발본색원론 역시 사사로운 탐욕은 근
본부터 뽑아버리고 그 근원을 틀어막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사가 지금은 주로 범죄나 범죄조직을 뿌리 뽑고 근원을 막는데
사용되고 있다.
◈발호(跋扈)◈
151
(제멋대로 날뛰다, 세력이 강해 제어하기 어렵다)

절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양기의 횡포와 교만한 행동이 눈에 거슬려, 어느 때 신하들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절제는 양기에게 눈을 멈추고서,
"이분은 발호장군(跋扈將軍)이로군."
하고 말했다.
양기는 질제를 미워하여 독살하였는데, 그 때 질제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후한서」의 '양기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의 외척들과 환관들의 횡포가 몹시 심하였다.
그 외척 중에 가장 폐해를 끼친 사람은 10대 순제황후의 오빠인 양기로서,
3대 20년에 걸쳐 정권을 잡는 동안 한 문중에서 7봉후, 3황후, 6귀인, 2대장군
을 세우는 등 권력을 독점하여 벼슬아치 가운데 감히 그의 명을 거스르는 자
가 없었다.
양기는 순제가 죽자 두 살짜리 조카 충제를 즉위시켰으며, 그가 세 살에
죽자 여덟 살 짜리 질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영기는 자신에게 '발호장군'이라 했다는 이유로 독살시키고 말았다.
과연 발호장군다운 횡포였다.
발호장군이란 말 속에는 신하가 권위를 마음대로 휘둘러 윗사람을 침범한
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며, 배 속에서 거센 폭풍을 만난 수양제가,
"이 바람은 발호장군이라고 이를 만하다."
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여 '폭풍'을 뜻하기도 한다.
◈방약무인(傍若無人)◈
152
(남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거리낌없이 함부로 행동함)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찬데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기」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시이다.
위나라에 무예와 문학에 능한 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나라를 돌
아다니며 많은 현인, 호걸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의 친구 중에 연나라
축(대나무로 만든 악기)의 명수 고점리가 있었는데, 둘이 만나면 고점리는 축
을 연주하고 형가는 노래를 부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이,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듯 거리낌이 없었다.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진나라가 요구한 번어기의 머리와 연나라
의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이 때 연나라 태자 단과 빈객들이 상복을 입
고 전송하였는데, 형가는 고점리가 연주하는 축소리에 맞추어 위와 같이 화답
했다.
진나라로 들어간 형가는, 진왕을 배알하는 틈을 이용해 지도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휘둘렀는데, 진왕의 예복만을 뚫었을 뿐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형가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내가 실패한 원인은 진왕을 살려둔 채 연나라의 땅을 반환받고, 그것을
태자인 단에게 보고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는 탄식의 말을 끝으로 진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형가의 거리낌 없는 당당한 태도를 가리키던 '방약무인'이 지금은 주로 무
례하거나 교만한 태도를 표현할 때 쓰이고 있다.
◈배반랑자(杯盤狼藉)◈
153
(술잔과 그릇들이 질서 없이 널려있다, 난잡한 술자리)

"해가 넘어가고 술도 거의 떨어지게 되면, 술통을 모으고 자리를 함께 하여, 신발은 뒤섞이고 그릇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당 위의 촛불을 끄고, 주인이 자기만을 마물게 하고 손님을 보내어, 비단적삼 옷깃이 풀어지고 희미하게 향 냄새가 풍겨옵니다. 이런 때를 당하면 저는 마음이 가장 기뻐져 능히 한 섬을 마십니다. 그러므로 '술이 지극하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사는 다 그와 같습니다."

제나라 위왕이 초나라의 공격을 받자, 손우곤을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보
내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했다.
손우곤이 일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오자, 왕은 후궁에서 그를 위한 축하
연을 베풀고는 그에게 술을 얼마나 마시면 취하는가를 물었다.
"한 말로는 취하고 한 섬으로도 취합니다."
라는 순우곤의 대답에 위왕이 물었다.
"한 말로는 취하는 사람이 한 섬을 마실 수가 없지 않겠소?"
그러자 순우곤은 술이란 마시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면서,
"대왕과 같이 술을 마시게 되면 황송하여 한 말을 마셔도 취하지만, 친구
들과 마실 때는 친구의 다정도와 친분에 따라 두 말에도, 서 말에도, 대여섯
말에도 취합니다."
하고 말하고는, 이어서 윗 글과 같이 배반낭자의 예로써 왕에게 은근히 간하
였따.
이로부터 제왕은 철야의 주연을 그만두고 곤을 제후의 주객으로 삼아 연
석에는 반드시 곁에 앉도록 하였다.
◈배수지진(背水之陣)◈
154
(어떤 일을 할 때의 비장한 각오)

이리하여 한신은 1만의 군대로 하여금 먼저 가게하고, 정경의 입구에서 나와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다. 조나라 군대는 이것을 바라보고 병법을 모르는 자라고 크게 웃었다.

「사기」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한고조가 제위에 오르기 2년 전(B.C.240)의 일이다.
한나라 군대의 일부를 이끌고 있던 한신은 위(魏)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조(趙)로 진격했다. 한신은 작전에 따라 부하 장수들에게 일만의 군대는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였고, 주력부대는 성문 가까이 공격해 들어가게 했다.
적이 성에서 나와 한군을 공격해 오자, 한군은 거짓으로 밀리는 척하면서
배수진까지 퇴각을 했다. 조나라 군대가 밀리는 한나라 군대를 끝까지 추격
해 오는 사이, 한신은 매복병으로 하여금 조나라 성에 잠입해 한나라 깃발을
세우게 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밀리기만 하던 한나라 군대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결사항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퇴각을 하게 된
조나라 군은 성 근처까지 밀리게 되었고, 성이 점령된 것을 알고는 혼란에 빠
졌다.
바로 이 때 한신의 부대가 맹공격을 퍼부어 간단히 승리를 거두었다. 한
신은 군대를 사지에 몰아넣음으로써 싸움에 지쳐 싸울 의욕이 없던 군대를
결사항전 하게 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축연이 벌어졌을 때 부장들이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 의하면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고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
데 물을 등지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도 병법의 하나로 제군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오. 병서에 자
신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음으로써 살 길을 찾을 수가 있다고 적혀 있지 않소.
그것을 잠시 응용한 것이 이번의 배수진(背水陣)이오. 계속되는 원정에 지쳐
버린 우리 군을 생지에 두었다면 그냥 흩어져 달아나 버렸을 것이오. 그래서
사지에다 몰아넣은 것 뿐이오."
모든 장수들이 이 말을 듣고 한신에게 탄복했다고 한다.
◈배중사영(杯中蛇影)◈
155
(쓸데 없는 일을 의심하여 근심을 만들다)

"뱀이 두렵습니다. 뱀이 뱃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조부께서는 돌아오셔서, 두선에게서 들은 말을 잠시 생각하시다가, 벽에 걸려 있는 활을 돌아보시고,
"이것에 틀림이 없다."
하시고, 하급 관리에게 공용(公用)의 표시로 방울을 주시고, 두선을 데려오게 하여 가마에 태워 조용히 실어오게 하셨다. 그리고 자리를 전과같이 베풀고, 술을 따르어 전과 같이 뱀의 그림자를 뜨게 하신 다음 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것은 벽에 걸린 활이 비친 것이다. 달리 괴이하게 생각할 것이 없느니라."
드디어 두선의 고민은 풀리고, 곧 나아 몹시 기뻐하였다.

「후한서」의 '풍속통(風俗通)',「진서」의 '악광전(樂廣前)'에 나오는 이야
기이다.
응소는 영제(靈帝) 초년에 숙현의 현령이 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주로 군
사관계의 관리를 역임하며 황건적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거니와, 한편 고전
(古典)에도 정통하여「한서」의 주를 달기도 했다.
그가 지은「풍속통」은 후한 말기 당시,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나 미신이 정착되어 버릴 것을 근심하여 저
술한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 한 편을 보자.

세상에는 해괴한 것을 보고 놀라 자기가 스스로 병을 만드는 사람이 많다.
나의 조부이신 응빈께서 급현의 현령이 되셨을 때의 일이다. 하지날 주부
(主簿)인 두선이 찾아오자 술을 주셨다. 그 때 방의 북쪽 벽에 붉은 활이 걸
려 있었는데, 술잔에 비치는 모습이 마치 뱀의 형상 같았다.
두선 움찔했지만 상사의 앞이라 내색도 못한 채 억지로 술을 마셨다. 그
런데 그날 가슴과 배가 몹시 아프기 시작하더니, 음식이 목을 넘어가지 않고
계속 설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후 백방으로 치료를 했지만 잘 낫지를 않았
다.
뒤에 조부께서 볼일로 인하여 두선의 집에 들러 이를 보시고 그 변고를
묻자, 그는 위와 같이 말했다.
이렇게 공연히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근심하며 속을 썩히는 것을 두고 후
세 사람들은 배중사영 이라고 했다.
◈백구과극(白駒過隙)◈
156
(인생의 지나감이 빠르다, 세월이 빠르다)

인생의 한 세상 사이는 흰 말이 틈을 지나는 것과 같다.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기가 이와 같음에 이르겠는가?

「사기」의 '유후세가'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태후가 유후에 대하여 한 말
이다.
「장자」의 '지북유편'에도 세월의 흐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
으로 보는 것처럼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은 물이 솟아나듯이 문득 생겨
났다가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 가는 것이다. 변화로써 태어났다가 또
한 변화로써 죽을 뿐이다. 생물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도 이를 슬퍼한다.
죽음이란 화살이 화살통을 빠져나가고, 칼이 칼집을 빠져나감과 같이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 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야말
로 위대한 복귀가 아닌가!"
◈백년하청(百年河淸)◈
157
(아무리 기다려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

주(周)나라의 시에 '황하의 물이 맑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의 수명으로는 맞지 않다. 여러 가지를 놓고 점을 치면 그물에 얽힌 듯 갈피를 못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춘추좌씨전」의 양공 8년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鄭)나라가 초(楚)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도 정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하
게 되었고, 이에 정나라에서는 대책화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는 진(晋)에게
구원병을 청하자는 측과 초와 강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 자사가 위와 같이 주나라 시를 인용하면서, '우선 초나라와 강화를
해서 백성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그 다음 진나라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
고 말했다.
이 말은 진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은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
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은 초와 화평을 맺
고 위기를 면했다고 한다.
백년하청은 원래 '기다린다'는 뜻이었으나 지금은 일어나기 어려운 일, 불
가능한 일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린
다'는 말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백면서생(白面書生)◈
158
(젊고 경험이 없는 선비)

"밭일은 종들에게 물어보고, 베짜는 일은 하녀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적국을 치려고 하시는데 백면서생들에게 물어 일을 도모한다면 어찌 성공하겠습니까?"

「송서(宋書)」'심경지전(沈慶之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문제(文帝)와, 북위의 무제는 각각 18세와 17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
한 이후, 강남의 사진(四鎭) 쟁탈을 둘러싸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화의하면
서 대립을 계속했다.
무제가 대군을 일으켜 유연(柔然)을 공격(449년)한 다음 해 문제는 북위를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귀족들의 찬동을 얻어 군대를 일으키려 했다.
이 때 책을 손에 든 일이 없으며, 글자도 전혀 읽을 줄 모르는 태자에게
딸린 교위(校尉) 심경지(沈慶之)가,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을 꾸짖으며 문제에
게 위에 있는 글과 같이 바른 말을 한 것이다.
무인의 피를 받은 문제, 백면서생이 되어 버린 귀족들과 긍지에 가득 찬
무인의 사기를 대비시킨 말이 재미있어 웃으며 결국 군대를 일으켰다고 한다.
백면서생은 여기서 유래된 '얼굴이 그을리지 않아 흰, 책만 아는 젊은이'라
는 말로, 얼굴에 검게 타고 무기를 든 무인과 대비되는 말이다. 아울러 이론
만 알고 경험이 없는 초년생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159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모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군사 일이란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계획을 짜기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급히 금성으로 달려가 현지 도면을 놓고 방안을 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서(漢書)」의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선제 때 강(羌)이라는 티벳 계통의 유목민이 반란을 일으키자, 선제
는 어사대부 병길을 후장군인 조충국(趙充國)에게 보내 누구를 토벌대장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묻게 했다.
이에 조충국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그는 비록 70이 넘은 나이였지만 한무제 때 흉노와 싸워 많은 공을 세원
장수였고, 아직 원기가 왕성했다.
병길의 보고를 받은 선제는 곧 조충국을 불러들여 물었다.
"장군의 군략과 병력의 규모를 듣고 싶소."
그러자 조충국은 위와 같이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함을 강
조하였다.
선제의 승낙을 받은 조충국은 금성으로 달려가 현지 답사를 통해 정세를
파악한 다음 둔전책(屯田策)을 세웠다. 즉, 보병 약 만명을 각지에 배치시켜
농사일을 해가면서 군무에 종사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곳에 1년을
함께 있으면서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둔전책을 쓴 장수는 여러 명이 있는데, 그 중에도 위나라 조조
는 둔전책으로써 허창에 곡식이 넘치게 만들어, 황제를 허창으로 모시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백미(白眉)◈
160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마량의 자(字)는 계상(季常)으로, 양양의 의성 사람이다. 형제가 다섯 사람이 있는데 모두가 재명(才名)이 있었다. 고향 사람들이 이를 위하여 속담으로 말하기를, '마씨의 오상(五常) 중에서도 백미(白眉)가 가장 좋다'고 했다. 마량은 눈썹 가운데 흰 털이 있으므로 그를 가리킨 것이다.

「삼국지」의 '마량전(馬良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적벽대전을 통해 형주, 양양, 남군을 얻은 유비는 군신을 모아놓고 앞으로
의 계책을 물었다.
이 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하여 준 이적(伊籍)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유비가,
"어진 선비가 누구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적은 백미가 있는 마량의 뛰어남을 칭찬하면서,
"공께서는 어찌 그를 청하여 오지 않으십니까?"
라고 대답했다.
유비는 즉시 그를 청하여 오게 했다.
마량은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 제갈량과 문경지교를 맺을 정도였다.
◈백발백중(百發百中)◈
161
(일이나 계획하고 있던 바가 생각대로 들어맞다)

초나라에 양유기라는 사람은 활을 잘 쏘았다. 그는 백 보가 떨어진 곳에서 버들잎을 쏘아도 백발백중이었기 때문에, 좌우에 있는 관중 수천명이 다 '활을 잘 쏜다'고 하였다. 이 때 한 사나이가 그의 곁에 서서 '잘한다, 활을 가르쳐 줄 만하다'고 하였다.

「사기」의 '주기(周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周)나라 난왕 때 진(秦)나라가 백기(白起)장군을 시켜 한나라를 격파한
뒤, 위의 도읍인 양(梁)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양이 함락되면 주나라도 위협을 받을 것이 뻔하므로 이를 염
려한 소려라는 신하가 난왕에게 백기장군을 설득할 것을 권하며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비꼬는 말에 화가 난 양유기는 활을 버리고 칼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활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그 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활의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이 아니오. 백 보 떨어진 곳에서
버들잎을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할지라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지 않는다
면, 기력이 떨어짐으로써 활이 기울어지고 화살도 비뚤어지게 되어, 한 화살
이 맞지 않으면, 지금까지 백발백중이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오."
주나라 난왕이 소려의 말대로 백기장군을 설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여
기 인용된 양유기는 결국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162
(흰 머리털이 3천 길이나 된다, 근심이 깊다)

흰 머리털이 3천 길, 근심으로 인하여 이같이 길어졌네.
밝은 거울 속을 알지 못해라. 어디에서 가을 서리 얻었는가?

이백의 '추포가(秋浦歌)'에 나오는 이 시는 이백의 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고독함과 늙어 가는 슬픔을 조용히 읊은 것으로, 전체적으로 낙천적인 해학이
엿보인다.
흰 머리털이 어떻게 3천 장이나 자라겠는가. 그러므로 '삼천장(三千丈)'이
란 말은 흰 머리털의 길이라기보다는, 근심이 이어져 끊임이 없음을 형용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머리털은 근심을 영양분으로 빨아먹고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3천
길이나 자랐다고 하는 것은 그 영양분인 근심의 깊이가 무한하다는 말이 되
겠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관운장이 한 말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163
(자기를 알아주는 참다운 벗의 죽음이 슬퍼 거문고 줄을 끊다)

옛날에 호파가 비파를 타면, 물 속에 있던 물고기가 나와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수레 끄는 여섯 필의 말이 고개를 들고서 풀을 뜯어먹었다. 그러므로 소리는 작더라도 들리지 않는 것이 없고, 행동은 숨겨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순자」의 '권학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에게는 그 소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종자기(鐘
子期)라는 벗이 있었다.
백아가 산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태산같이 높아가고 있군."
하고 말했고,
흐르는 물 소리를 표현하고자 하면,
"강물의 흐름이 황하와 같구나."
라고 말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종자기가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그토록 아끼던 거
문고의 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거문고를 다
시는 켜지 않았다고 한다.
'권학편'의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옥이 산에 있으면 풀과 나무가 윤택하고, 연못에 진주가 생기면 언덕이
마르지 않는다. 선을 행하고 악함을 쌓지 않는다면 명성이 들리지 않겠는
가?"
그 후부터 친한 벗이 죽었을 때 '백아절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백안시(白眼視)◈
164
(남을 나쁘게 여기거나 냉대하여 흘려보다)

완적은 평소 품어오던 선비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까만 눈동자와 흰 눈동자로 표시했다. 통속적인 예절을 지키는 선비를 만나면 흰 눈으로 흘려보았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었던 혜강의 동생인 혜희가 오자 흰 눈으로 흘겨보았다. 혜희는 속물 취급을 당하자 섬칫하여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 혜강이 술과 거문고를 들고 찾아갔다. 완적은 크게 기뻐하며 검은 눈동자를 보이면서 환영했다. 완적이 흰 눈으로 흘려보았던 예절에 얽매인 선비들은 마치 원수를 미워하는 것처럼 완적을 미워했다고 한다.

「진서(晋書)」의 '완적전(阮籍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자 뛰어난 학문의 소유자였던 위나라의 완
적(阮籍)은, 위나라가 진나라로 바뀌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속세를 등지고
자연을 벗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하면서 숲 속에서 살았다.
모친상을 당해도 상주로서의 예를 갖추지 않을 만큼 예속에 구애받지 않
았으며, '예속지사'라고 자부하는 이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완적이었던
만큼, 그를 원수같이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백안(白眼)이란 눈의 흰 부분을 일컫는 말로, 완적의 고사 이후 '사람을 싫
어하여 흘겨 보는 것' 또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 '푸대접하는 것', '치
지도외(도외시하여 내버려 둠)하는 것'을 '백안시'라고 이르게 되었다.
◈백주지조(栢舟之操)◈
165
(남편을 일찍 여읜 아내가 절개를 지키다)

두둥실 저 잣나무 배 황하 가운데 떠 있다
더펄머리 드리운 그이만이 진정 내 남편
죽어도 딴 마음 아니 가지리
어머니는 하늘이신데 어이 내 마음 몰라줍니까?

「시경」의 '용풍'에 나오는 시로 위(衛)나라 제후인 공백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내 공강은 굳게 절개를 지키며, 부모의 개가 권유를 끝까지 뿌리쳤
다. 그러면서 백주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지조를 표현했는데, 위의 내용이
그 첫 절이고 2절은 아래와 같다.

두둥실 잣나무 배가 저 황하 물가에 떠 있도다.
늘어진 다발머리 시로 나의 남편이었으니
죽어도 허튼 마음 갖지 않으리이다.
어머님은 하늘이시니 어이 저를 몰라주시나이까?

그 후부터 백주지조(栢舟之操)는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가 절개를 지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백중지세(伯仲之勢)◈
166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비슷하다)

문인(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부의(傅儀)와 반고(班固)에 있어서는 백중지간일 뿐이다.

위나라 문제의 '전론(典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예기(禮記)」의 '단궁' 상편에 보면, '어려서 이름을 짓고, 20세에 관례(冠
禮)를 하고서 자(字)를 붙이고, 50세에 백중(伯仲)으로 하고 죽으면 시호를 내
리는 것은 주나라의 도리'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관습에는 맏이를
백씨(伯氏), 둘째를 중씨(中氏), 끝을 계씨(季氏)라 부른다. 다만, 중씨의 경우
맏형이 아니면 둘째나 셋째, 넷째 등이 다 중씨로 통하고, 맨 끝이 아니라도
손아래 형제를 계씨라고 하는 것이 관습상 인정되고 있다.
백중은 곧 형과 아우라는 뜻인데,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위나라 문제인
조비이다. 그는 '전론(典論)'이란 논문에서 위와 같은 내용으로 글 쓰는 사람
들이 객관적으로는 백중지간임에도 서로 헐뜯고, 서로 낫다고 잘난 척하는 것
을 탄식하였다.
또 두보의 시에도 제갈량이 은나라 이윤, 주나라 여상과 맞먹음을 백중지
간이라는 말로 표현한 곳이 있다. 결국 난형난제(難兄難弟)란 말을 다르게 표
현한 것이 백중지간 또는 백중지세이다.
◈법삼장(法三章)◈
167
(세 조목의 법, 진의 가혹한 법을 대신한 가장 간단명료한 법)

"진의 가혹한 법에 백성들이 너무 시달렸소. 나는 관중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관중의 왕이 될 것이오. 법은 세 가지만 선포하겠소.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둘째, 사람을 중상 입힌 자와 도적은 응분의 벌을 내리겠소. 마지막으로 모든 진나라 법을 폐지하겠소. 여러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게 생활해 주시오."

「사기」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유방과 항우는 초(楚)에서 출발하여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천하
의 왕이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유방이 먼저 관중에 들어갔다.
진왕(秦王) 자영에게 항복을 받고 옥새와 절부(節符)를 거둔 유방은, 진왕
을 죽이자는 여러 의견에도 불구하고, 항복한 자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를 좌천시켰다.
그리고는 야영지로 돌아가 여러 현의 노인들과 호걸들을 모아놓고 위와
같이 세 가지의 법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법삼장'이라는 고사가 나오는데,
유방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그 법대로 따랐다.
뒤에 도착한 항우가 궁궐을 불사르고, 후궁과 부녀자와 보물을 빼앗아간
것과 이 유방의 행동을 비교해 볼 때, 유방이 천하를 차지한 것은 결코 우연
이 아닌 것이다.
유방이 정한 이 세 가지 법을, 법의내용이 너무 간략하다하여 일명 '약법
삼장(約法三章)'이라고도 한다.
◈병입고황(病入膏 )◈
168
(병이 위중하여 고치기 어렵다)

병(病)이 두 사람의 어린이가 되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명의라구? 이거 우리가 다치겠는걸. 어디로 도망칠까?"
그러자 한 어린이가 말했다.
"명치의 위, 심장 아래에 있으면 어떻게도 하지 못한다구."
이윽과 고완이 와서 말했다.
"왕의 병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병환이 명치의 위, 심장 아래에 있으므로 치료할 수가 없으며, 침을 놓아도 닿지 않고 약을 잡수셔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춘추좌씨전」경공 10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진(晋)나라 경공의 꿈에 여자 귀신이 나타나서,
"내 자손을 잘도 죽였으니 이제 널 데려가야겠다."
라는 [경공은 즉위했을 때 도안고(屠岸賈)를 사구(司寇, 법무대신)에 임명했다.
도사구는 뱃속이 검은 사나이로 대부(大夫)인 조가(趙家)에게 죄를 씌워 한 집
안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그 조상의 영혼이 10여 년 뒤에 경공에게 들러붙
었던 것이다〕말과 함께 문을 부수면서 경공에게 달려들었다.
경공이 놀라서 다른 방으로 도망을 치자 귀신도 계속해서 쫓아 왔다. 그
순간 잠이 깨고 말았는데, 꿈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경공은 곰곰이 생각
하다가 무당을 불러 해몽을 시켰다.
무당은,
"금년 햇보리를 드시기 전에 세상을 뜨실 것 같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그 후 경공은 앓아 눕게 되어 명의인 고완(高緩)을 불러오도록 사람을 보
냈다. 그런데 고완이 도착하기 천에 병들이 말하는 꿈을 꾸었고, 고완이 와
서는 그 병들이 한 말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다.
경공은 그의 정확한 진단에 탄복하여 예물을 후하게 주어 돌려보냈다.
얼마 후 햇보리가 나왔다.
경공은 햇보리 밥을 짓게 하고는 무당을 불러다 자신이 햇보리를 먹기 전
에 죽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하여 목을 베었다. 그리고 경공이 수저를 막
드는 순간 배가 아프기 시작하여 화장실에 갔으나, 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다
화장실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위의 이야기로부터 병이 위중하여 치료할 수 없는 것, 나을 수 없는 중병
을 병입고황이라고 한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169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

태공은 동이에 물을 한 동이 길러 오라 해서 그것을 땅에 붓게 한 다음 마씨를 바라보며, 그 물을 다시 동이에 담으려 했으니 진흙만이 손에 잡힐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태공은 말했다.
"그대는 떨어졌다 다시 합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사기」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엎질러진 물', 낚시꾼을 '강태공', '태공망', '강태공
의 곧은 낚시', '전팔십 후팔십', '잘못 버린 남편' 등은 모두 강태공과 관계된
것들이다.
「습유기(拾遺記)」에 보면 강태공의 출세 전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
기가 수록되어 있다.

태공의 첫 아내는 마씨(馬氏)였다.
마씨는 태공이 공부만 하고 살림은 전연 돌보지 않는지라, 남편을 버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뒤 태공이 제나라 임금이 되어 돌아오자 마씨는
다시 만나 살았으면 하고 태공 앞에 나타난다.
그 때 강태공은 일부러 물을 엎지르고는 다시 담을 수 있으면 결합하겠다
고 한다.
여인은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는 울면서 물러난다.
이처럼 '복수불반분'은 한 번 헤어진 부부가 다시 만나 살기는 어렵다는
내용의 일화에서 유래했으나, 현재는 무엇이고 일단 해버린 것은 다시 원상복
구를 한다거나 다시 시작하기 어려움을 뜻한다.
◈부기미(付驥尾)◈
170
(명마의 꼬리에 붙으면 멀리 갈 수 있다)

"백이숙제가 현인이었다고는 하나 공자에게 찬양 받음으로 그 이름이 더욱 오르고, 안연이 참된 사람으로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고는 하나, 공자의 기미(氣味)에 붙었었기 때문에 그 행위가 더욱더 뚜렷해진 것이다."

「사기」의 '백이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부기미'라는 말은 대 인물에게 인정되어 그 가치가 세상에 뚜렷이
나타난다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데,「후한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편지
의 형식으로 전해진다. 그 편지는 전한 시대 말엽 장창이란 사람이 쓴 것으
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리는 열 걸음 거리밖에 못 날지만, 천리마처럼 빠른 말꼬리에 붙으면
천리길도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말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른 것들을 훨씬 멀리 떼어놓을 수 있다."
대인물의 부기미가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맹자는 '이름 날리기를 좋아한다고 이름이 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실력을 쌓아서 큰 인물이 인정해 줄 일 또는 업적을 쌓으려고 노력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마(駙馬)◈
171
(원래는 예비의 말을 뜻했으나 왕의 사위를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

그가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자 왕비는 비탄에 빠져, 그래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여 사람들을 시켜서 무덤을 파헤쳤다.
관의 안은 파묻었을 때 그대로였는데 황금 베게만이 보이지 않았다. 수의를 풀고 몸을 조사해 보니, 정교(情交)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왕비는 비로소 그의 말을 믿고,
"죽은 지 23년이나 되었는데도 산 사람과 정교를 하다니 딸은 틀림없이 신이 된 것이오. 당신이야말로 나의 진짜 사위요."
하고 탄식하면서 그를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임명하고, 금과 비단과 수레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진(晋)나라 때 간보가 지은「수신기(授神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부마
의 유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도도라는 젊은이가 유학을 하던 중 옹주 지역의 큰 저택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하녀인 듯한 소녀가 나와 깍듯이 인사를 하더니 주인의 명이라며
집안으로 안내하였다. 주인의 방으로 안내된 신도도는 매우 후한 대접을 받
았다. 식사가 끝나자 여주인이 들어오더니,
"나는 진민왕(秦閔王)의 딸로 조(曹)나라에 시집을 가게 돼 있었으나, 불행
히 죽게 되어 23년 동안 여기서 살고 있사오니 사흘동안만 부부의 연을 맺도
록 해주십시오."
라며 간곡히 청하였다.
여주인의 청대로 3일간 부부의 연을 맺고 나자, 여주인이 황금으로 만든
베개를 정표로 주면서 하인에게 대문까지 전송하게 했다.
진나라의 서울로 간 신도도는 베개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고자 하였는데,
이 황금 베개의 소문을 들은 황비가 그를 불러들였다. 왜냐하면 그 베개는
황비의 죽은 딸의 순장품이었던 것이다. 황비는 그 즉시 하인을 시켜 무덤을
파보게 하였는데 황금베개만 없었다. 그 때야 황비는 신도도를 자신의 사위
로 인정하고 그에게 부마도위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왕의 사위를 일러 사람들은 부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
는 물론 꾸며진 것이다.
부마란 원래 천자(天子)가 타는 부거(副車, 예비수레)에 딸린 말로, 그것을
맡은 벼슬이 부마도위이다.
◈부득요령(不得要領)◈
172
(오령을 얻지 못하다, 중요한 일을 달성시키지 못하다)

그리하여 장건은 끝내 대궐지국왕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그 나라에 1년 남짓 머물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한서(漢書)」의 '장건전(張騫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무렵까지 만리장성 서쪽은 미지의 세계였다. 한무제(漢武帝)때, 흉
노가 최전성기를 맞아 침략을 일삼았으므로 한은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 그
래서 무제는 대월지국과 손을 잡고 숙적인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대월지국으
로 보낼 사신을 모집했는데, 이 결사적인 모험을 맡고 나선 이가 바로 장건이
라는 낭관(郎官)이었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 흉노 출신인 감부라는 자를 안내자로 하여 백여 명
의 일행을 이끌고 출발했는데, 농서 지방에서 흉노의 영토로 들어선 직후 그
들에게 체포되었다. 그곳에서 10년간이나 억류되어 있으면서 흉노 여인과 결
혼하여 두 아들까지 두었으나, 사명을 잊지 않고 기회를 틈타 처자와 수행원
을 데리고 대원국(大苑國)으로 탈출하였다.
한과의 물자교역을 바라고 있던 대원국은 장건을 대월지국까지 보내주었
다.
그 때 대월지국에서는 왕이 흉노와의 싸움에서 죽은 직후라 신왕(新王)이
대하국을 정복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땅이 비옥하여 생활이 풍족했
으므로 흉노에 대한 복수심이 시든데다가,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한과의 국
교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요령부득, 즉 긴요한 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오다 흉노에게 다시 잡혀
1년 쯤 억류되어 있다가 혼란한 틈을 타서 탈주하여 고국의 장안을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힌 바가 있었기에, 비록 소기의 목적
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역문명의 소개자로서 청사(靑史, 歷史)에 길이 업적을
빛내기에 이르렀다.
요령(要領)은 직역하면 허리와 목이라는 뜻이지만, 의복의 허리띠와 옷길이
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요령'이라고 하면 아주 긴요한 것, 곧 요점을 가
리킨다.
◈부중지어(釜中之魚)◈
173
(장차 삶아질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그런데 장강은 단신으로 도적의 산채로 수레를 몰고 가서, 장영과 만나 사물의 도리를 설득하여 들려주었다. 그러자 장영은 이 말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저희들은 이와 같이 하여 서로 취하여 목숨을 오래 보존할지라도, 그것은 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오래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만여 명의 도적떼가 항복했다.

「자치통감」의 '한기(漢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의 외척 가운데 양기만큼 그 횡포가 심했던 인물도 드물다.
양기는 아우인 불의가 하남의 태수가 되자, 8명의 사자로 하여금 주군(州
郡)의 순찰을 명했다.
8명 중 장강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양기의 횡포에 대해 평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양기로부터 명을 받자 수레의 바퀴를 낙양 숙소
의 흙 속에 묻고서,
"늑대와 이리 같은 양기의 형제가 요직에 올라 있는데, 여우와 살쾡이 같
은 지방 관리를 조사하며 돌아다닐 수 있는가?"
하며, 반대로 양기형제를 탄핵하는 15개 조항의 상소문을 제출했다.
이로 인해 양기의 미움을 산 장강은 양주와 서주를 10여 년간 휩쓸고 다
니는, 장영이란 두목이 이끄는 도적떼의 근거지인 광릉군의 태수로 임명되었
다.
이곳에서 장강은 도적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갇혀 있던 자를 모두 석방하
였다. 그리고는 위의 내용처럼 사물의 도리를 들려주면서 교화에 힘쓴 결과,
만여 명의 도적떼가 모두 항복하였고 남주는 평안을 되찾게 되었다.
장강은 '반근착절'을 만나야 잘드는 칼을 구분할 수 있다며 조가현의 수천
명 도적떼를 평정한 후한 안제 때의 우후와 닮은 점이 많다.
◈분서갱유(焚書坑儒)◈
174
(책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생매장시키다, 서적이나 사람을 탄압하다)

"사관은 진나라 기록이 아닌 것은 다 불사르라. 박사의 벼슬이 직무상 취급하는 것 이외에, 천하에서 감히 시경과 서경과 백가(百家)의 책을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모두를 군의 수위에서 제출하여 그 모두를 불사르라."
학자들은 죄를 서로 전가시켜 다른 사람을 고발하고, 자기 자신을 도우려 했다. 그 결과 금령을 범한 사람이 4백 60여 명이 있어, 이들을 모두 함양에서 굴을 파고 묻어 버렸다.

「사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시황 34년, 함양궁에서 술자리가 베풀어졌다. 이 때 군현제도를 주장하
는 복사(僕士) 주청신과, 봉건제도의 부활을 주장하는 박사(博士) 순우월이 시
황 앞에서 대립된 의견을 놓고 다퉜다.
순우월의 의견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승상 이사는 봉건제도는 임금의 권위
를 떨어뜨리고 당파를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를 일체 금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사관(史官)이 맡고 있는 진나라 기록 이외의 것은 모
두 없애고 의야, 복술, 농경 등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30일 이내에 태워 없애
지 않는 사람은 징역형에 처하며, 만일 법령이나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은 관리에게 배우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시황은 이사의 말을 채택하여 실시케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35년에 진시황은 자신의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술을 가진 방사
(方士)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 중에서도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을 우대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비난하면서 도망쳐 버리자 시황제는 머리끝까지 화
가 났다. 그런데 이즈음 정부를 비난하는 수상한 학자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
았다.
시황은 어사(御使)를 시켜 학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심문하게 했다. 사실
상 학자들은 비난한 일이 없지도 않은지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자기만 빠
지려 했다. 그 결과 법에 저촉된 사람이 460여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을 모두
함양성 안에 구덩이를 파고 묻게 했다. 이것이 갱유(坑儒)로서, 위의 사건과
함께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하는 것이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
175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아버지의 원수와는 더불어 함께 하늘을 이지 않고, 형제의 원수와는 병기를 돌이키지 않고,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함께 하지 않는다.

「예기」의 '곡례상(曲禮上)'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곡례상'에 있는 위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만큼 깊은 원수로, 반드시 그 원수를 갚아야 하는 타협이 허락되지
않는 원수인 것이다.
형제의 원수도 그 원한의 깊이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경우에 뒤떨어지지
않겠지만,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갈 여유가 없다는
불반병(不反兵)으로 설명되어 있다. 만약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간다면 상대
방이 도망할 틈을 얻게 되므로, 평소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다가 형제의 원수
를 만나면 그 원수를 갚도록 하라는 말이다.
친구간의 원수는 부모와 형제의 육친에 비교하면 훨씬 원한이 얕다 하겠
다. 물론 마음을 서로 주던 가까운 친구의 원수라면, 적어도 나라를 함께 하
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다른 나라로 쫓아내거나, 자기가 다
른 나라로 떠나거나, 친구 사이의 정의 깊고 얕음에 따라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맹자(孟子)」의 '진심장하'에 보면, 살인은 살인을 부르는 복수의
악순환이므로 내 부모나 형제가 귀하면 남의 부모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인
의의 사회가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내 이제야 사람의 어버이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았노라. 사람의 아
비를 죽이면 사람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사람의 형을 죽이면 사람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니, 그러면 스스로 죽어지는 아니했지마는 마찬가지다."
◈불사약(不死藥)◈
176
(죽지 않는 약)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다 요망한 일이다. 음식을 절식하고 가려먹으면 조금 병이 적어질 뿐이다."
라고 하였다.

「사략」권이(券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시황 28년에 방사(道士), 제인(齊人), 서시(徐市) 등이 글을 올려 동남, 동
녀와 더불어 바다를 건너가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의 신선에게서 불사약을
구해 오겠다고 청했다.
진시황은 그들의 말대로 모든 준비를 하여 그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
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불사약을 구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진시황만은 아니었다. 인류의 존재와
함께 불사나 영생에의 꿈은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
「한비자(韓非子)」의 '설림상편'에 보면, 어떤 사람이 불사약을 초나라 임
금에게 바쳤다. 내시가 그것을 들고 들어가려고 할 때 궁전지기가 물었다.
"먹을 수 있는 거요?"
"그럼, 먹을 수 있는 거지."
그러자 그는 그것을 빼앗아 먹었다.
이를 알게 된 임금은 크게 노하여 궁전지기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궁전지기는,
"신이 내시에게 물어보니 먹어도 괜찮다고 하기에 먹었을 뿐입니다. 또한
제가 먹은 것이 불사약인데, 만일 임금께서 신을 죽이시면 그것은 죽은 약이
됩니다. 그러면 그 손님이 임금님을 속인 것이 됩니다. 죄 없는 신하를 죽
임으로써 임금님이 속으신 것이 밝혀질 것이니, 신을 놓아주심이 좋을 것입니
다."
라고 말했다.
왕은 그 말에 그를 놓아 주었다고 한다.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
177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얻는다)

그러자 반초는 단호하게 말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은, 밤에 불을 이용하여 오랑캐들을 공격하는 일로, 그것도 우리 군대의 수를 놈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반드시 놈들은 크게 떨고 두려워할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오랑캐들이 멸망하면, 곧 선선국의 담을 무너뜨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달성될 것이다."

「후한서」의 '반초전(班超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반초는 후한 초기의 사람으로, 형 반고는「한서(漢書)」의 저자이고, 아버
지 반표, 누이동생 반소도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처럼 문필가 집안에서 태어난 반초는 매우 박학하고 용감한 성품의 소
유자로서, 서역에서 크게 활약하여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반초의 활약은 북흉노의 정벌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약 30년간 흉노 정벌
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다음은 그의 활약과 관련된 한 일화이다.
선선국 광왕은 매우 후한 대접을 해주었는데, 북쪽 흉노의 사자들이 오자
갑자기 반초 일행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광왕이 흉노를 몹시 두려
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눈치 챈 반초는 흉노의 사신이 머물고 있는 곳을 알아낸 뒤, 부하들
을 모아놓고 위와 같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날 밤 야음을 틈타 공격을 감행
했다.
화공(火攻)으로 흉노의 숙소를 공격한 반초 일행은 정신없이 허둥대는 몇
배나 되는 적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것을 본 광왕은 다시 한(漢)을 두려워하게 되어 사신들의 말에 따르게
되었다.
◈불초(不肖)◈
178
(아버지를 닮지 않고 어리석다)

요임금의 아들 단주는 불초(不肖)하였고, 순임금의 아들 또한 불초하였다. 순임금이 요임금을 도운 것과 우임이 순임금을 도운 것은, 해가 지나가기를 많이 하였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음이 오래되었다.

「맹자」의 '만장평상(萬章篇上)'에 나오는 말이다.
성운 요임금과 순임금 두 분 다 자식이 어질지 못해 자식 아닌 순과 우에
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준다.
조선조의 왕위계승사를 보면 자기 직계자손에게, 그것도 자기가 예뻐하는
아들에게 물려주려다가 1, 2차 왕자의 난을 불러오고, 세자가 정해져 있는데
도 새로 아들을 낳아 대통을 물려주려는 어리석은 임금도 있었음을 본다.
요순의 타인에게의 양위는 그들이 성군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조 성종은 세종 다음 가는 명군이다. 태자 연산이 불초하다고 옥좌를
아끼라는 손순효의 충간에 동감을 하면서도, 운명으로 알고 체념을 하여 나라
를 망치는 폭군 연산군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어질고 착한 부모를 닮지 않았음을 뜻하는 '불초'가 지금은 자기를
낮추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불혹(不惑)◈
179
(마흔 살의 나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서고,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고, 쉰 살에 하늘의 명을 알고, 예순 살에 귀에 따랐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기지 않았다."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온는 말이다.
위의 말은 공자가 만년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 정신적인 성장과정
을 말한, 짤막하면서도 일종의 자서전적인 요소를 포함한 술회(述懷)라고 보아
야 하며, 그 가운데서 사용된 어귀가 그대로 연령을 나타내는 말로서 후세에
도 사용되고 있다.
「논어」의 '자한편(子罕篇)'에는 공자가 광(匡)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면서
한 말이 나온다.
"문왕(文王)이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글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하늘이
장차 이 글을 없애려 하신다면 뒤에 죽은 사람들이 이 글을 모르고 말겠거니
와, 하늘이 아직 이 글을 없애지 않으신다면 광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하겠
는가?"
우리는 여기서 공자의 사명감 인식과 사명을 완수하려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사명감의 실천이 현실의 애로로 매우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치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
워 위로 통달한다.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라고 했겠는가?
마흔 살을 불혹(不惑)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시작된 말이다.
◈붕정만리(鵬程萬里)◈
180
(붕새의 갈 길은 수만 리, 원대한 사업이나 계획)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큰 곤은 길이가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화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새라 한다. 붕새의 등은 그 몇천 리인지 알지 못한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으로 장차 남쪽 바다로 옮기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다.

「장자」의 '소요류편(逍遙遊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 사상의 독특한 점을 몇 가지 추리자면 첫째, 유가(儒家)가 인의예지
(仁義禮智) 등의 적극적 교의를 부르짖고 이상적 윤리공동인 '유(有)', 즉 목적
을 추구하는 데 대해 정허, 무욕, 무아, 무위 등의 부정적 사변(思辨)을 철저히
함으로써 절대적인 '무(無)'의 세계를 열고, 그 세계만이 도(道)와 일체가 된
유일한 진실이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유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
가 하는 길(道)을 탐구하며 결국 타인과의 윤리적 협동생활을 중요한 문제로
삼는데 대해 장자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찌하여 존재하는 것일
까 등을 캐물어 현실 생활을 초월한 개인의 근원적 성역을 규명하려 한 것이
다. 셋째, 현실생활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 넷
째, 우언(寓言)으로 어려운 사상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붕정만리는 이 우언의
하나로서, 위의 붕새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북해에 곤(鯤)이라는 큰 고기가 있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 지, 몇
천 리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
가 되었는데, 한 번 날면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았다. 붕이 남해바다로 갈
때는 날개짓을 3천 리, 높이 오르기를 9만 리, 그래서 여섯 달을 날고서야 비
로소 날개를 쉰다.
한 번에 9만 리를 나는 대붕(大鵬)을 보고 작은 새 척안은 이를 비웃으며,
"대관절 저놈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기껏 대여섯 자 숲 위를 날기
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는 재미가 있는데 말이야."
라고 조잘거렸다. 하지만 왜소한 것이 어찌 위대한 것의 마음을 헤아리겠는
가마는 이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라고 장자는 비유하고 있다.
한 번에 9만 리를 날아 6개월 만에 남쪽으로 가는 일을 도남(圖南)이라고
한다. 도남은 어느 다른 지역으로 가서 큰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을 뜻
하기도 하는데 '붕정만리'의 고사에서 유리된 또 하나의 고사라 할 수 있다
◈비방지목(誹謗之木)◈
181
(불만이나 불평을 써붙여 임금이 보게 하는 나무)

한의 효문황제는 '옛날의 천하 다스리는 법에 조정에는 진선지정, 비방지목, 감간지고가 있었다. 지금 법에 비방오언지죄를 두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사기」의 '효문제기(孝文帝紀)'에 나오는 말이다.
요임금은 천자의 신분이면서도 갈대지붕에 겨울 세 충의 흙계단이 딸린
보잘 것 없는 조촐한 집에 살면서, 부유해도 남에게 뽐내지 않고 귀해도 남을
깔보지 않으며, 오로지 올바른 정치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임금은 정사가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면 혹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
각에서 진선지정(進善之旌, 큰 길가에 깃발을 세워 그 깃발 밑에서 정치에 대
한 좋은 의견이 있는 자로 하여금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
을 발표하게 하였음), 감간지고(敢諫之鼓, 궁문 앞에 커다란 북을 매달아 놓고
누구라도 요임금의 정치에 부족한 점을 발견한 자는 그 북을 쳐서 거리낌없
이 의견을 말하도록 했음), 비방지목(誹謗之木, 궁문 다리 앞에 네 개의 나무
로 엮은 기둥을 세워, 누구라도 요임금의 정치에 불만이 있는 자는 그 기둥에
불평이나 불만을 써붙여서 자기가 바라는 바를 주장하도록 하였음)을 설치하
였다.
그리하여 한층 더 정확하게 민의의 소재와 동향을 파악하고, 자기 반성의
자료로 삼아 민의를 반영한 정치, 백성에 의한 정치를 이루는 데 힘을 썼다.
◈비육지탄( 肉之嘆)◈
182
(재주나 수완, 역량을 발휘하지 못함을 탄식한다)

어느 날 유표에게 초대되었을 때, 화장실에 선 유비는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 자리로 돌아온 후 유표가 눈물의 흔적을 보고 그 까닭을 묻자 유비는 대답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너무 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살이 많이 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슬플 뿐입니다."

「삼국지」의 '촉지(蜀志)'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실의 부흥을 외치며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일어선 유비는, 힘이
미약한 까닭에 조조에게 쫓겨 기주, 여남 등지로 전전하다가 끝내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여, 신야라는 작은 성 하나를 맡아보고 있었다.
어느 날 유비는 유표의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일어나 잠
시 화장실에 간 그는, 넓적다리의 살이 유난히 찐 것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
렸다. 자리로 돌아온 유비의 얼굴에서 눈물자국을 발견한 유표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 위와 같이 답하였다.
'비육지탄( 肉之嘆)'이란 원래 장수가 전쟁에 나가지 못하여 넓적다리 살
이 피둥피둥 찌는 것을 한탄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뜻을 펴보지 못
한 채 허송세월하는 것을 한탄함을 이르는 말이다.
◈빈계지신(牝鷄之晨)◈
183
(암탉이 울어서 새벽을 알린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로 바뀌었다.)

'옛사람이 이르되 암탉은 아침에 울지 않는 법이다. 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서경」의 '목서편(牧誓篇)'에 실린 것으로, 주무왕이 은왕 주(紂)를 정벌
하기 위한 대의 명분으로 한 말이다.
신하였던 사람으로 천자를 치기 위해서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
서 주무왕은 위와 같이 암탉의 예를 들면서,
"오늘날 은왕은 여자의 말만을 듣고 있다. 조상의 제사를 전혀 돌보지 않
고 한 조상을 모신 백이와 숙제 형제들도 전혀 돌보지 않으며, 그들을 임용하
지도 않았다. 다만, 곳곳에서 많은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자들을 높이고 기르
며 믿고 임용했다. 또 이 자들을 대부(大夫)와 경사(卿士)로 삼아 백성들에게
포악한 일을 저지르게 하여, 은나라가 범죄로 인해 문란해지게 하였다. 이제
나 발(發)은 삼가 하늘의 벌을 대행코자 한다."
라는 명분을 세웠다.
이 명분에 따라 주무왕은 은왕 주를 정벌하였다.
◈빈자일등(貧者一燈)◈
184
(가난 속에서 정성으로 바친 등이 값이 있다)

난타는 가슴속에 있는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기름집의 주인은 불쌍히 생각하여 두 배 이상이나 기름을 주었다. 그만큼의 기름이 있으면 한 등을 밝힐 수가 있었다. 난타는 크게 기뻐하여 등 하나에 불을 붙여, 정사로 가서 석가모니에게 바쳐 불단 앞에 있는 많은 등불 속에 놓았다.

우현경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석가가 사위국(舍衛國)의 한 사원에 머물 때의 일이다.
그곳에 거지노릇을 하며 생활하는 난타라는 여자가 있었다.
하루는 이 난타가 국왕을 비롯한 온 나라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 신분에
어울리게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에게 공양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저 세상에서 저지른 죄 때문에 가난한 몸으로 태어나, 모처럼 고마
운 스님들을 보면서도 아무 공양도 할 수가 없구나."
라면서, 어떻게 하든지 남들보다는 못하지만 공양하는 흉내라도 내겠다고 생
각했다.
그리하여 난타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비를 받아
겨우 1전을 얻었다. 그 1전을 가지고 기름집에 가서 기름을 샀는데 매우 적
은 양이었다.
난타는 그 기름으로 등에 불을 붙여 석가모니에게 바쳤는데, 다른 등이 모
두 꺼진 뒤에도 그녀의 등은 계속 빛났으며,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다.
뒤에 석가가 난타의 정성을 알고 그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185
(성질이 서로 상반되어 도저히 화합될 수 없다)

얼음과 숯은 가히 써 서로 함께 하지 못하니
내 본디부터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
홀로 괴롭게 죽어 즐거움이 없음을 슬퍼하여
나는 나이가 아직 다하지 않음을 슬퍼한다

「사기」의 '골계전(滑稽傳)'에 나오는 시이다.
한무제 때의 명신(名臣) 가운데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초나라의 천재적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을 추모하면서 '칠간(七
諫)'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굴원이 고향을 떠나 고민하는 모습
을 노래하고 있다. 그 중 빙탄( 炭)이란 말이 나와 있는 부분을 소개하면,
'사람의 일의 불행을 슬퍼하여, 태명(太命)을 붙여서 함지(咸池, 하늘의 신)에
게 맡긴다. 몸은 병을 얻어 쉬지 못하고, 마음은 탕임금과 같이 끓어오르네'
라고 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 위의 시가 이어진다.
이 시를 풀이하면 굴원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나를 위하고 임금을 위
하는 일편단심을 안은 채, 멀리 고향을 떠나 귀양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신을 모함하는 간신들과 나라를 사랑하는 자신은 성질상 얼음과 숯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그런 운명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 목숨이 날 때부터 길게 타
고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일생이나마 낙이란 것을
모르고 고생만 하던 끝에, 결국은 그 길지 않은 나이마저 다 살지도 못하고
객지에서 죽어갈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는 것이다.
굴원은 결국 물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사마골오백금(死馬骨五百金)◈
187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다)

옛날 한 임금이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몇 해가 되어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연인(涓人, 잡무를 보는 관리)이 천금을 주면 자기가 구해 오겠다고 하여 천금을 가지고 가서는, 얼마 후 죽은 천리마 머리를 5백금을 주고 사 가지고 왔다. 그 후 1년 안에 천리마가 세 마리나 왔다.

「천국책」의 '연책(燕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연나라 소왕은 부왕을 죽이고 나라를 짓밟았던 제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
해, 인재를 모으려고 스승이었던 곽외를 찾아갔다. 그러자 곽외는 위와 같이
천리마 얘기를 들려주었다.
"죽은 천리마를 사온 것을 본 왕은 화가 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천리마였지 죽은 천리마는 아니었다. 더구
나 죽은 말을 오백금이나 주고 사오다니….'
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연인이 대답하기를,
'죽은 천리마를 오백금을 주고 샀으니 살아있는 천리마야 말할 것이 있겠
습니까? 천리마를 가진 사람이 먼 길도 마다 않고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애쓰고 돌아다녀도 구하기 힘든 천리마를 이제 앉아서 얻게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임금께서 먼저 신을 오백금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살아있는 천리
마 같은 인재가 사방에서 찾아올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소왕은 곽외를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과연 악의, 추연, 극신 같은 명장과 명사들이 앞을 다투
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소왕은 백관들과 고락을 함께 하기를 28년, 마침내 악의를 상장군으로 하
여 제나라를 휩쓸고 들어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188
(적에게 완전히 포위 당해 고립상태에 있다)

항우의 군대가 해하에서 성벽을 쌓고 그곳에 들어가 있었는데, 군대의 사람 수는 적고 식량도 떨어져 있었다. 한(漢)나라 군대와 제후의 군대는 성벽을 몇 겹으로 포위했다. 밤에 항우는 한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모두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한나라 군대가 이미 초나라 땅을 얻은 것일까? 어찌 초나라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7년간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항우가 먼저
휴전 강화를 하고 동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신이 지휘하는 한
군은 초군을 포위하여 사면초가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한 항우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결별연(訣別宴)을
열었다. 항우 곁에는 추라는 이름의 천리마와 우미인(虞美人)이 있었다. 항
우는 매우 비감해 하며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어도
때가 불리하니 추도 움직이려 않네
추도 가지 않으려 하는데
우(虞)야 우야 너를 어찌해야 할까?

반복해서 몇 번 노래하자 우미인도 이별의 슬픔을 가득 담고 애절하게 따
라 불렀다.

한나라 군대는 이미 땅을 차지했는지
사방에서 초가 소리뿐
대왕의 운이 다 되었거늘
천한 첩이 어찌 살기를 바라리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우미인이 항우의 품에서 자결하자, 항우 역시 다음
날 오강에서 자결했으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사반공배(事半功倍)◈
189
(일은 반만 하고 공은 배로 세우다)

공자는,
"어진 덕이 퍼져나가는 것은 역마를 두어서 명령을 전하는 것보다도 빠르다."
라고 하였다.
이 때를 당해서 만승의 나라에서 어진 정치를 행하면 백성들의 기뻐하는 것이 마치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몸이 풀려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은 옛 사람의 반밖에 안하고도 공은 반드시 그 배가 되리라는 것은 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맹자」의 '공손축산(公孫丑上)'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는 활동하던 춘추전국시대는 나라는 있어도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닌,
패자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다스려졌으므로, 자연히 백성들의 삶은 고달프기
마련이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몸'이라는 표현이 이 당시의 상황을 적절히 반영한다
할 수 있겠다.
전국시대 초(楚)나라가 진(陳)나라를 치니 오(吳)나라가 진에 구원병을 보
내었다.
초와 오의 군대가 30리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였는데, 열흘 동안이나 계속
비가 내렸다.
그러자 초나라의 좌사 이상이 자기(子期) 장군에게,
"비가 열흘이나 내리는 동안에 군대와 병기가 정돈되었을 것이니 오나라
군대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도 대비태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습
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방비의 진을 펴게 했는데, 아직 진의 배치가 끝나기도 전에 과연 오
나라의 군대가 진격해 와서는 초나라 군대의 방어의 포진을 보고는 되돌아갔
다.
좌사가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은 왕복 60리를 행군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면 반드시
휴식을 취할 것이고 졸병들은 식사를 할 것입니다. 우리편에서는 30리만 행
군하면 되는 것이니 이 때에 공격하면 반드시 적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반공배(事半功倍)가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초나라 군대는 좌사의 계책대로 움직였고, 그 결과 오나라 군대를 크게 물
리칠 수 있었다.
◈사분오열(四分五裂)◈
190
(힘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다)

육도기병편에 이르기를, '사분오열이라는 것은 둥근 것을 치고 모난 것을 파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전국책」의 '위책(魏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국책」은 주원왕(周元王)으로부터 진시황(秦始皇)에 이르는 전국시대에
책모(策謀)·변론으로 활약한 유세가(遊說家)들의 양상을 나라별로 기술한 책
이다.
이 책에는 육국(六國)이 연합하여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는 소진의 합종설
(合從說)과, 진(秦)과 협동해야 한다는 장의의 연형(蓮衡)설 등도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소진이 위애왕(魏哀王)에게 합종(合縱)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변설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위나라의 땅은 사방 천리도 되지 않고 군대도 30만에 불과합니다. 사방
이 편편하고 길은 가지의 갈림과 같아 수레바퀴의 살과 같이 통하여 있으며,
제후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만한 높은 산이나 요충지도 없습니
다. 더구나 남쪽에는 초나라, 서쪽에 한나라, 북쪽에 조나라, 동쪽에 제나라
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위나라의 지세는 원래가 전쟁터입니다. 만일 위나라
제나라와 연합하지 않으면 제나라가 위나라의 동쪽을 공격할 것이며, 조나라
와 연합하지 않으면 조나라가 북쪽을 공격할 것이며, 한나라와 연합하지 않으
면 한나라가 서쪽을 공격할 것이며, 초나라와 연합하지 않으면 초나라가 남쪽
을 공격해 올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사분오열(四分五裂)'의 도(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분오열'이 유래되었지만 지금은 세력이나 힘이 나누어져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불급설(駟不及舌)◈
191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는 못 미친다, 소문이 빨리 퍼진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사답지만 사(駟)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이나 개와 양의 가죽이 같다는 말인가?"

「논어」의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이 말은,
"군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째서 문(文)이 필요합니까?"
라는 극자성의 물음에 대한 자공의 대답이다.
「시경」의 '대아편(大雅篇)'에는 '흰 구슬이 깨진 것은 갈 수가 있지만 말
이 어긋난 것은 어쩔 수 없네'라는 시구가 나와 있다.
당나라 때의 명제상인 풍도는,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
고 하였고「명심보감」에는,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
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할 것'이라
고 하였다.
「전등록(傳燈綠)」에는 '나쁜 소문은 천 리를 간다'고 했고, '좋은 소문은
기어가고 나쁜 소문은 날아간다'고 했다.
◈사숙(私淑)◈
192
(직접 가르침을 못 받아도 그 사람을 표본으로 인격을 수양하다)

맹자가 이렇게 말했다.
"군자가 끼친 은덕은 다섯 세대로 끊어지고, 소인이 끼친 은덕도 다섯 세대에서 끊어진다.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얻지 못하였지만, 나는 이것을 사람들을 통하여 사숙(私淑)하였다."

「맹자」의 '이루편(離蔞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가 유학을 배움에 있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가 되어 배
웠다는 설과, 자사의 문인에게서 배웠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윗 글은 맹자가 공자를 그리워하며 자신이 사숙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
을 술회한 것이다.
군자나 소인이나 그 끼친 은덕이 다섯 세대로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한
세대를 30년이라 했을 때 적어도 150년 정도는 이어진다는 말이 된다. 따라
서 공자가 죽은 지 90년 후에 태어난 맹자는 비록 공자의 제자가 되지는 못
하였지만, 사람들을 통해 그의 덕을 들음으로써 자신을 수양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사이비(似而非)◈
193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짜)

공자는,
"나는 사이비한 것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신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아악(雅樂)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깔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鄕原)을 미워하는 것이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라고 말했다.

「맹자」의 '진심장하(盡心章下)'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와 문답을 하던 만장이 물었다.
"한 고을 사람들이 다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어디를 가나 훌
륭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터인데, 공자께서는 어찌 그런 사람을 '덕을 해치
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물음에 맹자는,
"그를 비난하려 해도 특별히 비난할 것이 없고, 세상 풍속에 어긋남이 없
으므로 성실한 것 같고, 청렴결백한 것 같아 사람들이 다 그를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과는 요와 순의 올바른 도에 함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덕을 해
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대답하고는 이어서 위와 같은 예를 들었다.
공자는 인의에 뿌리박지 못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처세술에 능한 사이비
(似而非)군자는 '덕을 해치는 사람'으로 미워한 것이다.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
194
(상대를 쓰러뜨리려면 상대의 힘이 되는 것부터 쓰러뜨려라)

활을 당기려거든 마땅히 센 것을 당기라
화살을 쓰려거든 마땅히 긴 것을 써라
사람을 쏘려거든 먼저 말을 쏘고
적을 사로잡으려거든 먼저 적의 왕을 사로잡으라
사람을 죽이는 것도 또한 한이 있고 나라를 세우면 스스로 국경이 있다
진실로 능히 침약을 제지한다면
어찌 살상을 많이 할 필요가 있으리오

두보의 시 '전출새(前出塞)'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영토확장을 위해 변방에 군대를 파견한 것에 대한 당
시 병사들의 마음을 읊고, 곧 이어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기 직전의 형편을
노래한 것이다.
활을 쏘려면 마땅히 강한 활로 쏘고, 화살을 쓰려면 마땅히 긴 화살을 써
야 한다. 사람을 쏘려면 먼저 그가 탄 말을 쏘고, 적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 왕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데 또한 한계가 있어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며, 다른
나라와의 국경은 없앨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시가 의도하는 바는 침략전쟁을 부정함에 있다. 한없이 병사들을 죽이
는 영토확장은 빨리 그치는 것이 좋으며, 능히 적군의 침략을 막을 수가 있다
면 어찌 많은 병사들을 죽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사인선사마'는 전쟁을 최소화하고 무고한 백성을 보호하자는 의도로 한
말이지만, 요즘은 목적달성을 위해 상대의 기둥이나 버팀목이 되는 것을 먼저
허물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자신중충(獅子身中 )◈
195
(자기편에 해를 끼치는 사람)

사자의 몸 속의 벌레는 스스로 사자의 고기를 먹어, 나머지 벌레에 먹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하여 불자들은 스스로 불법을 깨친다. 바깥의 도(道)가 천마(天魔)를 능히 파괴함과 같지 않다.

「불경」의 '범강경(梵綱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자는 죽어 시체가 되어도 다른 짐승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벌레들
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자의 몸 속에 저절로 생긴 벌레가 있어,
사자의 죽은 시체를 말끔히 먹어치운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예로 들어, '불법을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세력이 아니
라 불제자 자신들'이라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사자를 먹는 것은 사자 속에 있는 벌레이듯 불법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불제자들이다. 즉, 부처의 올바른 가르침을 파괴해서 불법의 권위를 타락시
키는 것은 불법을 믿는 자들 가운데 악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불교를 반대
하는 이교도나 성불(成佛)을 방해하는 마귀들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흥망의 요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나
조직 자체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자후(獅子吼)◈
196
(열변이나 웅변을 토하다)

사자가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나와, 눈빛이 번개와 같고 목소리의 울부짖음이 우뢰와 같다. 한 번 짖을 때마다 곧 모든 짐승들이 피하여 도망친다.

「본초강목」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 '사자후'를 부처인 석가모니는 설법의 뜻으로 전용(轉用)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에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높다)'이라고 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것을「전등록(傳燈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
은 땅을 가리켜 돌아다니시기를 일곱 발짝 하시고,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선언을 사자후로 풀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 태어나시어, 손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가
리키시며 사자후의 소리를 내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유마경」에는,
"석가의 설법은 그 위엄 있는 것이 마치 사자가 짖는 것과 같으며, 그 해
설하는 것은 우뢰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 되어 있다.
이 사자후는 '열변이나 웅변을 토하다'는 뜻 외에도 소동파의 시처럼 아내
의 불호령으로 쓰여진 예도 있다.
"용구거사는 역시 가련하다. 공(空)과 유(有)를 말하며 밤에도 자지 않는
데, 문득 하동의 사자 소리를 듣자 주장(몸을 의지하는 지팡이)이 손에서 떨어
지며 마음이 아찔해진다.
◈사족(蛇足)◈
197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다가 일을 그르치다)

초나라에 사자(제사를 맡은 사람)가 있어, 근시(近侍,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시종)들에게 큰 잔에 술을 가득 담아서 주었다. 그 시종들은 시로,
"몇 사람이 마시면 모자라겠지만, 한 사람이 마실 만큼 여유가 있다. 땅에 뱀을 그리되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기로 하자."
고 말했다.
한 사람이 우선 뱀을 그린 후 왼손으로는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 계속 뱀을 그려나가면서,
"나는 발까지 그릴 수 있다구."
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리를 그리고 있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뱀을 그리고서 술잔을 뺏으면서,
"원래 뱀에게는 발이 없다구. 그러니까 발을 그리면 안된다구."
하면서 그 술을 마셔버렸다.
뱀의 발을 그리던 사람은 결국 술을 마시지 못했다.

「전국책」의 '제책(齊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회앙(楚懷王)은 재상인 소양으로 하여금 위나라를 정벌하고 제나라를 공
격하게 하려 했다.
이 때 진(秦)나라의 사자 진진이 초나라로 가서 소양을 만나 말을 했다.
"초나라에선 전쟁에 크게 승리하면 어떤 벼슬을 주게 됩니까?"
"벼슬은 상주국(上柱國) 또한 상급 직위인 규(珪)를 하사하지요."
"그보다 더 높은 지위는 무엇입니까?"
"영윤(재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 영윤이 된 사람은 더 이상 관직을 높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장군
이 더 올라갈 벼슬자리도 없는데 제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면 칭찬 몇 마디
요, 만약 실패하면 관직은 박탈되고 죽음까지도 당할지 모릅니다. 제가 장군
을 위해 한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하고는 위의 글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영윤께서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뱀을 그려놓고 발까지 그리는 것과 같
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소양은 군사를 회군시켰다고 한다.
이 후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공연한 짓을 가리켜 '사족(蛇足)'이라고 하게
되었다.
집권자가 사족 같은 일만 하면 백성은 고달프다. 회사의 대표가 본업보다
부수적인 일에만 열중하면 회사는 부도가 나기 마련이다.
◈사지(四知)◈
198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그가 동래 태수로 부임하여 가는 도중, 창읍이란 곳에서 묵게 되었는데, 창읍 현령 왕밀이 그를 찾아와서 품속에서 10금을 꺼내 양진에게 주었으나, 양진이 이를 거절하자 왕밀이 말했다.
"지금은 한밤중이므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양진이 대답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째서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

「십팔사략」의 '양진전(楊震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後漢)의 양진은 '관서공자(關西公子)'라는 칭호를 들었다.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의 흥망성쇠는 어진 임금, 어진 재상과 용감한 장수,
뇌물, 유언비어 등 네 가지 요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최
근 우리 사회가 '뇌물'이라는 요인에 의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소위 '뇌물'이라는 것은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루어지는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뇌물은 밤중에 단 둘이 거래해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라고 지적했을 만큼 모든 음(陰)적인 행위는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진(晋)나라 왕혼은 여러 고을의 자사(刺史)를 지낸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
다.
그가 죽자 그가 거쳤던 여러 고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덕과 은혜를 사모
하여 보낸 부의금이 수백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들 왕융은 한 푼도 접수하
지 않았다.
◈사취(私聚)◈
199
(자기의 노력에 의한 벌이가 아닌 재물을 사사로이 모으다)

위나라의 어떤 사람이 그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말했다.
"시집가거든 반드시 개인적으로 재물을 모아라. 남의 부인이 되고 보면 쫓겨나는 게 보통이고 잘사는 것은 요행이란다."
그의 딸은 그 말을 듣고 개인적으로 재물을 모았다.
그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사취를 한다며 내쫓았다.

「한비자」의 '설림상편(說林上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댁에서 쫓겨난 위나라의 여인이 친정집으로 올 때는 시집가면서 가지고
갈 때보다 두 배의 재물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비는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은 자책하지 않고, 더욱 부자가
되었음은 자기 딸에게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주나라 말기 왕실의 승상이었던 동탁은 후일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미'라
는 땅에 마을 하나를 만들어놓고 사취를 일삼았다. 약 30년 정도 먹을 곡식
과 금, 은, 비단, 기이한 애완물 등을 산같이 쌓아놓고 스스로 이르기를,
"천하에 응거하다가 실패하면 이것을 지키면서 늙으리라."
라고 하였다.
훗날 여포에게 죽임을 당한 뒤 시체가 시장에 널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어
떤 관리가 살찐 동탁의 배꼽에다 큰 초를 세워 불을 붙이자, 그 불꽃이 며칠
간 계속됐다는 이야기가「삼국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사해형제(四海兄弟)◈
200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동포요 형제이다)

사마우는 형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고 괴로워하며,
"사람들이 다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다."
고 하자, 공자의 유명한 제자인 자하가 이를 위로했다.
"내가 듣기로 사람의 생사는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으며, 군자가 공경하여 실수가 없고 사람들과 사귐에 공손하여 예절이 있으면 천하 사람이 다 형제라고 하거니와,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음을 근심하겠소."

「논어」의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사마우라는 자가 있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사마우의
형인 환퇴는 악한 사람으로, 송(宋)나라에서 반란을 펴다가 실패하여 국외로
도망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사마우가 곁에 형제가 없음을 탄식하자, 자하는 위와 같은 말로
근심을 덜어주었다.
역사를 거듭해 오는 동안 이러한 사해동포 정신의 실천으로 그 이름을 빛
낸 이들이 많은데, 이제는 역사상에서가 아닌 생활 속에서 그러한 인물이 배
출되어야 할 시기인 듯하다.
◈삼고지례(三顧之禮)◈
201
(세 번 찾아가서 예를 다하다)

"신은 원래 서민이어서 남양에서 직접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저 난세 중에서도 목숨을 온전히 하고자하여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나이다. 선제께서는 신이 비천한 신분임을 싫어하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몸을 굽히시어 신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주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하문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드디어 선제께 열심히 봉사할 것을 맹세하였나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조에게 쫓겨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유비에게, 어느 날 서
서가 찾아와 유비에게 군사(軍師)가 없어 세력이 약함을 지적하면서 친구인
제갈공명을 추천하였다.
당시 제갈공명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평소에 모
사(謀士)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유비는 서서의 말대로 그를 찾아
갔다. 그러나 그것도 세 번을 찾아간 후에야 겨우 군사로 모실 수 있었는데,
이러한 지극 정성에 감격한 제갈공명은 그의 출사표(出師表)에서 위와 같이
그 감격을 표현하였다.
◈삼십육계주위상책(三十六計走僞上策)◈
202
(36가지 계책중에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단공(檀公)의 36가지 계책은 도망가는 것을 상책으로 한다. 헤아리건대 그대들 부자는 오직 도망가는 것이 있을 뿐이다."

「자치통감」 제 141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조의 제나라(30년만에 망함) 2대왕이었던 명제(明帝) 소란은, 갖은 음모
와 포악으로 황제의 지위를 찬탈한 다음, 반란과 보복이 두려워 자기를 반대
했던 형제와 조카들을 두 달 동안에 14명이나 죽였다.
황제가 된지 3년 남짓해서 병을 얻어 눕게 된 뒤에도 마음이 걸리는 왕족
을 10여명이나 죽였으며, 건국 공신인 왕경칙도 마저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왕경칙이 위와 같을 말을 하였는데, 단공이란 남조(南朝)의
송나라 초기 명장인 단도제를 이르는 말로, 그는 북위와 싸울 때 잘 도망쳤다
고 한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왕경칙 군대는 관군에게 패하였으며, 왕경칙
역시 목이 잘리고 말았다.
'삼십육계주위상책'이란 말은 목숨이 있으면 다음을 도모할 수 있으니
불리하거나 도망가야 할 상황이라면 도망쳐 목숨을 보존하라는 것이다.
◈삼인성호(三人成虎)◈
203
(근거없는 말도 많은 사람이 하면 믿게 된다)

"여기 어떤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대왕께서는 믿겠습니까?"
"그 말을 누가 믿나?"
"그럼 또 한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반신반의하겠지."
"이번에 세 번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믿을 것 같다."
방총은 말했다.
"시장에는 분명히 호랑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연이어 같은 말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

「전국책」의 '위편(魏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방총이 외교적 인질 관례에 따라 태자를 모시고 조나
라 한단으로 인질이 되어 가면서, 자기가 없는 동안 왕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멀어질까하여 위혜왕을 직접 찾아갔다.
그리하여 위와 같이 문답을 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저는 지금 멀리 한단으로 떠납니다. 제가 떠난 후 저에 대해 왈가왈부하
는 사람이 셋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직접 확인해보지."
이리하여 작별 인사를 하고 출발했지만 채 도달하기도 전에 여러 상소가
들어왔다.
후에 태자가 인질에서 풀려 귀국했지만 방총은 그가 예견한 대로 왕을 만
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예로 공자의 제자 10철(十哲)중의 한 명이며 효자로서 유명했던
증자를 들 수 있다.
당시 증자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사람을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
소문을 증자의 어머니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증자의 어머니는,
"내 자식은 사람을 죽일 리가 없다."
라며 베를 짜는 데만 열중하였다.
조금 뒤 또 한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했다.
증자의 어머니는 그래도 베만 짜고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한 사람이
달려와 같은 말을 전하자 증자 어머니도 일어나 피해 버렸다고 한다.
착한 아들을 믿는 어머니의 마음도 여러 사람의 말 앞에서는 흔들린 것이
다.
◈상가지구(喪家之狗)◈
204
(초라한 모습으로 얻어먹으러 다니는 수척한 사람)

정(鄭)나라 사람이 자공에게 일러 말했다.
"동문에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와 같고, 그 목은 고요(皐 )와 같고, 그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다.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 )에 미치지 못하기를 세 치, 그 지친 모습은 '초상집의 개'와 같다."
자공이 들은 대로 공자에게 고하자, 공자가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
"모습의 형용은 그 훌륭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초상집의 개와 같다는 말은 과연 그러했을 것이다.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그의 이상을 이룰 곳을 찾던 중, 정(鄭)나라에 갔을
때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 혼자 우두커니 서서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
다리고 있을 때, 이 모습을 본 노인이 자공에게, 공자의 모습을 위와 같이 표
현하면서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 '상가지구'라는 표현은 아마도 공자가 위대한 성인의 덕과 천하를 움직
을 경륜을 가진 정치가의 자질이 있었음에도, 때를 얻지 못해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상사병(相思病)◈
205
(남녀 사이에 사랑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해 생긴 병)

송나라 사람들이 슬피 여겨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 했는데 상사란 이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진(晋)나라「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강왕(康王)은 술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인데다 여자를 많이 거느
렸으며, 빈번히 이웃나라를 침략했다. 또한 가죽부대에 피를 담아 공중 높이
달아매고 화살로 이를 쏘아 맞히면 '내가 하늘과 싸워 이겼다'면서 미치광이
같은 호기를 부렸으며, 성격이 포악하여 간하는 신하는 모조리 죽였다.
강왕의 시종 중에 한빙(韓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 하씨는 절
세미녀였다.
강왕은 강제로 한빙의 부인을 데려와 후궁으로 삼고, 한빙에게는 없는 죄
를 씌워 성단(城旦)의 형(변방에서 낮에는 도적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인부
가 되는 고된 형벌)에 처했다.
이 때 아내 하씨가 강왕 몰래 남편 한빙에게 짤막한 편지를 전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강은 크고 물은 깊으니 해가 나오면 마음에 맞겠
다."
그런데 이 편지가 강왕의 손에 들어갔고, 소하(蘇賀)란 사람이 이를,
"당신을 그리는 마음을 어찌할 길 없으나 방해물이 많아 만날 수 없으니
죽고 말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
라고 그럴 듯하게 해석을 했다.
얼마 후 한빙이 자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하씨가 성 위에서 투신 자살했는
데 그 때에,
"임금은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나는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바라건데 한빙과 합장해 주십시오."
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 유서에 노한 강왕은 고의로 무덤을 서로 떨어지게 만들고는,
"죽어서도 사랑하겠다는 거라면 무덤을 하나로 합쳐보아라."
라며 여전히 그의 포악함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밤 사이에 두 그리 나무가 각각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돼 아
름드리 나무가 되어 위로는 가지가 서로 얽히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
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쌍의 원앙새가 앉아서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우
니, 듣는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이 새는 한빙 부부의 넋일 것이라 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
207
(인간의 길흉화복은 예측할 수 없다)

국경의 요새가 가까운 곳에 점을 잘 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말이 연고도 없이 도망하여 오랑캐 땅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이를 위로하자,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복이 되지 않겠는가?"
몇 달이 지나자,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이끌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다 이를 축하했다.
그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이 어찌 재앙이 되지 않겠는가?"
집에는 좋은 말이 늘어났으나, 말타기를 좋아하던 아들이 어느 날 말을 타다 떨어져 그만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이 일에 대해 위로하자 그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복이 되지 않겠는가?"

회남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 후 1년, 오랑캐가 쳐들어와 전쟁이
벌어졌다. 마을 젊은이들이 다 전쟁터로 끌려나가 대부분 죽어 돌아왔으나,
노인의 아들은 불구였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목숨을 그대로 보존헐
수 있었다.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는 '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 '인간
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고도 쓰이는데, 이 가운데 '인간만사새옹지
마'라는 말은 원(元)나라의 승려 희회기의 다음과 같은 시에서 유래되었다.
"인간만사는 새옹지마니 베개를 밀치고 집 가운데서 빗소리를 들으며 자
네."
◈서족이기성명(書足以記姓名)◈
209
(학문만을 내세우는 것을 비웃다)

"글은 성명만 기록하면 족하고 칼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배울만한 것이 못됩니다. 만 사람을 대적하는 것을 배우겠습니다."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항우는 어릴 때 글을 배웠으나 끝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었으며, 칼을 배
웠으나 또 이루지 못하였다.
작은 아버지 항양이 화를 내며 꾸짖자 항우는 글은 성명만 쓸 수 있으면
되므로 '만인적', 즉 병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항양은 그에게 병법
을 가르쳤으나, 병법의 대강을 알고 난 항우는 역시 끝까지 배우려 하지 않았
다.
장수로서의 항우는 마치 철인과 같았다. 300근이나 되는 철퇴를 자유자재
로 휘둘렀고, 천리마를 타고 달리는 그의 철퇴 앞에서는 칼도 창도 아무 소용
이 없었으며, 그가 입었던 일곱 겹의 갑옷은 어떠한 화살이라도 다 막아내었
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직 백절불굴의 투지와 용맹만이 있었을 뿐, 장수로서
갖추어야 할 지략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4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도
유방의 10만 군대에 패하는 결과를 맞이하였으며, 31세의 나이로 오강(烏江)에
서 자살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석권(席卷)◈
210
(자리를 마는 것처럼 한쪽부터 토지를 공격하여 취하는 것)

사마천이 말했다.
"위표와 팽월은 비천한 집안의 출신으로 천리의 땅을 석권하였었다."

「사기」의 '위표팽월전(魏豹彭越傳)'에 나오는 말이다.
위의 사마천의 말처럼 천리의 땅을 석권하였던 위표와 팽월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한고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위표는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
다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며, 팽월은 한고조의 출병요청에 출두하지 않은
탓에 반란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마천은 계속해서 이 두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명성이 날로 높아졌지만, 반란의 뜻을 품어 패하자 자결하지 않고 포
로가 되어 죽임을 당한 것은 왜인가? 그것은 두 사람이 지략에 뛰어나 한 몸
이 무사하면 다시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여 포로가 되는 것도 사양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지금 군사적 석권 시대에서 경제적 석권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선진국(경제적 석권 국가)는 아니지만 우리가 석권할 땅(경제적)은 얼마
든지 있다.
◈선사좌우(善事左右)◈
211
(임금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잘 섬기다)

"이것은 그대가 후한 뇌물로 내 좌우를 섬겨 칭찬을 구했기 때문이다."
이 날에 아대부와 그를 칭찬한 신하들을 삶아 죽이니 모든 신하가 깜짝 놀라 감히 꾸미거나 속이는 일이 없어져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왕(齊王)이 즉묵대부(卽墨大夫)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즉묵대부로 있으면서부터 직무수행을 잘 못한다는 말이 계속 들
렸으나, 내가 내사를 해보니 토지는 개간되고 백성은 풍족하며, 관리는 일이
없고 동쪽 방면이 편안했다. 이것은 그대가 내 좌우를 섬겨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는 높은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대부(阿大夫)를 불러,
"그대가 이를 지키면서부터 칭찬의 말이 계속 들렸다. 그러나 내사를 해
보니 토지는 묵어 백성은 가난하여 굶주리고, 조나라가 공격해도 막지 않았으
며, 위나라가 설능 땅을 취한 사실을 그대는 알지도 못했다."
라고 꾸짖고는 아대부와 그를 칭찬한 자를 삶아 죽였다.
여기서 제왕이 즉묵대부와 아대부에게 행한 일은 '선사좌우(善事左右)'에
대한 임금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번엔 신화된 입장에서 한 번 보
기로 하자.
진진이란 사람이 위왕(魏王)에게 귀염을 받자 혜자(蕙子)가 말했다.
"반드시 임금의 좌우에 있는 사람을 잘 섬기시오. 버드나무는 가로 심거
나, 거꾸로 심거나, 꺾어 심어도 잘 삽니다. 그러나 열 사람이 심어도 한 사
람이 뽑고 다니면 살 수 없습니다. 심기는 힘들어도 뽑기는 쉬운 것입니다.
그대가 비록 자신을 임금의 마음에 잘 심어도 뽑아 버리려는 자가 많으면 그
대는 반드시 멀리함을 받을 것입니다."
◈선즉제인(先則制人)◈
212
(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

"강서(江西)에서는 모두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역시 하늘이 진(秦)나라를 멸망시킬 때이다. 내가 듣건데 '먼저 하면 곧 사람을 제압하고 뒤지면 곧 사람에게 제압을 받는 바가 된다'고 한다. 나는 군대를 일으켜서 공과 환초(桓楚)를 장군으로 삼으려 한다."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항량은 초나라의 명장 항연의 아들로 병법에 매우 밝았다.
항량이 사람을 죽인 뒤 오나라에 있는 항우에게로 피해 있었는데, 오나라
의 사대부들은 모두 그를 대단한 인물로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큰 일이 있
을 때마다 언제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회계(會稽)의 태수 은통이 반란을 획책
하면서, 어느 날 항량을 불러 위와 같이 말했다.
그러자 병법에 밝은 항량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태수가 아시는 대로 환초는 이웃나라에 피신해 있는데,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항우이므로 그를 불러 데려오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청했다.
이에 은통은 항우를 불러오라 했다.
밖으로 나온 항량은 항우에게,
"태수 방으로 들어가 무조건 은통의 목을 치라."
라고 하였다.
이렇게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은통의 목을 침으로써 군수가 된 항량은 드
디어 8천의 군사를 손에 넣어 진나라에 봉기하는 기반을 잡기에 이르렀다.
◈성하지맹(城下之盟)◈
213
(굴욕적 항복이나 강화)

이리하여 그 계교를 따르자, 교(絞)의 사람들은 초(楚)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 날에는 교의 사람들이 다투어 나서서, 초나라의 인부들을 쫓아 산 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사람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교의 사람들은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춘추좌씨전」환공(桓公) 12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나라가 교(絞)로 쳐들어가 성남문에 진을 쳤을 때, 막오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가 말했다.
"교(絞)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으니, 청
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에게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그리고는 위와 같은 작전으로 교를 압도하고 성하지맹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적의 성 아래에서 강화의 맹세를 행하였으므로 초나라 군대에게는 압도적
인 승리였으나, 교(絞)로서는 굴욕적인 패배였다.
◈세세불철(世世不輟)◈
214
(대대로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기를,
"잘 세워 놓으면 뽑히지 않고 잘 안으면 빠져 달아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손들은 대대로 끊임없이 제사를 받들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는데 손숙오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여씨춘추」의 '맹동기(孟冬紀)에 있는 이야기이다.
초나라 장왕(莊王)은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 손숙오에게 땅을 주기로 했
는데, 손숙오는 한수(漢水)가의 모래자갈이 많은 땅을 자청하여 받았다.
초나라 법에 의하면 신하에게 녹으로 준 땅은 2대(二代)후에 회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손숙오가 받은 땅은 끝내 손숙오 집안에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땅은 너무 메마르기 때문에 아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므로 9대(九代)가 넘도록 대대로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한고조가 식읍(食邑)을 공신들에게 줄 때 소하에게 월등히 많이 주었다.
다른 신하들이, '우리는 몸으로 칼과 화살을 맞으며 많으면 백여 전, 적으
면 수십 합을 받았는데, 소하는 땀 흘리는 수고도 없이 우리보다 많이 받았으
니 불평등하다'고 하자 한고조가 말했다.
"그대들은 사냥을 아는가? 쫓아가 짐승을 죽이는 것은 개요. 이 개에게
지시를 하는 것은 사람이네. 그대들의 공이 개에 해당한다면 소하에게는 지
시한 공이 있네."
이 말을 들은 많은 공신들은 다시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하는 궁
벽한 곳에서 매우 검소하게 살면서,
"후세 사람이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것이요, 어질지 못해도 내 재
산이 보잘 것 없어 세력가에게 빼앗길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현상(賢相)이라는 제갈량도,
"신은 성도에 뽕나무 800주와 척박한 땅 15경이 있어 자식들의 의식은 걱
정이 없으므로, 군사(軍師)로 있는 동안 한 척을 땅도 더하지 않겠고 창고에
곡식이나 재물을 남겨 폐하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215
(흘러가는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원기 왕성한 나이는 거듭 오지 않고
하루에 두 번 새벽이 오기 어렵다
때에 이르러 마땅히 힘쓰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도연명의 '잡시(雜詩)'중의 일부로,
"인생은 뿌리가 없어 나부끼는 길 위의 티끌과 같다. 티끌이 나뉘어 흩어
져 바람을 따라 구르니 이것은 이미 떳떳한 몸이 아니다. 땅에 떨어져 형제
가 되어도, 어찌 반드시 골육의 친함이 있으랴! 기쁨을 얻어서 마땅히 즐거
움을 지으라. 한 말의 술이 이웃 사람들을 모은다."
라는 글에 이어서 계속되는 부분이다.
화살처럼 빨리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으며, 이미 지나간 시간을 돌
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매순간 자신이 목적하는 바나 이상을 위해 부지런히
힘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국과민(小國寡民)◈
216
(적은 나라 적은 백성.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국가를 말한다)

나라는 작고 백성이 적어서, 다른 사람의 열 배나 백 배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이사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갈 곳이 없고, 갑옷과 군대가 있어도 진 칠 곳이 없게 해야 한다.

「노자」80장에 나오는 말로서 이야기는 아래와 같이 계속된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옛날로 돌아가 새끼를 묶어서 문자로 사용하게 하
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하게 여
기고 그 풍속을 즐겁게 여기게 해야 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이 늙어 줄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47장에는 '문을 나가지 않고서 천하를 알고 창문을 엿보지 않고서 하
늘의 도리를 본다'고 되어 있고, 48장에는 '배움을 날로 더하면 도는 날로 줄
어든다. 줄고 또 줄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무위이고서야 하지 못함이
없게 된다'고 되어 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무위(無爲)와 무욕(無慾)을 강조하고
있는 노자가, 그의 이상 사회를 그려본 것이 바로 이 '소국과민(小國寡民)'이
다.
◈송양지인(宋襄之仁)◈
217
(쓸데없이 어진 체하다)

송양공이 제후의 패자가 되려고 초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진지를 구축하고 초나라는 구축하지 못했는데, 송나라 목이가,
"초군이 강을 건너 오기 전에 칩시다."
라며 제안했다.
그렇게 강을 건넌 후에 또다시 목이는,
"적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칩시다."
라며 권했으나 양공은,
"군자는 적이 곤할 때 치지 않는다."
라며 목이의 말을 듣지 않다가 초나라에 큰 패배를 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비웃으며 '송나라 양공의 어짐'이라고 했다.

제나라 환공의 부탁으로 아들 공자소를 제나라 임금으로 세우는데 공을
세운 송양공은 이를 계기로 패자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제환공이 그러하듯, 패자의 말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꺾어
야 했으므로 송양공은 초나라의 속국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초나라에
서 지원병을 보내 양 군대가 격전을 벌이게 되었고, 전세는 송나라가 열세였
다.
송양공에게 목이가 건의했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으므로 정면승부는 무리입니다."
적이 강을 건너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공격을 합시다."
송양공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그건 정정당당한 싸움이 될 수 없다. 정정당당히 싸워 이기지 않는다면
과연 참다운 패자가 될 수 있겠는가?"
초군이 강을 건너 진을 벌이고 있을 때 또다시,
"적이 진을 완비하기 전에 치면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라며 공격할 것을 권했으나 송양공은,
"군자는 사람이 어려울 때 괴롭히지 않는다."
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싸움은 송의 참패로 끝났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송양지인(宋
襄之仁)'이라며 비웃었다.
◈수서양단(首鼠兩端)◈
218
(쥐가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그대와 함께 대머리가 벗겨진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찌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

「사기」의 '위기무안후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 제 4대 경제부터 제 5대 무제에 걸쳐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은
계속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위기후는 제 3대 문제의 5촌 전분은 계속 세
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위기후는 제 3대 문제의 5촌이고, 무안후는 경제의
황후 동생으로 한실(漢室)로서는 관계가 깊은 사이였다.
그런데 위기후의 배경이던 두태후가 죽고 무안후의 배경인 왕태후가 등극
하게 되면서 위기후는 몰락하게 되었다.
어느 날 무안후가 새장가를 들고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무안
후는 위기후 쪽을 사람들에 대해 심한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것을 보다 못해 위기후의 친구인 용장 관부가 술김에 행패를 부리자, 무
안후는 그를 옥에 가두고 불경죄를 씌워 사형에 처하고 가족까지 몰살시키려
했다.
그러자 위기후는 관부를 두둔하여 무제에게 상소를 올림으로써 이 문제가
조정의 공론에 붙여지게 되었다.
무제가 신하들에게 옳은 의견을 묻자 어사 대부 한안국은,
"양쪽 모두가 일리가 있으므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말했으며, 내
사 정당시도 어물쩡 애매한 대답을 했다.
무제는 신하들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화가 나서 공론을 중지시켰고, 자리에
물러난 무안후는 어사대부를 불러 그의 애매한 태도를 책망했다.
어사대부는 그때야,
"제게 좋은 방안이 있습니다. 무안후께서 재상자리를 물러나 폐하에게 겸
손함과 죄송한 태도를 보이며 처분만을 기다린다고 말씀하신다면, 무제께서
당신이 덕이 있다고 칭찬하실 것이며, 위기후는 부끄러움에 자살을 할 것입니
다."
하고 말했다.
어사대부의 의견에 따른 결과 과연 무안후는 더욱 신임을 얻고, 위기후 일
파는 모조리 처벌을 받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무안후도 병을 얻어
죽고 말았는데, 죽기 직전 위기후와 관부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자기 한 몸을 보전하고자 하는 보신주의,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행동하
는 기회주의, 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부화뇌동주의 등이 바로
수서양단식 처신이라 할 수 있다.
◈수석침류(漱石枕流)◈
219
(돌로 이를 닦고 물로 베개 삼는다, 자기 말이 틀려도 지기 싫어 고집하다)

손초는 젊었을 때 속세를 떠나 산 속에 은거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친구인 왕제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던 가운데 '돌을 베개 삼아 놓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을 한다'라고 할 것을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로 베개 삼는다'라고 해버렸다.

「진서」의 '손초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나라에 손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재주가 탁월하고 문장이 뛰어났
으나 벼슬보다는 산림에 은거하기를 원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친구인 왕제에게 은거해서 '침석수류'하겠다고 한다
는 것이 그만 말이 빗나가 '수석침류'라고 해버렸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벨 수 있는가? 그리고 돌로 어떻게 양치질을 한단
말인가?"
왕제가 그 말을 듣고 따지자 손초는 재빨리 대답했다.
"흐름을 베개로 한다는 것은 허유와 같이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귀
를 씻으려는 것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으려는 것일세."
그 후부터 수석침류는 억지고집을 부리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
220
(물과 물고기의 관계, 매우 친밀한 관계)

"내가 제갈공명을 얻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삼국지」의 '제갈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조는 강북에 위나라를 세우고, 손권은 강동 땅에 세력을 얻어 오를 세웠
으나 유비만이 확실한 근거가 없는 때였다.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 같은 용장은 있었으나,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선비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대단했다.
제갈공명은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서, 형주와 익주를 눌러서 그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토벌해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부국강병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
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을 말하자, 유비는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갈공명에 대한 유비의 신뢰가 깊어지고, 두 사람의 교분이 날
이 갈수록 친밀해지자 관우와 장비 등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참여한 젊은 사람(제갈공명이 유비의 휘하로 들어온 것은 28세였다)
인 제갈공명만을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되는 줄로 생각했기 때
문이다.
이를 눈치 챈 유비는 '수어지교'라는 말로서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였다.
이후로 관우와 장비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제갈공명에게 협력하
면서 촉나라의 터를 닦아 나갔다.
◈수자부족여모( 子不足與謀)◈
221
(경험이 부족하고 자기주장만 옳게 여기는 사람과는 큰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범증은 잔을 받아 칼로 쳐 깨뜨리며 말했다.
"에잇, 어린 것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사람은 반드시 패공이다. 우리 무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사기」의 '항우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유방과 항우의 다툼 가운데서는 홍문연 잔치가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방의 군사는 10만, 항우는 40만으로, 군세로는 항우가 절대 우세였
다.
항우는 모사 범증의 건의에 따라 잔치를 이용해 패공을 죽이기로 했다.
이윽고 술자리가 마련되자, 범증은 약속대로 항우에게 세 번이나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패공의 겸손에 마음이 바뀐 항우는 그 신호를 못 본 척했다.
조급해진 범증은 항장을 시켜 칼춤을 추다가 패공을 쳐죽이라고 시키나
이것도 같은 편인 항백이 가로막아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때 번쾌가 장양의 부탁을 받고 항우와 술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패공은 짐짓 변소에 가는 척하며 도망쳤다.
패공은 도중에 자리를 뜨게 된 것을 장양을 통해 항우에게 사과를 한 후,
항우에게는 구슬 한 쌍을, 범증에게는 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을 선물하였다.
항우는 만족해 하며 구슬을 받았으나, 범증은 잔을 깨뜨리며 어린아이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수주대토(守株待兎)◈
222
(나무 그루터기와 토끼가 부딪치기를 기다린다)

송나라 때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그루터기에 몸을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는 토끼를 잡는 쪽이 더 수지가 맞겠다는 생각에 농사일을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한비자」의 '오두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보면,
"한나라 왕조 시대에 나무를 비비어 불을 내는 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곤
이나 우임금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은나라나 주나라 시대에 도랑을
터서 물을 빼는 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탕임금이나 무왕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도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무왕의 도를 합당한
것이라 찬미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새로운 성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옛 일을 본받을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언제나
통용되는 것을 법도로 삼지 않는다. 세상 일을 따져서 그것을 근거로 삼아
대비를 한다."
라는 말이 나와 있다.
한비자는 요순을 이상으로 하는 왕도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시대의 변천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며, 복
고주의는 진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낡은 관습을 지
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 또는 사람을 '수주대토'에 비유하
였다.
사실 왕도정치 실현을 복고주의자로만 생각할 수 없다. 르네상스가 복고
주의에서 출발했으나 문예부흥으로 이어지듯, 요순의 이상정치를 실현한 노나
라에 공자가 있자 3개월 만에 도불습유의 경지가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즉다욕(壽則多辱)◈
223
(사람이 오래 살면 욕됨이 없다)

요임금이 말했다.
"아들이 많으면 두려움이 많고, 부유하면 일이 많고, 오래 살면 욕됨이 많다. 이 세 가지는 나의 덕을 기르는 까닭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양하는 것이다."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대동기문」에 보면 판중추 벼슬을 지낸 민대생이라는 사람은 90살 생일
에 조카가 와서, '100세까지 사십시오'라고 하자 '저렇게 입에 박힌 사람은 쫓
아내라'고 한다. 다음 조카가 '100세를 사시고 또 100세를 사십시오'라고 하
니까, '이것이 진짜 축수다'라고 하면서 그 조카는 잘 대접해 보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천자인 요가 화산의 땅을 보러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화산의 국경을 지키는 하급관리가,
"성인으로 하여금 장수하게 하소서."
하고 말하자 요임금이 대답했다.
"사양하겠소."
"성인으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소서."
요임금이 다시 대답했다.
"사양하겠소."
"그러면 성인으로 하여금 아들을 많이 두게 하소서."
요임금이 또다시 말했다.
"그것도 사양하겠소."
이에 그 하급관리가 물었다.
"장수가 부하고 아들이 많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온데, 성인께
서는 어찌 바라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한 요임금의 대답이 바로 위의 내용이다.
요임금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노장사상처럼 인위가 아닌 자연의 원리에 따라 자유로운 경지에서 산다는
것도 요즈음 같은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이상이다.
자신에게 알맞는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허욕을 부리지 않으며,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산다면 '수즉다욕'이란 말은 무색해질 것이다.
◈수청무어(水淸無魚)◈
224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 사람이 너무 살피면 동지가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 사람에 이르러서는 너무 살피면 동지가 없다."

「전한서」의 '동방삭전'에 나오는 말이다.
위의 말에 이어서 '면류관을 앞으로 쓰는 것은 밝음을 가리기 위한 까닭이
다. 밝음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고, 총명함도 듣지 못하는 곳에 있다. 큰 덕
을 들어서 작은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완벽하게 갖추어짐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는 반초가 벼슬을 그만둘 때,
"그대의 성격은 엄격하고 급하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으니, 마땅히 간
단하고 쉽게 하라."
라며 후임으로 온 임상에게 경계의 말을 해준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임상은 그 성격을 고치지 못했고, 반초의 걱정대로 서역의 평화를
잃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225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괵나라는 우나라의 표면입니다. 망하면 우나라도 반드시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진나라를 인도해서는 안됩니다. 도적은 가지고 놀아서는 안됩니다. 전의 한 번으로도 너무나 심한데 그것을 두 번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속담에 소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바퀴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망하면 이가 차진다'고 한 것은 곧 우리나라와 괵나라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춘추좌씨전(희공 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초기 진헌공은 괵나라를 치려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나라
의 길을 통과해야 했다. 진헌공은 사신을 보내 명마와 구슬 등의 예물과 함
께 형제의 우의를 거짓 약속하면서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 줄 것을 간청하였
다.
우왕은 순순히 청을 받아들였으나 진나라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는 궁지
기라는 충신은, 괵나라와 우나라 사이를 '순망치한'에 비유하면서 극력 반대했
따.
그러나 사신의 감언이설과 뇌물에 마음이 빼앗긴 우임금에게는 궁지기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궁지기는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후환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다른 나라고
떠나 버렸다. 그때 그는,
"우나라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다.
과연 진나라는 괵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해 버렸다. 미
끼로 던져 주었던 명마와 구슬도 국토와 함께 도로 진나라 것이 되었다.
◈시위소찬(尸位素餐)◈
226
(높은 자리에서 하는 일 없이 녹만 먹는 사람)

오늘날 조정대신들이 위로는 임금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아래로 백성들을 유익하게 못하니 다 공적 없이 녹만 받는 시위소찬자들이다.

「한서」의 '주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위(尸位)'의 시(尸)는 시동을 말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혈통을 이은 어린아이를 조상의 신위에 앉혀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때 신위에 앉아 있는 아이가 시동이다.
영혼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접신하여 그 아이의 입을 통해 마
음껏 먹고 마시게 하려는 원시적인 신앙에서 생겨난 관습이었던 것 같다.
'시위'는 그 시동이 앉아 있는 자리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남이 만들어 놓은 높은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가
리켜 시위라고 한다.
'소찬'은 맛없는 반찬이란 뜻으로 공으로 먹는 것을 뜻한다. 나라나 단체
나 한 세력이 오랫동안 주권을 장악하게 되면 자연히 '시위소찬'의 현상이 나
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부패의 요인이 되고 멸망의 계기가 된다.
◈생기사귀(生寄死歸)◈
208
(인간의 육신의 삶은 나그네처럼, 죽음은 어디론가 돌아가는 것이다)

우임금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나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힘을 다하여 백성을 위해 수고하였다. 삶은 붙여 사는 것이오.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다.

「사략」권일(卷一)에 나오는 말이다.
우임금이 강을 건널 때, 갑자기 황룡이 나타나 배를 등에 지고 물 위로 올
리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
그 때 우임금이 '생기사귀'라는 말과 함께 황룡을 보기를 도마뱀 정도로
보며 안색을 태연히 하자, 황룡이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낮추더니 그대로 떠
나가 버렸다고 한다.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대개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이 와서 묵어 가는 여관과 같은 것이고, 세월이
란 것은 끝없이 뒤를 이어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역려(逆旅)의 역(逆)은 '맞이한다'이므로 '나그네를 맞이한다'는 뜻이
되고,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은 공간을 말한다.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이 나
타났다 사라졌다 하므로 그것은 마치 나그네가 와서 묵어 가는 것과 마찬가
지다.

애굽에는 스핑크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스핑크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 발로 다니고, 낮에는 두 발로 다니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다
니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서 '사람'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살리고, 그 대답을 못한 사람은 죽였
다고 한다. 인간의 삶이 짧음을 알게 하기 위해 아침, 낮, 저녁으로 말을 했
는데 그것을 모르는 자는 생을 낭비할 것이니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다.
◈시자조슬(視子蚤 )◈
227
(큰 인물을 본 후 작은 인물을 보면 벼룩이나 이처럼 보인다)

재상이 말하기를,
"내가 공자를 뵌 뒤에 당신을 보니 당신은 마치 벼룩이나 이처럼 잘게 보이오.

「한비자」의 '설림상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대부 자어가, 공자와 송나라 태재가 만나도록 주선했따.
공자가 태재를 만나고 돌아간 뒤 자어가 들어가서,
"공자를 만나니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태재가 바로 위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자어는 공자가 임금에게 존중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재상에게
말했다.
"임금님께서 공자를 뵙고 나시면 역시 임금님이 재상을 볼 적에 벼룩이나
이처럼 보실 것입니다."
재상은 그 말을 듣고서 공자를 임금을 뵙도록 알선하지 않았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등용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릴까 염려하여,
국가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훌륭한 인물을 초야에 묻히게 하는 행위를
'시자조슬'이라고 하기도 한다.
◈식소사번(食少事煩)◈
228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이 하다, 생기는 것도 없이 바쁘다)

그러자 사마의는,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로우니 어떻게 오래 지탱할 수 있겠소."
하고 진담 반 농담 반을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갈량이 두 번째 출사표를 내고 비장한 각오로 힘겨운 위나라 공략을 시
작해서 사마의와 속전속결하려고 하였으나, 제갈량에게 몇 차례 혼이 난 사마
의는 지구전으로 제갈량이 지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대치하고 있
는 가운데 사자들만 자주 오고 갔다.
언젠가 사마의가 촉의 사자에게,
"공명은 하루 식사와 일 처리를 어떻게 하시오?"
하고 묻자 사자는,
"음식은 아주 적게 들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일을 처리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마의는 윗 글처럼,
"식소사번하면 오래 살 수 없지 않느냐."
고 말한다.
사자로부터 사마의와의 대화를 보고 받은 제갈량은,
"사마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 살 것 같지 않다."
고 하였다.
결국 제갈량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식언(食言)◈
229
(말을 번복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

"그대들은 바라건데 나 한사람을 도와 하늘의 벌을 이루도록 하라. 나는 그대들에게 큰 상을 주리라. 그대들은 믿지 않음이 없게 하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맹세하는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곧 그대들을 죽여, 용서하는 바가 없으리라."

「서경」의 '탕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의 포악무도함을 보다 못하여 정벌할 군대를
일으켰을 때, 백성들에게 자신을 도와 걸왕을 치면 상을 주겠다고 하며 자신
은 식언을 하지 않는다고 다짐한다.
또 식언이란 말은「춘추좌씨전」에도 몇 군데 나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는 것은 노나라 애공이 월나라로 부터 돌아왔을 때(B.C. 470), 계강자와
맹무백이란 두 대신이 오오란 곳까지 마중을 나와 그곳에서 축하연을 베풀었
을 때의 이야기이다.
술좌석에서 맹무백이 곽중을 놀리며,
"몸이 꽤 뚱뚱하다."
라고 했다.
그러자 애공은 맹무백의 말을 받아,
"이 사람은 말을 많이 먹으니까 살이 찔 수밖에 없지."
하고 농담을 던졌다.
앞서 곽중이 애공에게 '두 대신이 임금의 험담을 하고 있다'고 귀뜸해 준
일이 있었으므로, 애공이 두 대신을 꼬집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식지동(食指動)◈
230
(음식이나 사물에 대한 욕심, 또는 야심을 품는 것)

초나라 사람이 큰 자라를 정나라 영공에게 바쳤다. 그리고 송(자는 자송)과 자가가 함께 들어와 배알하려 할 때 자송의 둘째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송은 자가에게 그 손가락을 보이면서 말했다.
"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별식을 맛보았다."

「춘추좌씨전」의 선공4년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나라 사람이 정영공에게 큰 자라를 바쳤다. 영공은 그 자라로 죽을 끓
여 신하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었다.
자가와 함께 조회에 들어가던 송의 둘째 손가락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러
자 송은 자가에게 위와 같이 말을 했다.
조회에 들어간 두 사람은 한쪽 모퉁이에서 요리사가 죽을 끓이는 모습을
보고 서로 웃었다. 손가락 움직이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영공은 그들에게 웃는 까닭을 물었다.
자가가 그 내용을 말하자,
"아무리 손가락이 움직여도 과인이 주어야 먹지."
라고 말하고는, 송을 제외한 다른 대신들 모두에게 죽을 나누어 주었다.
큰 모욕감에 화가 난 송은 솥으로 달려가 고기를 한 점 집어먹고,
"이렇게 먹었는데 내 예측이 맞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고는 퇴청했다.
이 불손한 태도를 본 영공은 송을 죽일 생각을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송
이 자가를 협박하여 그해 여름 영공을 죽이고 말았다.
이후로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은 사물을 구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야
심을 품는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실언실인(失言失人)◈
231
(헛된 말로 말을 잃어버리고 터놓고 말을 하지 않아 사람을 잃는다)

함께 말할 만한데 함께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을 잃는 것이다. 함께 말할 만하지 못한데 함께 말을 하면 그것은 말을 잃는 것이다. 지자(知者)는 사람을 잃지도 않고, 또 말을 잃지도 않는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실언하기 쉽다. 또 예의에 어긋나거
나 독선에 빠져도 실언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실언은 사람에 따라 그 표준과 정도가 각각 다르다고 볼 수 있
다. 우리가 스스로 실언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 남이 볼 때는 실언이 될 수
있고, 실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남이 볼 때 실언이 아닐 수도 있다. 각 개
인의 개성, 생활관, 인생관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한비자는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말이 순조롭고 번드레하며 멋지고 조리가 있으면 곧 겉만 그럴싸하고 실
속은 없다고 받아들여지기 쉽다. 착실하고 공경스러우며 딱딱하고 신중하면
곧 졸렬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받아들여지기 쉽다. 말이 많고 얘기가 거
듭되며 예를 들고 다른 사물에 비유를 하면 곧 헛되고 쓸데가 없다고 받아들
여지기 쉽다. 미세한 것을 아울러 간략하고 얘기하며 곧이곧대로 표현하여
꾸밈이 없다면 곧 더듬고 말할 줄 모른다고 받아들여지기 쉽다. 서두르며 친
근히 얘기하고 감정을 탐지하려는 듯하면 곧 외람되고 사양함이 없다고 받아
들여지기 쉽다. 거대하고 넓으며 아득히 멀어 헤아릴 수도 없는 말을 하면
곧 과장되어 쓸 곳 없다고 받아들여지기 쉽다. 집안 얘기나 자질구레한 얘기
를 여러 가지로 자주 말하면 곧 비루(卑陋)하다고 받아들여지기 쉽다."
한편 공자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아까운 사람을 놓치게 되고, 말을 함으로써 공연한
헛소리를 한 결과가 되는 일이 없어야만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라고 하였는데,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말하는 것 못지 않게 사람을 다루는 일 역시 중요한 작용을 한다. 득인을
하느냐 실인을 하느냐, 큰 인물을 두고도 쓰느냐 한 쓰느냐에 따라 역사의 행
로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득인을 한 유방은 천자가 되고, 실인을 한 항우는 서른한 살에 불귀의 객
이 된 일, 공자나 맹자를 존경만 할 뿐 그들을 등용하지 않았던 제후들이 패
자나 천자의 길을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황석공은,
"현인을 쓰고 맡기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는다."
라는 말로써 실인에 대한 경고를 하였다.
◈심원의마(心猿意馬)◈
232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생각이 한 곳에 있지 못하다)

마음의 원숭이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생각의 말은 사방으로 달리며, 신기는 밖으로 어지럽게 흩어진다.

당나라의 석두대사는 선의 이치를 말한 '참동계' 주석에서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사람이 번뇌로 인해 잠시도 마음과 생각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을 원숭
이와 말에 비유한 것이다.
'심원의마'란 말은 후에는 불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마음과 생
각이 흩어져 안정되지 못함을 지칭하게 되었다.
왕양명은 심원의마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 배울 때는 마음이 원숭이 같고 생각이 말과 같아 붙들어 매어 안정
시킬 수 없다."
학문의 첫 목적이 지식에 있지 않고 마음의 안정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같이 말했지만, 오늘날엔 공부에 전력하지 못한 채 심원의마 속에서 고통받
는 사람을 뜻한다.
◈십년마일검(十年磨一劍)◈
233
(목적을 가지고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다)

십년을 한 칼로 갈아, 서릿발 같은 칼날은 시험해 보지도 않았네.
오늘 그것을 당신에게 드리노니, 누가 바르지 못한 일을 할 수 있으랴?

가도의 '검객'이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십년마일검'은 10년을 두고 칼 한 자루를 간다는 뜻으로, 원래는 불의를
무찔러 없애기 위한 원대한 계획과 결심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으나, 지금은
어떤 목적을 위해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
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
을 때, '10년을 칼을 갈고 있는 중일세'하고 대답하면, 계획 정도가 아니라 시
기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 된다.
'검객'이란 시에 대한「고문진보」의 해설에는 '십년 동안 칼을 갈았다는
것은 오랫동안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을 쌓았음에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쌓
은 학문을 가지고 일단 조정에 나가 일하게 되면 아무도 비뚤어진 일을 못하
도록 정치를 올바로 해나가겠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십목소시(十目所視)◈
234
(무수한 사람들이 지켜본다, 숨길 수 없다)

증자가 말했다.
"열 사람의 눈으로 보며, 열 사람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그 엄할진저."

「대학」의 '성의장'에 나오는 말이다.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라는
말은 보통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이 지켜보고 손가락질한다'는 뜻이다.
강회장의「사서백화」에서는 증자의 이 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십목(十目)은 열 눈이 아닌 십방(十方)의 모든 시선을 말한다. 사람이 무
심중에 하는 동작은 주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에서 일어나
는 파동은 하느님을 비롯한 모든 천지신명과 도를 통한 사람에게 그대로 전
달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심통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홀로 있을 때의
생각만큼 가장 널리 알려지는 것은 없다. 증자의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닌,
근거에 의한 말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어찌 남이 안 본다고 나
쁜 짓과 나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천지신명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 우
리가 하는 일을 하나 하나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심령과학자들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은 영파로 움직인다. 그것은 전파의 속력과 같으며, 신명은
이것을 통해 삽시간에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알게 된다."
의학자들은 사람이 활동하면 뇌파가 발산된다고 하는데, 다음은 그 뇌파와
관련된 일화이다.
어느 날, 조선조 세조가 병환으로 요양차 강원도의 어느 절에 들르게 되었
다. 불공을 드리기 위해 대웅전에 들어서려는데, 머리가 쭈뼛쭈뼛하였다. 기
이한 생각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잠깐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옷깃을 물고 잡아당겼다.
그 즉시 세조는 수행시위에게 대웅전을 수색케 했다. 그 결과 대웅전에
미리 숨어들어 있던 자객을 찾아내었고, 고양이에게 고마움을 느낀 세조는 그
절에 묘답 500마지기를 시주하였다.
여기서 '쭈뼛함'이라 '뇌파작용'이라 할 수 있다.
악한 소인배들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갖은 못된 짓을 하면서, 착한
사람 앞에서는 악마의 웃음을 웃으며 악한 짓을 숨기고 착한 것을 내보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것이 자기가 자기 마음 들여다보는 것 같이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유가에서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가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한다.
◈아도물(阿堵物)◈
235
(돈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 돈 대신 사용한 말)

왕이보는 본래 현묘하고 먼 것을 숭상하고, 항상 그 아내의 탐욕을 미워하여 일찍이 돈이라는 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내는 이것을 시험해 보기로 하여, 노비로 하여금 돈으로써 침상을 에워싸 움직일 수가 없게 하였다. 왕이보가 아침에 일어나서 돈이 앞을 가로 막는 것을 보고는 노비를 불러 말하였다.
"이 물건을 모두 치우도록 하라."

「세설신어」의 '규잠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왕연은 서진 말기 귀족 사회에 유행하던 청담(淸談, 명리를 떠난 맑고 고
상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다.
죽림칠현의 우두머리였던 산도가 어린시절의 왕연을 보고 '도대체 어떤 집
안에서 이렇게 훌륭한 소년이 태어났을까? 혹시 훗날 이 사람이 천하의 백성
들을 그르치지는 않을까?"하면서 한숨 섞인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왕연은 태위(군정장관)의 직위까지 올랐었는데, 그는 국사보다 후진들을 모
아 청담을 나누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서진 말기의 관료사회에서는 청담이 입신출세의 실마리가 되었으므로, 그
의 문전에 젊은이들이 모여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청담에 심취해 있을 때, 서진 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시
시각각으로 엄격함을 더해 가고 있었다.
당시 서진의 가장 큰 위협은 산서(山西)에 할거한 흉노족이었는데, 왕연 등
서진의 지도자층은 그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위협에 대한 초조함을
청담이라는 지적인 놀이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 결과 흉노족에게 나라는 망하고 왕연은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왕연은 나라가 망하는 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담에서 사는 보람을 찾
는 풍류인이었던 만큼 돈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을 속된 무리라고 싫어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곽씨는 이와는 반대로 돈과 권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노비에게 명하여 왕연의 침대 주위에 돈을
가득 놓아두게 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왕연은 침상이 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노
비를 불러 명령했다.
"이 물건을 모두 치워라."
◈안중지정(眼中之釘)◈
236
(눈에 못이 박힌 것처럼 괴로운 존재)

"눈의 못을 빼려거든 1천 전을 내라. 그러면 내가 깨끗이 떠나주마."

「오대사보(五代史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재례는 백성에게 긁어 모은 돈으로 권력자를 매수하여 후양, 후당, 후진
삼대에 걸쳐 각지의 절도사를 역임한 간악하고 눈치빠른 사람이었다.
송주에서 가렴주구를 행하던 그가 영흥 절도사로 옮겨 가게 되었다.
송주 백성들은 기뻐서,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
라며 서로를 위로하고 춤을 추었다.
이 소문을 들은 조재례는 앙갚음으로 1년 만 더 송주에 있겠다며 조정에
뇌물을 바쳤다. 그리고 다시 송주로 파견된 조재례는 주민들에게 집집마다 1
년 안에 돈 1천 전씩을 '발정전'이란 명목으로 바치게 하면서 위와 같이 선포
했다. 이리하여 그는 1년 동안에 백만 관(1관은 천 전)의 돈을 거둬들였다.
우리 나라의 야사에도 탐관오리 목민관들이 선비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내 꼴을 보기 싫으면 더 큰 고을로 가도록 민의로 상소를 하라."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것이 조재례로부터 유래한 안중지정을 찾
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암중모색(暗中摸索)◈
237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아 찾는다, 확실히 모르는 채 어림으로 맞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야 기억하는 것이 어렵지만 하손, 유효작, 심약 같은 문단의 대가들이야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듯 기억할 수 있소."

「수당가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3대 고종이 황후인 왕씨를 폐하고 무씨를 황후로 맞이하려 할 때,
왕씨의 지지세력을 압도한 무씨 옹립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허경종이라는 사
람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조에 벼슬을 하였으며, 문장의 명수로서 후에 재상
이 되었으나, 성격이 경솔하여 사람을 만나도 대체로 그 얼굴을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허경종을 만나서,
"학문은 깊은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혹시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허경종은 그때 위와 같이 대답을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암중모색의 뜻은 그 원뜻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최초에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물건을 찾는다'에서 '손붙일 곳이 없
는 사물을 찾아 구한다'로 변했으며, 지금은 '상대가 눈치채지 않게 조사하다'
로 변하고 말았다.
◈앙급지어(殃及池魚)◈
238
(재앙이 못의 고기에 미치다, 재난이 뜻하지 않는 곳에 미치다)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연못의 물을 다 퍼내고 보니 보주는 없고, 연못의 물고기만 죽게 되었다고 한다.

「여씨춘추」의 '필기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송나라 사마환이 훌륭한 보주(寶珠)를 가지고 있었는데, 죄를 짓
자 재빨리 그 보주를 가지고 도망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간신히 그를 찾아내어 보주의 숨긴 곳을 물었다.
"내가 도망칠 때 연못 속에 던져 버렸소."
그 말을 듣고 왕은 위의 글과 같이하여 물고기만 죽게 하였다.

춘추시대 초나라 성문이 불에 타고 있었다. 이 때 성문 바로 옆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연못의 물을 퍼내어 성문의 불을 끄게 되었다.
그 결과 연못의 물고기가 모두 죽어 버렸다.
또한 춘주시대 초나라 왕궁에서 기르고 있던 원숭이가 도망쳤다. 그 원숭
이를 잡기 위해 원숭이가 도망쳐 들어간 숲의 나무와 가지를 모두 잘라 버려
숲이 사라져 버렸다.
◈양두구육(羊頭狗肉)◈
239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 선전이 실제 내용과 다르다)

"임금께서는 궁중에서 미인에게 남장하는 것을 용서하면서도 궁중 밖에서는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 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공중에서는 미인에게 남장시키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궁중에서 금한다면 궁중 밖에서도 감히 남장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향언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두구육'에 관한 해석은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무문관」에
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말고기를 판다."
라고 실려있고「안주춘추」에는,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안에서 말고기를 판다."
라고 실려 있으며「설원」에는,
"소의 뼈를 걸어놓고 말고기를 안에서 판다."
라고 실려 있다.
「안주춘추」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제영공은 남장여인 보기를 즐기는
괴벽이 있었다. 이 습성은 일반 민간에도 퍼져 남장을 하는 여인이 나라 안
도처에 생겨났다.
이 소문을 듣고 영공은 궁중 밖에서 여자들이 남장하는 것을 왕명으로 금
지시켰다. 그러나 제대로 시행이 안 되자 그 이유를 안자에게 물었다.
이 때 안자가 위와 같이 대답을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궁중에서도
여자가 남장하는 것을 금하였더니 한 달이 못되어 온 나라안의 남장여인이
없어졌다.
◈양상군자(梁上君子)◈
240
(도둑을 일컫는 말, 천장의 쥐를 말할 때도 있다)

"모름지기 사람은 스스로 힘써야만 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반드시 본래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평소에 뒤틀린 습관이 성격이 되어 드디어 악으로 내달리게 된다. 여기에 있는 이 '양상군자'도 이와 같은 사람이다."

「후한서」의 '진식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 말기 태구현의 장관으로 진식이 부임해 왔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요, 공정하고 관대하며 거만하지 않은 성품으로, 청렴하고 백성의 괴로움
을 덜어주는 현정을 펴서 현의 사람들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에 심한 흉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생활고
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도둑이 진식의 방에 들어와 대들
보 위에 숨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던 진식은, 이윽고 위엄을 갖추고 아들과 손자를 불
러들인 위와 같은 내용으로 그들을 훈계하였다.
도둑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스스로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마
루에 비비며 그 죄를 자백했다.
진식은 도둑에게 다음과 같이 깨우쳐 주었다.
"너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다. 깊이 반성하여 사사로
운 마음을 이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와 같
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리라."
이리하여 그 도둑은 비단 두 필을 바치고 용서를 받았으며, 이 일이 알려
지자 태구현에는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 뒤 어느 해학자가 쥐를 가리켜 '양상군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241
(좋은 약은 쓰다, 좋은 말은 듣기 싫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은나라 탕왕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공자가어」의 '육본편',「사기」의 '유후세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가어」에 보면 공자는 위의 내용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간
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들이 간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
르면 동생이 간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친구가 간해야 한다. 이
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란의 악행이 없
고, 부자와 형제간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또「사기」에 보면 장량이 유방에게 위의 말을 인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유방과 항우가 진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였는데, 운
좋게 유방이 진의 수도에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진왕의 항복을 받고 아방궁에 들어간 유방은 많은 보화와 재보에 아름다
운 미녀들로 가득 찬 화려한 궁전을 보자, 본래 술과 여자를 좋아했던 그는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번쾌가 어서 떠나자고 했으나 유방이 듣지 않자 장량이 유방에게,
"우리가 궁전에 들어온 이유는 진나라의 폭정으로 인해 들끓는 인심을 가
라앉히는 데 있습니다. 진나라 수도에 진격하자마자 향락에 빠진다면 도탄에
빠진 백성은 누가 구하고, 걸주의 전철을 밟으면 되겠습니까. '충언은 귀에
거슬려도 행실에 이롭고 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고 했습니다. 부디
번쾌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유방은 지체없이 궁궐을 나와 패수에 진을 쳤다고 한다.
◈양포지구(楊布之狗)◈
242
(변한 겉모습을 보고 속까지 변했다고 판단하다)

"너는 개를 때리지 말라. 너 역시 이와 같을 것이야. 먼저는 너의 개가 흰 옷을 입고 가고서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오면, 너 역시 어찌 능히 괴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한비자」의 '설림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주는 전국시대 중엽의 사상가로 묵자와 대조적인 사상을 주창하였다.
묵자는 겸애를 주장했고 양주는 극단적 이기주의였는데, 맹자가 이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주는 자기만을 위하니 아비가 없고, 묵자는 똑같이 사랑하니 임금이 없
다.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으면, 이는 곧 새,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양주의 아우 양포가 아침에 나갈 때 흰 옷을 입고 나갔었는데, 돌아올 때
는 비가 온다는 이유로 흰 옷을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왔다. 그러자 집
에서 기르고 있던 개가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댔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하자 형 양주가 그
것을 보고 위와 같이 말을 했다.
◈엄이도령(掩耳盜鈴)◈
243
(자신이 듣지 않는다고 남도 듣지 않는 줄 알다)

"우리 임금은 밝으신 임금입니다. 옛말에 임금이 어질어야 신하가 바른 말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방금 임좌가 바른 말하는 것을 보아 임금께서 밝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씨춘추」의 '불구론'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래는 귀를 가리고 종을 훔친다는 '엄이도종'이었는데 뒤에 종 대신 방울
이란 글자를 쓰게 되었다.
진나라의 명문가 범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큰 종이 있었다. 그런데
범씨 집안이 몰락하여 집안이 어수선하자 도둑이 들어 그 종을 훔치려 하였
다. 그러나 너무 무거워 종 째 옮길 수 없자 조각을 내어 가져가기로 하고
망치로 종을 내리쳤다. 그러자 꽝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는데, 이 사람은 그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들을까 겁이 나서 얼른 자기 귀를 막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임금이 바른 말하는 신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비유로 들
고 있다.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듣지 않는다고 남도 모르는 줄 아는 것은 귀
를 가리고 종을 깨뜨리는 도둑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란 것을 말하기 위해
서였다.
남이 들을까 겁이 나면 자기가 먼저 듣고 그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바른 말하는 신하는 임금의 가린 귀를 열어주는 사람이므로
소중히 해야 한다.
「여씨춘추」에는 위문후 이야기를 예로 든다.
위문후가 신하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자기에 대한 견해를 기탄 없이
들려 달라고 차례로 물어나갔다. 그러자 한결같이 임금의 잘한 점만을 들어
칭찬을 했다. 그러나 임좌의 차례가 되자 그는 임금의 숨은 약점을 들어 이
렇게 말했다.
"임금께서는 중산을 멸한 뒤에, 아우를 그곳에 봉하지 않으시고 태자를 그
곳에 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임좌의 차례가 되자 그는 임금의 숨은 약점을
들어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는 중산을 멸한 뒤에, 아우를 그곳에 봉하지 않으시고 태자를 그
곳에 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임금인 줄로 아옵니다."
문후는 무심중 얼굴을 붉히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임좌는 문후
를 다시는 안 볼 듯이 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음에 유명한 적황이 말할 차례가 되자 그는 위와 같은 말을 했다.
문후는 곧 자기 태도를 반성하고 급히 임좌를 부르게 한 후, 몸소 뜰 아래
까지 나가 그를 맞아 올린 다음 상좌에 앉게 했다고 한다.
◈여도지죄(餘桃之罪)◈
244
(사랑할 때는 허물이 아니던 일도 사랑이 식으면 죄가 된다)

이윽고 미자하의 아름다움이 쇠하여짐에 따라 총애가 엷어져서, 드디어 그는 임금에게 죄를 얻었다. 위나라 임금은 말하였다.
"이 사람은 본디 거짓말을 하고 나의 수레를 탔으며, 일찍이 나에게 제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일이 있다."

「한비자」의 '설난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나라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미자하는 한밤중에 어머니의 병환 소식
을 전해 듣고는 허락을 얻었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
다.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타면 다리는 자르는 것이 법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를 총애하고 있던 위나라 임금은,
"효녀로다! 어머니를 위하는 까닭으로 다리 잘리는 죄를 지었도다."
라며 무마해 주었다.
또 어느 날 미자하는 임금과 과수원에서 놀았는데, 복숭아를 먹다가 맛이
달았으므로 그것을 다 먹지 않고서 그 반쪽을 임금에게 먹게 했다.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의 입맛을 잊고서 나에게 먹여 주는
도다!"
그러나 총애가 식자 과거에 칭찬했던 일들이 모두 죄가 되어 버렸다.
미자하의 행동은 처음과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먼저는 덕행이라면서 칭
찬하고, 나중에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다.
◈역자교지(易子敎之)◈
246
(자식을 서로 바꾸어 가르치다)

진항이 백어에게,
"너는 선생님(공자)께 특별히 들은 말이 있느냐? 시를 배웠느냐? 예를 배웠느냐?"
하고 묻자 백어가,
"시를 배웠고 예를 배웠을 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진항이 물러나와 기뻐하며,
"하나를 묻고 셋을 얻었도다. 시를 듣고, 예를 듣고 또 군자는 자식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다."
라고 말했다.

「맹자」의 '이루상(離婁上)',「논어」의 '계시편'에 나온다.
「맹자」의 '이루상'에 보면 맹자와 제자 공손추하와의 사이에 다음과 같
은 문답이 행해지고 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입니까?"
하고 공손추가 물었다.
위의 내용처럼 공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
서 공손추는 그 이유를 스승 맹자에게 물은 것이었다.
맹자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형편이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
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자연 노여움이 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부자간의 정리를 상하게 된다. 자식이 속으로 생각하기
를, 아버지는 내게 바른 일을 하라고 가르치지만 아버지도 역시 바르게는 못
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부자가 다같이 정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옛날 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부자 사이에는 잘못한다고
책하지 않는 법이다. 잘못한다고 책하게 되면 서로 정리가 멀어지게 된다.
정리가 멀어지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역자교지(易子敎之)◈
246
(자식을 서로 바꾸어 가르치다)

진항이 백어에게,
"너는 선생님(공자)께 특별히 들은 말이 있느냐? 시를 배웠느냐? 예를 배웠느냐?"
하고 묻자 백어가,
"시를 배웠고 예를 배웠을 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진항이 물러나와 기뻐하며,
"하나를 묻고 셋을 얻었도다. 시를 듣고, 예를 듣고 또 군자는 자식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다."
라고 말했다.

「맹자」의 '이루상(離婁上)',「논어」의 '계시편'에 나온다.
「맹자」의 '이루상'에 보면 맹자와 제자 공손추하와의 사이에 다음과 같
은 문답이 행해지고 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입니까?"
하고 공손추가 물었다.
위의 내용처럼 공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
서 공손추는 그 이유를 스승 맹자에게 물은 것이었다.
맹자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형편이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
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자연 노여움이 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부자간의 정리를 상하게 된다. 자식이 속으로 생각하기
를, 아버지는 내게 바른 일을 하라고 가르치지만 아버지도 역시 바르게는 못
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부자가 다같이 정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옛날 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부자 사이에는 잘못한다고
책하지 않는 법이다. 잘못한다고 책하게 되면 서로 정리가 멀어지게 된다.
정리가 멀어지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역자이식(易子而食)◈
247
(식량이 없어 아들을 바꾸어 삶아 먹다)

송세가에는,
"뼈를 쪼개어 밥을 짓고 자식을 바꾸어 먹었다."
는 말이 나와 있다.

「춘추좌씨전」선공 15년의 기록에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가 초나라에게 포위를 당해 다섯 달을 계속 버티던
끝에, 나중에는 식량도 떨어지고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자식을 바꾸
어 먹고 뼈를 쪼개어 밥을 지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동주열굴지」에 보면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이싿.
우사 환원은 마지막 수단으로 술책을 써서, 밤에 초나라 대장 공자측이 자
는 방으로 들어가 칼을 겨누며 포위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 때 공자측이 송나라 성 안의 상황을 물으니 환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을 바꾸어 먹고 뼈를 주워서 밥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자 공자측은 놀라 물었다.
"병법에 허하면 실한 체하고, 실하면 허한 체한다 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실정대로 말하십니까?"
"군자는 남의 위태로운 것을 불쌍히 여기고, 소인은 남의 불행을 다행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원수께서 군자이신 줄 알기 때문에 감히 숨기지 않는 것입
니다."
그러자 공자측은, 초나라 역시 7일 먹을 양식(「사기」에는 사흘)밖에 없다
는 것을 말하고 이튿날 포위를 풀어 30리 후퇴할 것을 약속한다.
두 사람은 이것을 계기로 결의형제를 맺었으며, 약속대로 이튿날 초나라
군사가 30리를 후퇴한 다음 두 나라는 강화를 하게 된다.
◈연목구어(緣木求魚)◈
248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하려는 행동)

"그러나 그와 같은 전쟁의 방법으로, 그와 같은 큰 욕망을 달성하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사옵니다."
"그것이 그토록 터무니없는 일입니까?"
"아마 그보다도 더 터무니없을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짓은 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할지라도 후환은 없나이다."

「맹자」의 '양혜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는 제선왕에게 이우역양(以牛易羊, 죽이러 가는 소를 불쌍히 여겨 양
으로 바꾸라 함)하는 인자한 마음이 있음을 칭찬하면서,
"왕께서 왕천하(王天下)를 못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
닙니다."
라고 했다.
왕이 그 차이를 묻자,
"태산을 옆에 끼고 바다를 건너뛰지 못함은 못하는 일이고, 어른을 위해
작은 나무가지 하나 꺾지 못함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패자의 꿈을 가지고 있던 제선왕은 이어서 춘추시대 패자였던 제환공과
진문공의 사적을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폐하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고 싶습니까?"
하고 물었다.
왕은 빙그레 웃으며,
"그렇지 않소. 다만 장차 큰 뜻을 실행하고 싶을 뿐이오."
라고 대답했다.
큰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왕이 우물우물 대답을 피하자 맹자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큰 뜻이란 영토를 확장하여 진나라나 초나라 같은
나라로부터 문안을 받고, 사방의 오랑캐를 어루만지고 싶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하고 말하며 위의 글처럼 타이른다. 그리고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실패해도 뒤탈이 없지만, 폐하처럼 무력
으로 뜻을 이루고자 하시면 백성을 잃고 나라를 망치는 재난이 따를 것입니
다."
라며, 고기를 잡으려면 바다로 가야 하듯이 통일천하를 이루려면 왕천하의 대
도를 가야 함을 일러주었다.
◈연저지인( 疽之仁)◈
249
(종기를 입으로 빠는 사람, 목적달성을 위한 가면적 사랑)

그런게 아닙니다. 지난해에도 그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빤 일이 있었는데, 그 애 아버지는 싸움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오장군이 내 자식의 종기를 빨았으니 그 애도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사기」의 손자 '오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오기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제나라가 침략해 왔다.
오기를 대장으로 추천하자는 대신도 있었으나 그의 아내가 제나라 귀족의
딸이라 하여 반대자가 많자, 오기는 자기 손으로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이고 노
나라 대장이 되어 싸움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모함에 의해 노나라를 탈출해야만 했던 그는 다시 위나라 문후에
게로 가서 장군이 되었다.
오기는 신분이 가장 낮은 졸병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말을 타는 일도 없
고 자기 양식은 몸소 메고 다녔으며, 병졸 가운데 종기를 앓는 사람이 있으면
오기는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낸 다음 손수 약을 발라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가 통곡을 하였다.
사람들이,
"병졸의 종기를 장군께서 빨아 주었으니 영광인데 왜 우십니까?"
하고 의아해 하자 어머니는 위와 같이 말하면서, 자기 남편처럼 아들도 연저
지인에 감격한 나머지 장군을 위해 싸워 죽을 것을 걱정한 것이다.
◈예미도중(曳尾塗中)◈
250
(부귀로 인해 속박 받는 것보다 가난하지만 자유롭게 살겠다)

"그 거북이 살았을 때, 죽어서 그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뼈가 되기를 바라겠소? 아니면 그보다 살아서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기를 바라겠소?"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왕이 장자에게 사자를 보내 정치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낚
시질을 하던 장자는,
"초나라에는 신귀라는 3천 년 묵은 죽은 거북이를 묘당 안에 간직하고 있
다더군요."
라고 하면서 윗 글처럼, '죽어 귀함 받는 것보다 살아 진흙에라도 살기를 바
라지 않겠느냐'는 예로서 자신의 뜻을 밝힌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싶소."
라고 대답했다.
또 '열어구편'에는 장자를 초빙하기 위해 온 임금의 사자에게,
"당신들은 제사에 쓰는 소를 보았겠지요. 비단 옷을 입히고 풀과 콩을 먹
이지만, 태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그 소가 송아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기」에도 장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이 두 이야기를 묶
어, '장자는 몇 해 부귀를 누리다가 권력투쟁의 제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평
민의 몸으로 평생을 아무 탈없이 보내고 싶다면서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두미배요(五斗未拜腰)◈
251
(녹으로 받는 오두미 때문에 허리를 꺾을 수 없다)

내 어찌 닷 말 쌀 때문에 허리를 꺾고 시골 어린아이에게 절을 하겠는가?

「진서」의 '은인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신을 위하여 부렸었으나,
어찌 상심하여 슬퍼하기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다네.
사실 길을 잘못 들긴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이전에는 틀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네.

위는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의 일부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글이다.
도연명은 유교와 노장사상을 흡수함으로써 인생의 진실을 추구한 자연시
인으로, 술과 국화를 즐기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기골도 있었다.
한 때 평택현의 원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 봉록을 삼는 고을 공
전(公田)에다가 전부 찹쌀 농사를 짓도록 명령하면서,
"나는 늘 술에 취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사가 순찰관을 평택현으로 보내자 고을 아전들이,
"예복을 입고 맞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도연명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어찌 닷 말 쌀 때문에 허리를 꺾고 시골 어린아이를 대할 수 있겠는
가!"
하고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를 지었다.
◈오설상재(吾舌尙在)◈
252
(몸은 조금 망가졌어도 혀만 성하면 뜻을 펼 수 있다)

위나라 사람 중에 자의란 자가 있다. 소진과 더불어 한 스승을 섬겼다. 일찍이 초나라에 가서 초나라 재상에게 욕을 보고 왔을 때 아내가 화가 나서 말을 하자 장의는,
"내 혀를 보오. 아직 그대로 있는가?"
라고 하였다.

「사기」의 '장의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 치 혀로써 천하를 주름잡고 돌아다닌 장의는 소진과 함께 같은 귀곡선
생의 제자였다.
소진이 막 득세를 했을 당시, 그는 아직 뜻을 얻지 못하고 초나라 재상 소
양의 집에서 문객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 때 소양은 위나라와 싸워 크게 이긴 공로로 왕으로부터 유명한 화씨벽
을 하사 받았었는데, 그는 그 구슬을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소양이 적산 밑에 있는 연못가의 누대에서, 사방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과 수행원 등 많은 사람들에게 술자리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 때 손님들은 소양에게 화씨벽을 구경시켜 달라고 청했다.
소양은 구슬 상자를 가져오게 해서 구경을 시켰다. 한창 구경들을 하며
칭찬을 하고 있는데, 못에서 큰 고기가 물 위로 높이 뛰어 올랐고, 소양과 뭇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쓸리고 있는 순간 구슬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
고 말았다. 결국 가장 옷이 허름하고 평소에 잘 어울리지 않았던 장의가 누
명을 쓰고 매를 맞게 되었다.
장의는 반죽음 상태의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업혀 들어왔고, 이를 본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글을 읽고 유세만 하지 않았던들 이런 욕을 당하겠소?"
그러자 장의가 아내를 보고 말했다.
"내 혀를 보시오. 아직 있소?"
그 말에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혀야 있지요."
하니 장의는,
"그럼 됐소."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우천월(吳牛喘月)◈
253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다)

만분은 바람을 몹시 두려워했다. 어느 날 진무제와 같이 앉아 있을 때 마침 북쪽 창이 훤히 비치는 유리병풍으로 둘러쳐져 있어 틈이 없고 바람이 새지 않는데도 만분은 난색을 표명했다.
왕이 이를 보고 웃자 만분은,
"저는 마치 남쪽의 소가 달만 보아도 헐떡이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세설신어」의 '언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쪽의 소가 달만 보아도 헐떡거린다'는 말은 남쪽에 위치해있어 매우 더
웠던 오나라의 소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지방 소들은 해만 뜨면 더위에 숨을
헐떡거렸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예는 코끼리 훈련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커스를 보면 코끼리가 북소리에 맞추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장면
을 볼 수 있는데, 이 훈련을 시킬 때 큰 솥 같은 것에 올라가게 한 다음 불을
때면서 북을 친다고 한다. 그러면 나중에는 북만 쳐도 발이 뜨거울까 하여
코끼리가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고 한다.
윗 글은 진의 2대 황제인 혜제 때 상서령을 지낸 바 있는 만분의 일로, 혜
제보다 앞선 무제 때 있었던 일이다.
무제는 전부터 발명되어 있던 유리를 창문에 이용하고 있었다. 유리는 오
늘과는 달라 그 당시는 보석과 같은 귀한 물건이었다.
만분이 편전에서 무제와 마주앉게 되었을 때, 무제가 앉은 뒤쪽 창문이 유
리로 되어 있는 것을 그는 휑하니 뚫려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유
리 창문을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분은 기질이 약해 평소부터 바람을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바름을 조금이
라도 쏘인 뒤에는 반드시 감기로 며칠을 앓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
로 북쪽 창이 휑하니 뚫린 것을 본 그는 미리 겁을 먹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
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무제는 바람이 통하지 않는 유리창이란 것을
설명하고는 크게 웃었다.
그러자 만분은 황공한 듯이 말했다.
"오나라 소가 달을 보고 헐떡인다는 말은 바로 신을 두고 한 말 같습니
다."
◈오월동주(吳越同舟)◈
254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이 자리를 같이 하게 되다)

오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만, 그 같은 배를 타고서 건넘에 거센 바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 구원하는 것이 마치 왼손과 오른손 같다.

「손자병법」의 '구지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에 나와 있듯이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전국시
대 상당기간 원수지간의 나라로 있었다. 이 원수 사이의 국민이라도 한배를
타면 풍랑을 대처할 때는 왼손과 오른손같이 된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구지편'은 극한 상황에서의 대처법, 즉 막다른 골목에 처
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이 극한상황 전법을 역사적으로 잘
이용한 사람이 한신이요, 그 유명한 배수진이 그 것이다.
또 제나라 전단이 유언비어를 유포한 후 제나라 조상들의 무덤을 파게 하
여, 국민들로 하여금 이를 갈게 하는 화우계로 대승을 거둔 것 또한 마찬가지
이다.
◈옥석혼효(玉石混淆)◈
255
(옥과 돌이 뒤섞여 있다, 섞여 있어 좋고 나쁨을 구분 못하다)

참됨과 거짓된 것이 전도되어 옥과 돌이 한데 섞여 있다. 광악(廣樂)을 상동(桑同)과 한가지로 알고, 용의 무늬를 풀로 짠 옷과 한 가지로 안다.

포박자의「외편(外篇)」'상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포박자는 세상 사람들이 천박한 시나 글을 사랑하고 뜻이 깊은 옛날 책들
을 업신여기며, 교훈이 되는 말을 싫어하고 속이 텅빈 겉치레뿐인 말들을 좋
아하는 풍조를 개탄하면서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참된과 거짓됨을 뒤바꿔서 생각하고, 옥과 돌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것은 마
치 아악을 함부로 속악과 한가지로 간주하고, 아름다운 옷을 조잡한 옷과 한
가지로 간주함과 같다는 뜻이다.
피와 나락이 함께 있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설치면, 옥은 묻히고 돌
만 나도는 세상이 된다.
◈와신상담(臥薪嘗膽)◈
257
(복수를 위해 고통을 참고 심신을 단련하다)

① 부차는 나라로 돌아오자 복수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방 입구에 사람을 세워놓고서 출입할 때마다,
"부차여, 너는 초나라 군대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
라고 말하게 하였다.
② 초나라 왕 구천은 나라로 돌아오자, 곧 몸을 괴롭히는 생각으로 애태워,
쓸개를 자리에 놓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늘 쓸개를 우러러보았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또한 쓸개를 핥았다. 그러면서 혼자 '너는 회계의 부끄러움을
잊었는가?'라고 말했다.

「사기」의 '월세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월나라와 격전을 벌이던 오왕 합려(B.C. 496)는 싸움에 패하고 독화살에
맞아 죽으며 아들 부차에게.
"너는 구천이 이 아비를 죽인 원수라는 것을 잊지 말라."
라고 당부했다.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①의 글처럼 와신을 하며 복수의 칼을 갈다가
드디어 월나라에 복수를 한다.
부차의 복수로 회계산에서 항복을 하게 된 구천은 내외가 포로가 도어 갖
은 모욕과 고역을 당하다가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되기를 맹세하고 겨우
귀국했다. 그리고는 ②와 같이 쓸개를 맛보며 부차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간
것이다.
월왕 구천이 오를 쳐서 이기고 부차로 하여금 자살하게 한 것은 이로부터
20년 가까운 뒷날에 이루어졌다.
'와신상담'은 오왕 부차와 월왕 구원의 고사에서 합성된 성어로,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 채찍질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258
(아무 이익도 없는 일로 다투다)

달팽이의 뿔 위에서 무슨 일을 다투는가?
석화의 빛 가운데 이 몸을 의지한다.

「장자」의 '즉양편'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위의 시는 백낙천의 '대주'라는
시이다.
위나라 혜왕과 제나라 위왕은 불가침 동맹을 맺었는데, 위왕이 먼저 배신
을 하자 혜왕은 자객을 보내 위왕을 죽이려 했다. 이 때 혜왕의 신하 공손연
은 정정당당히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칠 것을 주장했으나, 계자는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힌다며 반대를 했다.
혜왕이 어느 쪽 말을 들어야 할 지 망설이고 있는데, 재상인 혜자가 대진
인과 혜왕을 만나게 했다.
대진인이 혜왕에게,
"왕께서도 달팽이를 아시지요?"
하고 묻자 혜왕이 대답했다.
"알고 있소."
"그 달팽이 왼쪽 뿔에는 촉씨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만씨 나라가 있
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 영토를 넓히려고 계속 싸워 죽은 사람이 만 명에 이
를 때도 있고, 달아나는 적을 보름이나 추격한 일도 있습니다."
"무슨 그런 허망한 말을 하시오."
"왕께서는 우주가 사방과 위아래로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한한 우
주에 비하면 제나라와 위나라는 촉씨와 만씨에 비하여 무엇을 다를 것이 있
겠습니까?"
"다를 것이 없지."
대진인이 물러가자 넋을 잃고 앉아 있던 혜왕은 혜자가 들어오자,
"그 손은 정말 위대하다. 성인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리라."
라며 감탄했다는 것이다.
조물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사 이래 인간들의 모든 전쟁은 '와우각상쟁'
과 진배없을 것이다.
◈완벽(完璧)◈
259
(모자라거나 흠잡을 데가 없다, 빌려온 물건을 온전히 되돌려주자)

왕이 말했다.
"누구를 사자로 보내야 하겠는가?"
인상여가 말했다.
"왕께서 반드시 사람이 없으면 신이 원컨대 구슬을 받들고 가겠나이다. 만일 성이 조나라로 들어온다면 구슬은 진나라에 머물게 하겠나이다. 성읍이 들어오지 않겠다면 신이 청컨대 구슬(璧)을 완전(完)히 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나이다.

「사기」의 '인상여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나라 혜문왕이 천하제일의 구슬 화씨벽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자 이를
탐낸 진의 소양왕이 사신을 보내 진나라의 15개 성과 맞바꿀 것을 청해 왔다.
조나라는 진퇴유곡이었다. 구슬을 안주면 트집을 잡아 공격해올 것이고,
주면 구슬만 받고 성은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윗 글과 같이 인상여가 굳은 결의로 자청하고는 구슬을 가지고 진
나라로 들어갔다.
소양왕은 구슬을 보고 대신과 후궁에게까지 구경시키면서 크게 기뻐하였
으나 성을 주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이를 눈치챈 인상여는 구슬에 흠이 한 군데 있으니 알려주겠다는 핑계로
구슬을 돌려 받았다. 그리고는 기둥에 등을 대고,
"여기에 오기 전에 조나라에서는 진을 의심하여 구슬을 주지 말자는 의견
도 있었으나, 제가 진나라는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말하여 왕께서 닷새간 목
욕재계를 한 후 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성을 줄 의사도 없고
예를 갖추시지도 않을 것 같으니 구슬을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만약 강제로
구슬을 뺏으려 하면 저는 머리를 구슬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깨고 말겠습니
다."
라고 말하자 소양왕은 사과와 함께 성을 넘겨주도록 지시하고는 구슬을 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믿을 수 없었던 인상여는 이것도 믿지 않고 말했다.
"대왕께서도 닷새 동안 목욕재계 하신 다음 구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진왕이 닷새를 기다리는 동안 인상여는 구슬을 심복부하에게 주
어 사잇길로 조나라로 보냈다.
감쪽같이 속은 진왕은 인상여를 죽이고는 싶었지만 소문을 생각하여 후히
대접해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인상여는 일약 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뒤이어 조나라의 재
상이 되었다.
◈왕자불가간(往者不可諫)◈
260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초나라의 접여가 공자의 앞을 지나치면서 노래하여 말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쩌다가 덕이 쇠하였는가. 지난 일은 말릴 수 없지만, 오는 일은 따를 수 있거니. 그만 두어라, 그만두어, 지금의 벼슬길을 따른다면 위태롭거니."

「논어」의 '미자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왕자불가간(往者不可諫) 다음에 내자유가추(來者猶可追)로 이어진다.
왕자(往者)는 지나간 것을 말하고, 불가간(不可諫)은 말릴 수 없다는 뜻이
다. 내자(來者)는 앞으로 오는 일을 말하고 유가추(猶可追)는 늦었지만 그래
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지나간 일은 하는 수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면 된다는 뜻이다.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사들이 많았는데, 공자는 이러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레를 타고 초나라를 지나가는데, 거짓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접여라는 사람이 다가와 위와 같이 세상을 숨어 사는 것이 현
명하다고 말한다.
공자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수레에서 내렸으나, 그의 모습은 온
데간데 없었다.
또 걸익이라는 자는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도한 물결에 온 천하가 다 휩쓸려 있거늘 이를 누구의 힘으로 바꾸리
요? 또 당신은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피하여 사는 선비
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소?"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가 말하기를,
"새나 짐승과는 함께 떼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으
면 누구와 함께 산단 말인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구태여 바꾸려 들지
도 않았을 것이니라."
하였다.
접여와 걸익은 공자를 각각 봉황과 세상을 바꾸려는 선비에 비유하면서,
때를 만나지 못해 고생하는 공자에 대해, 지나간 고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만, 앞으로는 그런 고생하지 말고 편히 지내도록 충고한 것이다.
◈요원지화( 原之火)◈
261
(무섭게 번져가는 벌판의 불세력이 대단해 막을 수 없다)

너희가 어찌 짐에게 고하지 않고서, 서로 움직이기를 들뜬 말로써 하여 무리를 두려움에 잠기게 하느냐? 불이 들판을 태움과 같아서 가까이 갈 수가 없는데, 어찌 그것을 박멸할 수가 있겠는가. 즉, 오직 너희 무리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함을 짓는 것이니, 나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경」의 '반경'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은나라 탕왕의 10세 손인 반경이
황하의 수해를 피하기 위해 수도를 옮기면서, 미리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타
이르기 위해 쓴 글이다.
위의 글을 풀이하자면,
"너희들이 나에게 고하지도 않고서, 뿌리도 잎도 없는 유언비어를 날려 백
성들을 공포와 혼란으로 빠지게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나쁜 일이 번져나가는 것은, 마치 불이 들판을 태우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
불이 난 곳으로 접근할 수가 없고, 더구나 그것을 박멸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스스로 불안한 상태를 빚어내는 것이
므로 나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요원지화( 原之火)란 불이 벌판을 태운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무서운 기세로 확대되어 가는 것, 즉 세력이 대단해서 막을 수 없
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
262
(어리석은 일 같아도 끝까지 밀고 나가면 목적을 달성한다)

북산에 우공(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사람이 있어 나이가 90세에 가까운데, 두 산을 마주 대하고 살고 있었다. 그는 산의 북쪽이 길을 막고 있으므로, 출입할 때마다 멀리 돌아다니는 것이 번거로워 가족들을 모아 놓고 상의를 하였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힘을 다해 험한 산을 편편하게 하여, 예주의 남쪽길을 통하고 한수의 남쪽까지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너희들은 괜찮겠느냐?

「열자」의 '탕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태행산은 사방 둘레가 7백 리나 되는 매우 높은 산이었는데, 위의 글처럼
이 산으로 인해 출입이 매우 번거로웠다. 이에 우공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산
을 평평하게 하는 문제를 상의하였다. 그러자 우공의 아내만이 이의를 제기
하며 말했다.
"당신의 힘으로는 작은 언덕인 괴부산도 벅찰 텐데, 태행산이나 왕옥산과
같은 큰 산을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산의 흙이나 돌을 어디
에 두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동해가 있다는 발해의 구석이나, 동북쪽에 있다는 은토의 북쪽에 던져 버
리지요."
그리하여 우공은 아들과 손자를 이끌고 산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셋이
서 일에 착수했는데, 돌을 깨뜨리고 흙을 파서 그것을 키나 삼태기로 발해의
구석까지 운반하였다.
우공의 이웃 집에 한 과부가 살았는데, 유복자가 있어서 아직 어린 나이인
데도 달려가 이 일을 돕게 하였다. 그들은 추위와 더위의 기후가 바뀌어야
겨우 한 번 돌아오는 형편이었다.
이것을 보고 황하의 지수라는 사람이 물었다.
"당신과 당신 가족의 힘으로는 평생 가야 산의 귀퉁이도 허물기 힘들 텐
데, 어떻게 큰 산의 돌과 흙을 옮긴단 말이오?"
이 말을 듣고 우공은,
"자네의 좁은 소견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네.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의 손자, 손자에 증손자 이렇게 자자손손 대를 이어 무한히 일을
계속할 수 있지만 산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을 것이니 언젠가는 평평해지지
않겠나?"
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어진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 말에 놀란 것은 태행산의 산신령이었다. 우공의 각오가 언젠가
는 산을 다 허물 것 같자 산을 보호하기 위해 천제에게 호소하여 태행산은
삭동으로, 왕옥산은 옹남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우화등선(羽化登仙)◈
263
(사람이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다)

넓고 넓어서 허공에 떠서 바람을 몰아, 그 그치는 바를 모르는 것 같으며, 바람에 나부끼어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생겨 선계에 오름과 같다.

소동파의「전적벽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신종 5년에 천자를 비방했다는 죄로 소동파는 적벽부근으로 귀양
을 갔다.
당시 송나라는 불교 사상, 특히 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소동파도 귀
양살이를 하는 동안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전적벽부」가 후세 사
람들에게 커다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이 글 속에 불교와 도교의 사상적인
깊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술년 가을 7월 16일 밤에, 나는 손님들과 더불어 배를 타고 적벽의 아
래에서 놀았다. 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의 파도는 일지 않는다.
술잔을 들어 손님들에게 권하고, 밝은 달의 시를 읊조리고, 아리따운 아가씨
의 장(章)을 노래 불렀다. 조금 있자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북두칠성과 견우
성 사이를 배회하였다. 흰 이슬은 강에 가로 놓이고 물빛은 하늘에 접해 있
다. 한 갈대가 가는 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만 이랑이나 되는 물결에 망
연함을 참는다."
이 역시「전적벽부」의 일부로, 윗 글은 바로 이 다음에 이어진다.
우화등선은 현재에는 '세상을 떠나는 것'의 의미로 쓰인다.
◈운주유악(運籌 幄)◈
264
(장막 속에서 산가지를 놀리다, 들어앉아 기획하다)

"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대체로 산가지를 장막 안에서 움직여 천 리 밖의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어루만져 주며, 군대의 보급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며,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사기」의 '고조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통일 천하를 이룬 한고조가 어느 날 낙양 남궁에서 잔치를 베풀며 말했다.
"경들은 숨김없이 말하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과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이 무엇인가를."
그러자 고기와 왕릉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선 성을 치고 공략하게 되면 공을 세원 사람에게 그 땅을 주어 천
하 사람들과 이익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의심과 질투가 많아 싸
움에 이겨도 성을 주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어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것이 폐하께서 천하를 얻고 항우가 천하를 잃은 이유인 줄 압니다."
그러자 고조가 위와 같이 답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장량, 소하, 한신 같은 모사와 용장을 잘 통솔했기 때문에 그들을 제대로
쓸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반면
항우는 범증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것이 나에
게 패한 이유다."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265
(먼 곳에 있는 것은 급할 때 도움이 안 된다)

"초나라로부터 사람을 빌어다가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 한다면, 초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할지라도 아들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화재를 내놓고 물을 바다에서 떠 온다면, 바닷물이 아무리 많아도 불을 끄지는 못합니다. 멀리 있는 물은 가까운 불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지금 삼진(三晋)과 초나라가 아무리 강해도 제나라에 가깝습니다. 노나라의 재앙은 아마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비자」의 '설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쪽의 영웅인 초나라의 북상을 억제한 진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 독
립한 조나라와 위나라, 한나라를 삼진이라 일컫는데, 이 삼진이 제나라를 공
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삼진은 주나라의 천자인 위열왕으로부터 제후로서 승인을 받았
다. 일반적으로 이로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시점까지를 전국시대라고
일컫는다.
이후로 삼진은 초나라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이 틈을 타서 제나라의 상경
대부인 전화가 임금인 강공을 몰아내고 제후가 되었다. 제나라는 국내의 통
일이 이루어지자, 또다시 호시탐탐 노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노나라는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끊임없이 제나라의 침략을 받아 왔고, 남쪽
으로는 월나라의 위협을 받았으며,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초나
라의 압박을 받아왔는데, 또 제나라의 침략이 있으려 하자 노나라의 목공은
이에 대비, 동쪽에서 제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초나라와, 제나라의 대두를 꺼
리는 삼진에 사람들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서라는
사람이 위와 같이 간하였는데, 멀리 있는 물이 가까운 불을 끌 수 없으므로
먼 물만 믿고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원입골수(怨入骨髓)◈
266
(사무친 원한이 뼈 속까지 차 있다)

"목공은 이 세 사람을 골수에 차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제발 이 세 사람을 진나라로 돌아가게 하여, 나의 아버지가 그들을 찢어 죽이어 가슴이 깨끗해지도록 해주십시오."

「사기」의 '진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나라 사람 가운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내가 성
문을 관리하고 있으니 정나라를 습격하면 성문을 열어 주겠다'는 자가 있었
다.
이에 진목공이 백리혜의 아들 맹명시, 견숙의 아들 서걸슬과 백을병 세 사
람이 장군을 삼아 정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이 때 세 장군은,
"정나라를 불시에 치려 하는데, 만약 상대방에게 눈치를 채인다면 성공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라고 의견을 통일하여 활나라를 멸망시켰다.
이 때 진(晋)나라에서는 패자였던 문공이 죽어, 태자인 양공은 아버지의 장
례도 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양공은 화가 나서,
"진(晋)나라는 내가 외롭고 약한 것을 기회로, 게다가 내가 상중인 것을 이
용하여 나의 활나라를 멸망시켰다."
라고 말하고는, 흰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즉시 군대를 일으켜, 좁은 길을 막
아 진(秦)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었다. 그리고 맹공을 가하여 한 병사도 남기
지 않고 격멸, 세 장군을 포로로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문공의 부인은 진(秦)나라 목공의 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로잡
혀 온 세 장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와 같이 세 장군 석방이 진(晋)나라에
유리한 일이라고 말했다.
진양공은 청을 받아들여 세 사람을 돌려 보냈는데, 진문공 부인의 말과는
반대로 목공은 교외까지 나와 그들을 맞이하며 울면서,
"내가 백리혜와 견숙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경들 세 사람을 욕보였
다. 경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이 치욕을 씻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라며 보복할 것을 다짐했다.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
271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시기)

"선제께서 한실(閑室) 부흥의 사업을 시작하시고 아직 그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도중에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눠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촉한의 익주 백성이 가장 지쳐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살아 남느냐 망하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다."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의 기반을 다짐과 함께 통일천하의 사명감에 있는
힘과 지혜를 다 기울이던 제갈량은, 오히려 촉한이 열세에 놓인 채 유비마저
죽게 되자, 조조의 위나라와 결전을 감행하게 된다.
출정에 앞서 용렬하기로 유명한 후주의 유선에게 출정의 동기와 목적을
밝힌 표문을 냈는데 이것이 바로 '출사표'이다.
그러나 이 출정에서 제갈량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진중에서 죽
게 되었는데, 이 '출사표'의 첫머리에 위에서 말한 '위급존망지추'란 말이 나온
다.
◈위여누란(危如累卵)◈
272
(위태로움이 계란을 포개놓은 것과 같다)

"위나라에 장록 선생이라는 자가 있는데, 뛰어난 변설을 가진 선비입니다. 그 사람이 '진왕의 나라는 알을 포개놓은 것같이 위태하지만, 나를 쓰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서면으로는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내 수레를 태워 가지고 데려왔나이다."

「사기」의 '범수채택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범수는 종횡가(縱橫家, 중국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하나)의 한 사람이다.
그는 조국인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려고 위왕을 가까이 하려 했으나 뜻대
로 되지 않자 증대부인 수가에게 벼슬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제나라에 사절로 가게 되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나라에 도착한 수가가 제왕과 교섭을 하는 동안, 범수는 돌연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누설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귀국하여 수가가 이 일을 재상인 위제에게 고하자, 화가 난 위제는 범수에
게 몹시 매질을 했다. 그리고는 대발로 감아 화장실에 내던져 오줌을 끼얹게
하였다.
범수는 가까스로 그 자리에서 도망하여, 정안평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다.
정안평은 범수를 감싸주고 이름을 장록으로 바꾸게 하여 위나라에서 탈출
할 기회를 엿보았다. 때마침 진나라 소양왕의 사자인 왕계가 위나라에 와 있
었는데, 인재를 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록을 그에게 추천했다.
장록을 만나본 왕계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는 그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가서, 왕을 알현하고 사자로서의 보고를 마친 후 범수에 대하여 위와 같
이 말을 했다.
그리하여 범수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위편삼절(韋編三絶)◈
273
(가죽으로 맨 책의 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지다)

공자가 만년에 역경을 좋아하여, 단(彖)·계(繫)·상(象)·설괘(說卦)·문언(文言)을 서하고, 역경을 읽어 위편삼절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 같이 하면, 나는 역경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기」의 '공자세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60이 넘은 만년에 주역에 심취했는데, 주역을 어찌나 여러 번 읽었
던지 대쪽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한 데서 유래된 고사성어
이다.
'내가 50세 정도에 주역을 연구했더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줄일 수 있었
을 것을'하고 아쉬움을 토로했을 만큼 학문 연구를 위한 그의 노력은 끝이 없
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나는 발분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마저 잊고, 세월이 흘
러 몸이 늙어가는 것도 몰랐다."
라는「논어」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교무류(有敎無類)◈
274
(교육에는 차별을 두는 일이 없다)

공자가 말하기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다'고 했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교육목적은 선한 사람을 더욱 선하게 하고, 악한 사람을 선하게 만
드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개성에 따라 올바르게 가르치면 선악의 차이는 없
어지는 것임을 강조한 말이 바로 유교무류(有敎無類)이다.
당시에 호향이란 곳은 풍기가 문란한 곳이거나 아니면 천한 직업, 천한 계
급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 사람들과 상종하기를
꺼렸다.
어느 날 그 곳에 사는 아이가 공자를 만나러 왔다.
제자들은 돌려보내려 했으나 공자는 그 아이를 맞이해서 그가 묻는 말에
친절하게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제자들은 공자의 이러한 태도에 의아해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찾아오면 그 깨끗한 마음을 받아들일 뿐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한 것 까지 따질 것이야 있겠느냐."
라고 타이르며 그들의 차별의식을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성현이라 칭하는 대부분의 위인들은 이처럼 인류에 대한 공평한
사랑의 실천자라 할 수 있다.
과학문명, 인류문명, 인권사상,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이 시점에도 신
분에 의한 교육제도에 차등이 있다면 어느 나라이건 시정해야 할 것이다.
◈유능제강(柔能制剛)◈
275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제압한다)

세상에서 부드럽고 약하기로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더구나 곧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능히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로써 능히 이를 깨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 이기고, 부드러운 것은 굳센 것에 이긴다는 것은 천하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행하지를 못한다.

「노자」에 수록된 것으로 아래의 글 역시「노자」의 내용이다.
"사람도 태어남에는 부드럽고 약하나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굳고 강해진
다. 풀과 나무도 생겨남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르
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또한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나무는 강하면 꺾인다. 강하
고 큰 것은 아래에 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처한다."
이러한 유능제강(柔能制剛)의 표현은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황석공소서(병서)」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
라고 되어 있으며「삼략」에는,
"부드러움은 능히 굳셈을 제어하고, 약한 것은 능히 강함을 제어한다. 부
드러움은 덕이고 굳셈은 도둑이다. 약함은 사람을 돕는 것이고 강함은 사람
을 공격하는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남자의 거친 성질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여자의 부드러운 사랑뿐이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은 무서운 호랑이보다도 달콤한 곶감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의 억센 감정을 억센 것으로 누른다면 그것은 일시적·표면적인 것일
뿐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손으로 비비면 으깨지고 마는 한
알의 씨앗이 무거운 바위와 단단한 땅을 뚫고 싹을 내밀지 않는가.
다만, 부드러운 것과 풀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우유부단함과는 구
별되어야 할 것이다.
◈유신(維新)◈
276
(모든 것을 고쳐 새롭게 하다)

문왕이 위에 계시니 주나라가 빛나지 않으리오
아아, 하늘에 빛나시도다. 상제의 명이 때가 아니리오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나 문왕이 오르내리시며
그 명이 새롭도다. 상제의 좌우에 계시도다

「시경」의 '문왕편'에 있는 시이다.
'문왕편'이란 문왕의 덕을 추모하고 찬양한 시로서 전부 7장으로 되어 있
으며 위의 시는 그 첫 장에 수록된 부분이다. 위의 내용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문왕의 덕이 높고 또 높아 해처럼 온 하늘에 빛나고 있다. 주나라가 천
년이나 전통을 지닌 오랜 제후의 나라였지만, 우리 문왕의 높고 높은 덕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통일천하의 새로운 사명을 내리셨다. 주나라가 어찌 찬
란하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왕의 혼령은 임의로 하늘과 땅을 오르
내리시며 늘 상제의 옆에 계신다."
이 '유신'이란 말은「서경」의 하서 윤정편에서 먼저 쓰인 바 있다.
이 글은 윤후가 하왕의 명령으로 희화(羲和)를 치러 갈 때의 선언으로, 희
화를 치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 나는 그대들과 함께 명을 받들어 천벌을 내니려 한다. 그대들 군사
들은 왕실을 위해 힘을 합하고, 바라건데 나를 보필하여 삼가 천자의 위명을
받들도록 하라. 곤산의 등성이에서 불이 타오르면 옥과 돌을 구분하지 않고
다 태우는 법이며, 나라의 관리가 덕을 잃게 되면 맹렬한 불길보다 더 사납
다. 그들의 괴수는 섬멸하되 협박에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않겠다. 예전에
물들은 더러운 습속은 모두 새로워지도록 하겠다. 아아, 위엄이 사사로운 정
을 극복하면 진실로 일을 이루게 될 것이나, 정이 위엄을 누르면 진실로 공을
세우지 못할 것이리라. 그대들 모든 군사들은 노력하고 경계하라."
◈유속불식(有粟不食)◈
277
(곡식이 있어도 먹지 못한다)

곡식을 아무리 창고에 가득 쌓아 두었더라도 이것을 찧어 밥을 해먹지 않으면 배고픈 것을 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전한의「염철론」에 나오는 이야기로, 전한의 환관이 쓴 책이다.
한무제 때 오랫동안의 대외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지자 소금과 철의
전매와 균수, 평균법 등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백성의 원성
이 대단했는데, 염철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룬 책이다.
이 책에는 소금, 철 전매 시비가 주로 되어 있으나 의론(議論)은 정치, 사
회, 경제, 외교, 학문 등 여러 문제에 미치고 있는 전한 시대의 중요한 자료이
다. 다음 역시 여기에 수록된 내용의 일부이다.
"바다에서 소금이 나지만 사람이 소금을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그
것은 소금이 되지 않는다. 산에서 쇠가 나지만 광석을 캐내서 선광을 하고
제련을 하지 않는 한 쇠가 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노력이 더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창고에 있는 조가 그대로
밥이 되어 입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유약무실약허(有若無實若虛)◈
278
(꽉 차 있어도 텅 빈 것같이 보인다)

증자가 말했다.
"유능하면서 무능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많이 알면서 적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며, 남 보기에는 없는 것같이 하고, 실하되 허하며, 범하되 계교를 쓰지 아니함은 지난 날 나의 친구 하나가 이에 따랐느니라."

「논어」의 '태백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증자가 안회를 두고 한 말이다. 안회는 공자의 제자로서 학식과 덕이 남달리 뛰어났던 만큼, 스승의 사랑
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증자가 한 위의 말은, 재능이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일에 신중하
고 겸손하게 임했던 안회의 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애제자인 안회를 잃은 슬픔을 공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며 통곡
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쳤다. 하늘이 나를 망쳤다. 내가 이 사람을 슬퍼하지 않
고 누구를 슬퍼하겠는냐."
◈유언자불필유덕(有言者不必有德)◈
279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만큼 수양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들을 만하지만, 말이 들을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다는 것은 아니니라. 인자는 반드시 용기가 있으나,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하다는 것은 아니니라."

「논어」의 '헌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덕이 있는 사람은 도리에 맞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럴 듯하게 말을 하
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진 사람은 용기가 있으나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
드시 어진 마음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수양과 학식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말 속에 수양과 학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만
듣고는 그 인격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진리를 깨달은 어진 사람은 죽음도 아끼지 않는 용기를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어진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질다는 말은 용기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뜻하지만, 용기가 곧 어질
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말하기 위한 말은 참다운 말이 될 수 없고, 용기를 위한 용기는 참다운 용
기가 될 수 없다. 즉, 공자는 말하는 것과 덕이 일치하고 어짊과 용기가 구
비되는 사람을 진실로 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유일불원(遺佚不怨)◈
280
(세상이 나를 돌보지 않고 버려 두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유하혜는 보잘것없는 임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작은 벼슬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다.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는 그 우수한 변을 숨기지 않고, 반드시 그 정당한 방법으로써 일을 하였다. 버려져도 원망하지를 않았으며 곤궁한 지경에 이르러도 근심하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비록 내 곁에서 몸을 벌거벗고 있은 들 네가 나를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연자약하게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스로 몸가짐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려 했을 때 이끌어서 만류하는 자가 있으면 머물러 있었다.

「맹자」의 '공순추상'에 나오는 이야기로, 다시 한 번 풀이하면 다음과 같
다.
유하혜는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었다. 임금이 훌륭하
지 못하더라도 이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벼슬의 고하(高下)에 연연하지
않았다. 벼슬에 나가면 자신이 지닌 재능을 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곤궁한 처지에 놓여도 별로 근심하는 빛이 없었으며,
악인들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올바른 태도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태연자
약했다.
유하혜는 벼슬에서 쫓겨나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에 올라
도 기뻐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
"자네 같은 재주로써 어디를 간들 출세를 못하겠는가."
하며 다른 나라로 가서 벼슬하기를 권했다.
그러자 유하혜는,
"올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면 어디로 간들 쫓겨나지 않겠는가. 이왕 쫓
겨날 바엔 부모의 나라를 버릴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며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또 폭풍우가 몰아친 어느 날 밤 있을 곳을 잃은 옆집 젊은 과부가 혼자
있는 유하혜의 방문을 두드리며 재워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자 유하혜는
서슴치 않고 맞아들여 한 방에서 밤을 세웠다. 그러나 세상에 누구 한 사람
유하혜와 그 과부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비록 내 옆
에서 옷을 벗은들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는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유주망국(有酒亡國)◈
281
(술로 인해 망하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단술이 있더니 우임금 때가 되어 의적이 술을 만들었다. 우임금이 마셔보고 달므로 '후세에 반드시 술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의적을 멀리 하셨다.

「사략」의 권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나라 우임금 때에 의적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를 맛
본 우임금은 위와 같이 술로 인해 자칫 나라를 망칠까를 염려하였다.
술이라는 것이 잘못 다스려지면 물론 그 폐해가 크긴 하지만, 술에 대한
예찬론은 만만치 않다.
신(新)의 왕망은 전매품 공포 조서 가운데,
"소금은 먹는 반찬 가운데 장수요, 술은 백 가지 약 중에 으뜸이며, 쇠는
밭갈이 하는 농사의 근본이다."
라고 했다.
또「한서」의 '식화지'에는, '술은 하늘의 아름다운 녹'이라고 돼 있으며,
이태백은 '술은 마시고 죽어도 좋다'고 할 만큼 술을 즐겼다. 어떤 이는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라고 하기도 하고, '인간의 외로움,
슬픔, 우울, 성냄, 기쁨을 술이 있기에 달래고 참고 즐거워한다'고 하는 사람
도 있다.
그런저런 이유로 술을 절대 필요악으로 생각한다. 또 술이 있기
◈육사자책(六事自責)◈
282
(여섯 가지로 자책하다)

정치가 알맞게 조절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직업을 잃고 있습니까?
궁실이 화려합니까?
여자들의 치맛바람이 심합니까?
뇌물이 성행합니까?
아첨하는 사람이 들끓습니까?

「사략」의 권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은나라에 7년간 큰 가뭄이 들자 태사(나라의 법규 기록을 맡은 관리)가 사
람을 제물로 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탕왕이 말하기를,
"하늘에 빌려는 대상이 백성이니 희생물은 내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며 목욕재계한 뒤 몸을 흰 띠로 두르고는 희생 제물로 바쳐질 준비를
하였다. 그가 상림의 들에서 위와 같이 여섯 가지 이유로 자책하며 기도하자
기도가 다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렸다.
탕임금의 하늘을 향한 육사지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통치자들이 때때
로 자문하고 반성할 조목들이다.
◈융절용안(隆절龍顔)◈
283
(코와 이마가 높아 얼굴이 남자답게 잘 생기다)

상(相)을 보는 사람은 옛날 사람 중에는 없었고 학자들도 가르친 일이 없었다. 사람의 형상이나 안색을 보고 길흉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안다고하여 세속에서 이를 말하는 것인데, 옛날 사람들 중에는 입에 올리지 않았고 학자들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기」의 '한고조본기'의 내용으로, 순자가 한 말이다.
순자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상(相)을 말하는 것은 마음을 논하는 것만 못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은 도
의 방법을 논하는 것만 못하다. 외형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은 도의
방법을 이기지 못하다. 도의 방법이 바르고 마음이 순하면 외형이 아무리 나
빠도 심성이 착하고 군자가 되는 데 방해됨이 없으며, 외형이 아무리 좋아도
심성이 나쁘면 소인이 되는 데 방해됨이 없다.
항간에서는 오늘날에도 관상학이니 점성술이니하여 마치 이런 것들이 어
떤 학문의 한 갈래인 듯 위장하지만, 이것은 노자의 말류들이 꾸며낸 것으로,
학자들이라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위
대한가 비루한가의 여부는 그가 정도(正道)를 닦아 공부하고 수신(修身)하는데
달려 있을 뿐, 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위인의 모습은 대체로 아름답지 못
한 것이다."
융절용안의 융절은 콧대가 우뚝 솟은 것을 말하고, 용안(龍顔)은 얼굴 생김
새가 용처럼 생겼다는 뜻으로, 이는 한고조 유방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조본기'의 첫머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조는 패풍읍 중양리 사람으로 성은 유씨고 자는 계다. 아버지는 태공
이라 불렀고 어머니는 유온이라 했다. 유온이 언젠가 큰 못 가 언덕에서 자고
있는데, 꿈에 귀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천둥, 번개가 요란하고 천지가 캄
캄했다. 태공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 위에 교룡(蛟龍)이 나타나 있었다. 그
런 다음 태기가 있어 드디어 고조를 낳았다. 고조는 사람된 것이 융절에 용
안이었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왼쪽 다리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또 사마정이 지은「색은」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시황은 봉목장준 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대개 코가 높이 솟은 것을 말
한다. 문명의 말인 즉, 고조는 용을 느끼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 얼굴 모양이
용 같아서 목은 길고 코가 높다는 것이다."
◈은감불원(殷鑑不遠)◈
284
(이전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아 경계하다)

문왕이 말하기를 슬프다 슬프다 너 은상아
사람이 또한 말이 있다. 넘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가지와 잎은 해가 없어도 뿌리는 실상 먼저 끊어진다고
은나라 거울이 멀지 않다. 하후의 시대에 있다

「시경」'대아랑편'에 나오는 시로, 은나라 삼공 가운데 한 사람인 서백이
주왕에게 간하기 위해 지었는데, 주나라 10대 왕인 여왕의 포악함을 한탄한
소목공이 간할 목적으로 지었다는 말도 있다.
은나라 전신인 하나라는 걸왕의 포학과 방탕으로 망하고 말았는데, 하나라
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거울로 삼았다는 뜻에서 은감불원(殷鑑不
遠)이라 한다.
그러나 28대 주왕에 이르러 걸왕과 같은 포학과 방탕이 제현되면서 약 6
백 년 간 이어진 은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은감을 삼는다'라고 하면 과거에 실패한 전례를 거울 삼아 교훈을 삼는다
는 뜻이 되며, 이와 비슷한 표현은 '육국을 멸망시킨 것은 진이 아니고, 멸망
한 나라의 전례를 거울 삼아 교훈을 삼는다는 뜻이 되며, 이와 비슷한 표현은
'육국을 멸망시킨 것은 진이 아니고, 멸망한 나라의 전례를 거울삼지 않고 멸
망할 짓을 한 육국 자신이었다'는 한유의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은거방언(隱居放言)◈
285
(세상에서 숨어 살면서 말을 기탄없이 한다)

우중과 이일에 대하여 말했다.
"숨어 살며 기탄없이 말했지만 몸가짐이 깨끗하였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시세에 맞았다."

「논어」의 '미자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나라 태왕에게는 태백, 중옹, 계력 등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셋째인 계력이 형제들 중에서 가장 현명했으며, 창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태왕은 왕위를 셋째 아들 계력에게 물려 주어 다음 대가 창
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태왕의 마음을 마침내 태백이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맏아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태백은 오히려 둘째
인 중옹까지 설득하여 그와 함께 남만 지방으로 떠났다.
이렇게 되자 태왕은 쉽게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게 되었고, 계력은
또 아들 창에게 그리고 또 창은 아들 발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창의 아들 발은 바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가 된 무왕이다. 물론 이
때 태백이나 중옹이 세상에 얼굴을 나타냈다면 왕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선조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뜻이 있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한 사람은 미친 척, 한 사람은 중이 되어 물러나 주는 것과 비슷
했다.
그들은 남만 지방, 곧 오나라로 가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먹물로 그
림을 그리고는 토인들과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버린 것이 권도에 맞았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그런 자기희생이 대의를
위한 부득이한 처사였다는 이야기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
286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베다, 정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한 집행)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행동을 자기 멋대로 했기 때문에 장합에게 크게 패한 바 되었다. 제갈량은 한중으로 돌아오자 마속을 죽이고 장병에게 사과를 했다.

「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대가 '가정'이라는 곳에서 위나라 군대와 충돌
하게 되었다. 이 때 마속이 가정의 촉군 책임자였는데, 제갈량의 지시를 어
기고 임의로 작전을 하다 패해서 촉의 1차 북벌이 완전 수포로 돌아가게 되
었다.
제갈량은 마속을 옥에 가두고 처형하기로 하였다.
장완이 제갈량을 보고,
"천하 평정을 눈앞에 둔 이 때에 마속 같은 유능한 인재를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하고 말하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손무가 항상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
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전쟁을 시작한 처음부터 군율을 무시하게 되면
어떻게 적을 평정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서른아홉의 유능한 장수이자, 친구의 동생이었던 마속을 사형에 처했
다.
법가의 한비자는,
"채찍의 위협과 재갈의 준비가 없다면 비록 조보 같은 유명한 말몰이꾼이
라 하더라도 말을 복종시킬 수 없다. 위엄있는 권세와 상벌의 법도가 없다면
비록 요순같은 명군이라도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응접불가(應接不暇)◈
287
(아름다운 경치가 계속되어 인사할 겨를도 없다)

왕자경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음의 길을 걸어보면 산천의 경개가 서로 영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돌릴 겨를을 주지 않는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더욱더 무엇이라고 그 회포를 말할 수 없게 한다."

「세설신어」의 '왕자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나라의 왕자경은 서예가로서 문필에도 능했으며 중서령이란 관직에 올
랐었다. 그는 명승감상에 심취하였는데, 어느 날 산음도를 돌아보고 그 아름
다움을 표현한 것이 바로 위의 글이다.
「회계군기」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는,
"회계지방에는 특별히 유명한 산수가 많이 있다.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288
(의심은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속담에 말하기를,
"의심이 암귀를 낳는다."

「열자」의 '설부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다. 혹시 이웃집 청년이 훔쳐가지 않았을까
하여 유심히 살펴보니 그의 걸음걸이와 얼굴색도, 눈초리까지도 수상하게 보
였다. 그러나 도둑맞은 줄 알았던 도끼를 찾고 나서 이웃집 청년의 거동을
보니까 다른 청년과 조금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웃집 뜰에 말라 죽은 오동나무를 보고,
"말라 죽은 오동나무는 재수가 없으니 잘라 버리시오."
라고 충고해 주었다.
이웃 사람이 나무를 베자, 땔감으로 쓰게 나무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웃 사람은,
"에이, 재수 없네. 당신이 오동나무가 재수 없다고 한 것은 땔감으로 쓸
욕심에서 나온 음흉한 것이었구료."
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송나라 때 어느 부잣집 담장이 비로 인해 무너져 버렸다. 주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빨리 담장을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지도 모릅니다."
이웃에 사는 노인도 같은 충고를 했다.
며칠 뒤 그 집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쳐갔다.
집주인은 그 아들에게는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했으나, 이웃 노인에 대해
서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289
(두 개의 복숭아로 세 무사를 죽이다)

걸어서 제나라의 성문을 나와, 멀리 탕음의 마을을 바라본다.
마을 가운데 세 무덤이 있으니, 겹겹이 쌓여 정히 서로 닮았다.
묻건대 이 누구의 집의 무덤인가? 전강과 고야자의 것이다.
힘은 능히 남산을 물리치고, 글은 능히 땅의 기원을 끊는다.
하루 아침에 참언을 입어 두 복숭아가 세 용사를 죽였다.
누가 능히 이 꾀를 하였는가? 나라의 재상인 제나라의 안자였다.

안자의「춘추」1권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경공에게는 공손접, 고야자, 전개강 등 세 명의 장사가 있었다. 그들은
범을 맨손으로 잡을 정도의 용사들이었으나, 수양이 부족하여 힘과 공을 자랑
하며, 법과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었
다.
조정은 이 세 사람 때문에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명재상이었던 안영은 그들을 축출할 것을 권했으나 경공은 말을 듣지 않
았다.
어느 날 안영은 노나라 임금을 초대한 만찬에서 만수금도라고 하는, 크기
가 대접만한 복숭아 여섯 개를 가져다가 두 임금과 두 재상이 하나씩 먹고,
두 개의 복숭아를 가지고 경공에게 말했다.
"이 복숭아 두 개를 가장 공로가 큰 두 장수에게 상으로 주시기 바랍니
다."
경공은,
"그거 좋은 생각이오."
하고는 장사들에게 말했다.
"이 복숭아를 먹을 만한 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진해서 나와 말
하라. 그 공을 평하여 복숭아를 나눠주리라."
그러자 공손접이.
"나는 임금님과 사냥을 할 때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죽였소.
복숭아를 먹을 만한가요?"
하자 안영이,
"그 공로는 술 한잔과 복숭아를 내림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고야자가 일어나,
"호랑이를 죽인 일쯤 대단할 것이 없소. 나는 임금님을 모시고 황하를 건
널 때, 말을 몰고 가는 괴물을 10리를 따라가 죽이고 돌아왔소. 나도 복숭아
를 먹을 만한가요."
하고 말했다.
경공이 입을 열었다.
"그 때 장군의 공이 컸지. 복숭아를 경을 안 주고 누구를 주겠나?"
안영은 황급히 술과 복숭아를 두 사람에게 주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전개강이 달려 나오며,
"나는 서를 쳐서 장수를 베고, 오백 명 군사를 사로잡아 서군이 뇌물을 바
치고 맹약을 맺게 했으며, 이 일로 우리 임금이 맹주가 되게 되었으니, 이 공
로면 복숭아를 먹을 수 있겠소?"
하고 말하자 안영은,
"개강의 공은 두 장군에 비해 열 배는 되는 듯하나 복숭아는 없으니 내년
에 드리기로 하고 술이나 한 잔 주시지요."
하고 경공에게 말했다.
그 말에 경공은 안타까워하며 대답했다.
"그 큰 공에 상을 못 주어 가슴 아프오."
그러자 전개강은,
"호랑이를 죽인 자, 괴물을 죽인 자는 복숭아를 먹고 10배의 공을 세운 나
는 복숭아를 못 차지하여 외국의 임금과 사신 앞에서 모욕을 당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선단 말인가?"
하고는 자살을 했다.
그러자 공손접과 고야자가,
"우리는 공이 적으면서 복숭아를 사양하지 못했으니 청렴하지 못했고, 남
이 죽는 것을 보며 따라 죽지 못한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라며 역시 뒤이어 자살을 했다.
◈인비목석(人非木石)◈
290
(사람은 생명과 감정을 지닌 동물로 나무나 돌과는 다르다)

집이 가난해서 돈으로 죄를 대신할 수도 없고, 사귄 친구들도 구해 주려 하는 사람이 없으며, 좌우에 있는 친근한 사람들도 말 한 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다. 몸이 목석이 아니거늘 홀로 옥리들과 짝을 지어 깊이 감옥 속에 갇히게 되었다.

포조의 시 '의행로란'에 나오는 시이다.
위의 시는 사마천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입고, 항변할 여지도 없이 궁형이
란 치욕적인 형벌을 언도 받고 하옥되었을 때에 임소경에게 보냈던 편지 중
일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 목석이 아닌데'라는 말은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의로행란'은 총 열 여덟 수로 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수에 인비목석과
비슷한 뜻의 심비목석(心非木石)이란 말이 나온다.

물을 쏟아 평지에 두면 각각 스스로 동서남북으로 흐른다.
인생도 또한 운명이 있거늘 어찌 능히 다니며 탄식하고
다시 앉아서 수심할 수 있으리오.
술을 부어 스스로 위로하며
잔을 들어 삶의 길이 험하다고 노래하는 것을 끊으리라.
마음이 목석이 아닌데 어찌 느낌이 없으리오.
소리를 머금고 우두커니 서서 감히 말을 못하누나.

사람은 목석이 아니기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다. 이성과 감정이
있기에 다른 동물과 달리 문화적일 수도 있고, 다툼과 전쟁 그리고 동물만도
못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람이 목석이 아니라는 것을 좋은 방향으로 나
타내야 할 것이다.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
291
(인생은 아침 해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존재이다)

내가 출전하려 할 때 자네 모친이 별세하여 나도 장례에 참석했고, 자네의 아내는 아직 젊어 재혼하였다고 들었네. 누이 두 사람, 아들 한 사람이 남아 있지만 이미 10년이 넘은 옛 일로 생사도 모르지 않던가?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고 하니 정말로 덧없는 것이네. 어찌하여 자기를 이렇게 괴롭히고만 있는가?

「한서」의 '소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무제 때 사신의 임무를 띠고 먼 길에 올랐던 소무는 도중 흉노족에게
억류당하였는데, 온갖 위협과 악조건 속에서도 절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 무렵, 소무의 옛 친구 이릉 장군이 흉노의 포로가 되어 있었으나, 그들
과 타협하여 편히 지내고 있었는데, 흉노족장은 소무를 회유키 위해 이릉으로
하여금 잔치를 베풀어 설득하도록 했다.
"자네가 이렇게 절조를 지킨다고 알아줄 사람이 누군가."
하여 이릉은 위와 같이 설득했으나 소무는 끝내 이릉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이릉도 소무의 충절에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떠났다.
◈일견폐형백견폐성(一犬吠形百犬吠聲)◈
292
(거짓말을 퍼뜨리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처럼 떠들어댄다)

속담에 말하기를 한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는 소리만 듣고 짖는다. 한 사람이 빈 말을 전하면 많은 사람은 사실로써 전한다. 세상의 이같은 병은 오래 된 것이다.

왕부의「잠부론」'현난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왕부는 후한 사람으로, 출세만이 전부로 통하는 당시 풍조에 염증을 느껴,
벼슬하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잠부론」을 지었다.
당시 사회의 문벌정치에 대한 비판과, 권력을 천자에게 집중시켜 무능한
자를 내쫓고 덕이 높은 사람을 등용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까닭은 현란(賢難)에 있다. 현란이란 어진 사
람이 되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진 사람을 얻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어진 사람의 말과 행동이 속된 사람의 질투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바른 말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는 한편, 천자
가 속된 말에 이끌리지 말고 어진 사람을 지혜롭게 가려내야 한다."
라고 강조하면서 위와 같이 속담을 인용하였다.
왕부는 비록 벼슬은 하지 안았으나 당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다음은 그와 관련된 일화이다.
도료장군 황보규가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안정에 돌아왔을 때
의 일이다.
마침 같은 고향 사람이자, 일찍이 큰 돈으로 안문 태수라는 벼슬을 샀던
자가, 역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어느 날 황보규에게
인사차 찾아왔다.
황보규는 침대에 누운 채 예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들어오자 그의 행
적을 비꼬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 있노라니 이번에 왕부가 찾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자 그는 황급히 일어나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였다. 당시 사람들
이 이를 가리켜,
"2천 석을 묵살하기를 한 봉액만도 못하게 여겼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2천 석은 태수의 봉록 2천 석을 뜻하고, 봉액은 선비들이 입는 옷의 이름
으로 곧 선비를 뜻한다. 즉 선비에 불과한 왕부가 태수를 지낸 사람보다 더
지극한 대접을 받음을 뜻한다.
◈일모도원(日暮途遠)◈
293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 너무 늦어 뜻을 달성하기 어렵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그래서 거꾸로 행동하고 지름길로 시행할 뿐이네'라고 말했다.

「사기」의 '오자서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평왕 2년, 소부(태자에게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는 벼슬)인 비무기가 태자
건의 베필감으로 진나라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 외모가 매우 출중하자 평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그 여자를 평왕이 먼저 취하게 한 뒤, 태자의 보복을
염려하여 태자를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왕은 태자를 초의 동북국경인 성북지방 수비관으로 보냈다. 그
러자 이번에는 태자가 제후와 손잡고 반기를 들려 한다고 참언을 했다.
왕이 그 말을 믿자 태부인 오사는 오히려 왕이 간신히 말만 믿고 골육인
태자를 의심한다고 간하였다. 그로 인해 오사는 유패당하고 태자는 송으로
도망쳤다.
비무기는 오사의 후환을 없애고자 그 아들 오상과 오자서까지 참언하였다.
결국 오상은 아버지를 구하려다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 오자서는 송나라로
도망하여 태자 건과 함께 오나라로 갔다.
몇 년 후 평왕이 죽고 비무기는 권세를 쥐고 전횡을 하다가 내분으로 죽
음을 당했다.
훗날 오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된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고자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죽은 데다가 초왕마저
도망가고 없자, 평왕의 무덤을 파내 시체에다 3백 대의 매질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가 그 지나침을 책망하자, 오자서는
위와 같은 말로 답하였다.
◈일의대수(一衣帶水)◈
295
(옷의 띠만큼이나 좁은 강, 육지와 육지 사이에 흐르는 강)

나는 백성들의 부모로서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양자강의 험함은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저런 강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지 아니한가.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2백여 년 만에 통일한 것은 수나라 문제
양견이다.
양견은 수나라 왕이 되면서 천하통일의 웅대한 구상을 품게 되었다. 국제
적으로는 남조의 진(陣)나라와 평화공존의 정책을 위하고, 북쪽의 돌궐족에 대
한 방비를 굳혔으며 내정면으로는 9품 중 정제도(正制度)의 폐지와 중앙집권
의 강화, 그리고 검약에 힘쓰는 등 국력의 충실을 도모했다.
한편 상대국 진(陳)나라에서는 새로이 즉위한 진숙보가, 주색에 빠져 정사
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생활고가 한층 심해지고 있었다.
이에 양견은,
"나는 즉위한 이후로 진나라 정복 구상을 해왔다. 이제 진나라 임금은 방
탕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백성들은 도탄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라는 말과 함께 위의 내용과 같은 명분을 내세워 진나라 공격개시를 선언하
였다.
양자강은 옛 부터 천연의 요충지대로서 유명하며, 삼국시대의 오나라가 북
쪽 기슭의 건강을 도읍으로 한 이후로, 동진과 남조의 송나라, 제나라, 양나
라, 진나라가 모두 여기를 도읍으로 하여, 양자강을 만리장성 삼아 북쪽의 이
민족에게 대항해 왔다.
수나라 군대 51만 8천 명이 진나라를 침공하자, 진나라의 후주는 총애하는
왕비와 함께 도망쳤다가 수나라 병사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진나라는 다섯 임
금 33년 만에 멸망하였고, 중국 전토에 걸친 대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일이관지(一以貫之)◈
296
(하나의 이치로서 모든 일을 꿰뚫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로써 관철하고 있느니라."

「논어」의 '이인편'과 '위령공편'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위의 글은 '위령공
편'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인편'을 보자,
공자가 증자에게 말했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증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러자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성실(忠)하고 용서(恕)할 뿐이시다."
라고 대답했다.
충(忠)이란 중(中)과 심(心)의 합자로, 자기의 마음속으로 성의를 다하는
'충실'의 뜻이며, 서(恕)란 여(如)와 심(心)의 합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기
의 마음과 같이 생각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공자가 역설한 '인(仁)'을 달성하는 길이라 할 수 있
다.
지금은 '일이관지'가 본래의 뜻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
으로 쓰이기도 하고, 그것만 해결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밀고 나가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 예로 '일관'이란 말과 '일사'란 말을 쓰고 있는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자천금(一字千金)◈
297
(글자 한 자를 빼거나 넣으면 천금을 준다)

그리하여 이것을 도읍인 함양의 시문이 있는 곳에 진열하여, 그 위에 천금을 걸어 제후와 유세의 선비나 빈객을 유치하기 위해, '만일 이 책에 한 글자라도 첨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천금을 주겠다'고 썼다.

「사기」의 '불위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전국시대 사군(四君)이라 하여 제의 맹상군, 위의 신릉군, 초의 평원군,
초의 춘신군이 경쟁이나 하듯 천하의 인재를 자기 문하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무렵 진의 상국(국무총리)이 된 여불위는, 자신이 사군에 들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권력과 돈을 배경으로 천하의 뭇인재들을 불러모았는데,
그 수가 무려 3천에 달했다.
그 당시는 제자백가의 저서가 널리 세상에 전파되던 시기였다. 여불위는
여기에 자극을 받아「제자백가서」를 능가할 책을 만들어 천하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식객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하여 정리한 결과 20
만 자가 넘는 방대한 책이 되었다.
여기에 고금천하의 지식이 다 망라되어 있다고 생각한 여불위는 자기의
성을 따서「여씨춘추」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것을 진나라 수도 함양성 시문 앞에 진열하고, 위와 같이 '한 글자
에 천금'이라고 걸었다.
그러나 글자를 고치고 돈을 받아갔다는 기록은 없으며, '일자천금'은 절대
권력자의 자기과시를 위한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298
(한 장수가 공을 세우면 만 명의 군사가 죽는다)

못의 나라 강과 산이 싸움의 판도에 들었으니
산 백성이 어찌 나무를 하고 풀 뜯는 것을 즐길 생각을 하리오.
그대에게 부탁하오니 후를 봉하는 일을 말하지 말라.
한 장수가 공이 이뤄지면 만 명의 뼈가 마른다.

조송의 '기해세'에 나오는 말로서, 황소의 난이 한창이던 기해년에 나온 것
이다.
황소는 양자강을 건너 북상했다가 정부군에 크게 패해 강동으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 때 만일 정부군이 계속해서 추격만 했으면 난은 완전히 평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정부군을 지휘하던 장군은,
"국가는 위급한 때에는 장병들을 사랑하고 상 주기를 아끼지 않지만, 일단
태평한 세월이 오면 장병들은 헌신짝처럼 버림을 당하고, 심하면 없는 죄까지
받게 된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나지 않도록 적을 살려 두어야만 한다."
라며 적의 완전한 섬멸을 회피하였다.
그 결과 황소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이듬해에는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
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3년 뒤에 다시 정부군에 패해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황소는 그 이
듬해에 죽고, 당나라도 이 난으로 인해 20년 정도 지나 멸망하고 만다.
◈임현물이(任賢勿貳)◈
300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겼으면 끝까지 밀어주라)

익(益)이 말했다.
"경계하셔야 합니다. 근심이 없을 때 경계하시어 법도를 잃지 마옵시고, 편안하다 하시어 놀지 마시고, 즐겁다 하여 지나치지 마시옵소서. 현명한 이를 임명하심에 두 마음을 갖지 마시고, 사악한 이를 내쫓되 의심치 마시오며, 의심스런 계획은 이루려하지 않으시면 모든 뜻이 이룩될 것입니다."

「서경」의 '대우모'에 나오는 이야기로 제환공과 관중과의 대화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환공이 관중에게 물었다.
"과인은 불행하게도 사냥과 여자를 좋아하는데 패( )에 해가 되지 않을
지?"
"해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패에 해로운 것인가?"
그러자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을 쓰지 않음이 패를 해치는 것입니다. 즉, 어진 줄을 알고도
쓰지 않으면 패를 해치고, 쓰면서도 완전히 맡기지 않으면 패를 해치고, 맡겨
놓고도 다시 소인으로 간섭하게 하면 패를 해칩니다."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제환공은 어진 관중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였
다.
이에 대해 신하들이 염려의 말을 늘어놓았는데, 그럴 때마다 환공은,
"너희들은 아직 작은 사람들이라 관중에 대해 잘 모른다."
라며 말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약한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고 천하를 호령하여 나라끼리 침
략전쟁을 못하도록 하는 한편, 이민족들로 하여금 감히 중국을 넘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태평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입향순속(入鄕循俗)◈
301
(그 고장에 가서는 그 고장의 풍속에 따른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고장의 풍속을 따른다.'

「회남자」의 '제속편'이 그 출처인데, 이와 비슷한 문구는 다른 여러 문헌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자」의 '외편'에는 '그 풍속에 들어가서는 그 풍속에 따른다'고 되어
있고,「논어」에는 '어느 고장에 가든지 그 고장의 풍속대로 살아가라'고 되어
있으며,「중용」에는 '부귀에 바탕을 두었을 때는 부귀에 맞게 행하고, 가난에
바탕하였을 때는 빈천에 맞게 행하고, 환란에 바탕하였을 때는 환란에 맞게
행한다'라는 말이 있다.
서양에도 '로마에 가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격언이 있는 것을 보아
이는 동서양을 초월한 이치라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국가 개념이 확고하지 않았던 만큼, 어제는 제나라 사람,
오늘은 초나라 사람, 또 내일은 정나라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
이었으며, 이 '입향순속(入鄕循俗)'이란 말은 그러한 현상의 반영일 뿐이다.
◈자가약롱중물(自家藥籠中物)◈
302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물건)

원행충은 박학다식한 직언거사(直言居士)로, 일찍이 적인걸로부터 중하게 보인 사람이다.
어느 때 원행충이 말했다.
"각하의 집에는 산해진미가 많이 있군요. 청컨대 저를 약물의 끝에라도 넣어주십시오."
적인걸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내 약 바구니 속의 물건이니 어찌 하루인들 없을 수 있겠는가?"

「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적인걸은 당고종의 황후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무후가 이씨 아
닌 무씨로 왕통을 이으려 하자 감연히 목숨을 걸고 간했다.
"고모와 친정 조카, 친어머니와 자식 중 어느 쪽이 가깝습니까? 아드님을
태자로 세우면 천추만대 무후를 태묘에 모셔 제사하겠지만, 친정 조카가 천자
가 되면 타성에 출가한 고모를 자기 집 태묘에 모시겠습니까?"
무후는 적인걸의 호소를 받아들여 귀양가 있는 이철을 불러 태자로 세웠
다. 적인걸이 무후의 신임을 받자 우수한 인물들이 주변에 많이 모였고, 많
은 인재들이 무후의 조정에 천거되었다.
그러한 인재 가운데 원행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박식하고 바른 말을 잘
하는 성품이었다.
하루는 원행충이 적인걸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첨하는 듣기 좋은 말만 들
으면 실패하기 쉬우니 자신처럼 직언하는 사람도 필요한 것'임을 위와 같이
표현하였다.
그러자 인걸은 껄껄 웃으며,
"내 약상자 속이야 어찌 하루인들 없을 수 있겠소."
라고 답했는데, 이는 '당신은 이미 내 약상자 속에 들어있는 물건이니 언제든
지 필요하면 쓸 수 있다는 뜻'으로, 언제든지 바른 말을 해 달라는 말이다.
◈자두연두기(煮豆燃豆 )◈
303
(형제가 서로 다투고 죽이려 하다)

문제가 조식에게 일곱 발자국을 떼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 만약 못 지으면 국법으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조식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곧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는데 콩물을 짜서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솥 아래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네.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났건만 서로 지지기가 어찌 이리 급한고'라고 짓자 문제의 얼굴색이 참연해졌다.

「세설신어」의 '문학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조는 매우 뛰어난 문장가였는데, 그의 맏아들 조비, 셋째 아들 조식 역
시 문장이 매우 뛰어났다. 그리하여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삼조(三曹)'
라고 불렀다. 따라서 조비와 조식 이 두 형제 사이에는 자연히 경쟁심리가
싹트게 되었다.
조비는 위문제가 된 후에도 동생에 대한 경쟁심리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똑똑한 동생을 제거할 구실을 찾기 위해 10살 밖에 안된 동생
조식에게 일곱 발자국 걷는 사이 시를 짓지 못할 경우 국법으로 처리하겠다
고 했다.
조식은 그 즉시 위와 같은 시를 지어 읊었고, 문제는 부끄러움에 안색이
변했다.
이후로 형제가 서로 다투어 괴롭히고 죽이려 하는 것을 비유할 때, 조식의
시구를 이용하여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뗀다'라고 하게 되었다.
◈자승자강(自勝者强)◈
304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남을 알려고 하는 자는 겉만을 아는 자이고 자기를 알려고 하는 자는 속을 아는 자이다. 남을 이기려는 자에게는 힘이 있고, 자기를 이겨내는 자는 강하다.

「노자」3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를 성실하게 다하라, 나를 버려라, 나를 없애라, 나를 닦아라, 나를 이겨
내라 등은 모두 명(明)을 앞세우고 지(智)를 뒤따르게 해야 하며, 역(亦)을 극
소화하고 강(强)을 극대화해야 인간은 인간다워진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사회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현대사
회는 남을 제압하는 힘을 향해 질주한다. 그리고 힘만 믿는 현대인은 오만하
고 방정맞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은 노자의 '유약승
강강(柔弱勝强强)'이란 말을 비웃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왕양명도 '산 속의 도적을 깨뜨리
기는 쉬워도 마음 속의 도적을 깨뜨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공자도 '나를 이
겨서 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인이라고 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으로 인한 동물적인 충동과 욕망을 이
긴다는 것이다. 어떤 외부적인 구속이 없이 자기 이성으로 부당한 생각과 유
혹을 물리치고, 후회 없는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자기를 이기는 길이다.
◈재덕부재험(在德不在險)◈
305
(나라의 안전은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함에 있지 않다)

위무후가 서하에 배를 뛰우고 중류로 내려가서 돌아보며 오기에게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위나라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은 위나라의 보배로다."
라고 하자 오기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견고함은 덕에 있지 지형의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속의 사람도 다 적국인이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사기」의 '오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무후는 오기와 함게 서하에 배를 띄우고 좌우 산천을 구경하며
내려갔다.
중간 쯤 가서 무후는 오기를 돌아보며,
"참 아름답구료. 산과 물이 이토록 천험(天險)의 요새를 이루고 있으니 이
야말로 위나라의 보배가 아니겠소?"
하고 못내 자랑스러워했다.
그러자 오기는,
"국가의 견고함은 임금의 덕에 있는 것이지 산천의 험함에 있는 것이 아
닙니다."
라는 말과 함께, 옛날에 삼묘씨는 좌에는 동정, 우에는 팽려가 있었으나 덕의
를 닦지 아니하여 우임금에게 멸망당하였고, 하나라 걸왕은 좌에 하제, 우로
태화, 남으로 이궐, 북에는 양장이 있었으나 정치를 어질게 하지 못하자 탕임
금에게 쫓겨 났으며, 은나라 주왕은 좌로 맹문, 우로 태행, 북에는 상산, 남으
로 대하가 지나갔으나 역시 어진 정치를 못하여 무왕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처럼 나라가 망하는 것은 지형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치를 올바로 하지 않음에 기인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이로 미루어 볼 때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배 안에 있는 사
람이 다 적국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간하였다.
무후는 오기의 이 말에 크게 감명을 받고 그를 서하 태수로 임명했다.
◈전거복후거계(前車覆後車誡)◈
306
(선인들의 잘못이 후세의 경계가 된다)

"속담에 이르기를, '관리가 되어 직무를 익히지 못할 때에는 마음을 다하여 지난 예를 조사해 보라'는 말이 있으며, 또 '앞의 수레가 엎어지는 것은 뒤의 수레에 경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하, 은, 주의 삼대는 오래도록 번영하고 있었거니와, 그 이유는 지난 일을 검토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번영을 배워서 얻지 못하는 사람은 성인의 지혜에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서」의 '가의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의 문제 때 가의라는 명신이 있었다. 대단한 수재로 18세 때부터 그
재능이 알려져 20세 때 박사가 되었고, 1년 만에 태중대부에 까지 올랐다.
가의는 문제를 도와 국정을 쇄신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위의 글
은 그가 올린 상소문의 일부이다. 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서,
"또 진나라는 매우 빨리 멸망하였는데, 어떻게 하여 멸망하였는지 수레바
퀴 자국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수레바퀴의 자국을 피하지 않는다
면 뒤에서 오는 수레는 곧 엎어질 것입니다. 대저 국가의 존망과 다스림, 혼
란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문제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한나라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
◈전전반측(輾轉反側)◈
307
(근심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 깨나 생각하는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시경」에 나오는 시 가운데 하나로,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 깨나 구하는도다

의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위의 시이다.
전(輾)은 반쯤 돌아 몸을 모로 세우는 것을 말하고, 전(轉)은 뒹군다는 뜻
이다. 반(反)은 뒤집는다는 뜻이고 측(側)은 옆으로 세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남녀의 순수한 애정을 노래한 것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그
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과 많
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든 경우를 두고 '전전반측(輾轉反側)'이라
표현한다.
◈절부구조(竊符救趙)◈
308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하다)

스승처럼 여기는 후영노인의 모사를 따라 왕의 침실에서 안희왕의 총희 여희를 통해 호부를 훔치고, 후영의 권고로 밤을 새워 군대가 주둔해 있는 국경으로 달려가 진비 장수에게 주니, 병부를 대조해 보고도 순순히 지휘권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사태가 원만치 않은 것을 보고 주해는 소매 속에서 40근 철퇴를 꺼내 진비의 머리를 쳐죽였다.

「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국시대 사군(四君)의 한 사람인 위나라 신릉군 위무기는 전왕(위소왕)의
작은 아들이었고, 현왕(안희왕)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신릉군은 덕이 있고 지
혜가 있으며, 또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이문을 지키는 후영이란 늙
은 문지기를 스승처럼 위했고, 백정인 주해를 귀한 손님처럼 받아 들였다.
안희왕 20년에 조나라 군사를 장평에서 크게 이긴 진나라는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 혜문왕과 평원군은 각각 안희왕과 신릉군에게 거듭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조나라를 돕는 나라가 있으면 조나라를 멸망시킨다음, 군
대를 그 나라로 보내 치겠다고 위협했으므로 신릉군이 왕에게 간청을 해도
왕은 진나라가 무서워 허락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신릉군은 후영노인의 계교대로 병무를 훔쳐(위의 글과 같이)
군대를 손에 넣는다.
군대를 손에 넣은 신릉군은 즉시 군중에 영을 내려 부자가 같이 와 있는
아버지, 형제가 같이 와 있는 형, 형제가 없는 외아들을 전부 돌려보내고 남
은 8만 대군의 군대로 진나라 군대를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후 조국에 못 돌아가고 조나라에서 10년을 지내고 있을 때, 진
나라와의 전쟁으로 다급해진 안희왕이 신릉군을 불렀다. 첩들의 모략에 넘어
간 안희왕이 신릉군을 멀리하자 타락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절부구조'는 정도(正道)는 아니고 패도( 道)이다. 그러나 큰 목적을 위해
서는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교훈도 된다.
◈절용애인(節用愛人)◈
309
(나라의 재물을 아껴쓰고 백성을 사랑하라)

공자가 말했다.
"천승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매사를 삼가고 신중히 하여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야 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의 수고를 덜며, 시기를 잘 고려해서 부려야 한다."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쟁이 났을 때 말 네 필씩이 이끄는 전차 한 대에 30명의 보병을 실어서
천 대를 낼 수 있는 나라가 천승의 나라(제후)이다.
공자는 천승의 나라와 같은 정치를 하려면 다섯 가지를 시행하라고 말했
다.
그것은 자기가 하는 일에 분수를 넘지 말고 삼가서 백성들에게 믿음을 줄
것, 물자를 낭비하지 말고 백성을 사랑할 것,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킬 때는
농사철을 피할 것 등이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직장이나 가정을 이끄는 사람도
마음 속 깊이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웃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은 아랫사람들에게 큰 영향
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랫사람이 있음으로써 웃사람이
있고, 또 아랫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는 웃사람과 끊을 수 없는 관계란 것
도 알아야 할 것이다.
절용(節用)이란 낭비를 말자는 것이지 써야 할 곳까지 쓰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착한 일을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일본이나 대만
이 외화보유고에서 세계 1,2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국민의 검소함 때문이
다.
이제 우리 각자는 어떠한지, 또한 나라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볼 때이다.
◈절차탁마(切 琢磨)◈
310
(톱으로 자르고 줄로 썰고 끌로 쪼며 숫돌로 간다)

저 기수 물가를 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도다.
빛나는 군자가 있어 끊는 것 같고 닦는 것 같으며, 쪼는 것 같고 가는 것 같도다.

「시경」의 '위풍편'에 나오는 시로서 학문과 덕을 쌓는 군자의 발전과정
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끊는 것 같고 닦는 것 같다'라는 말은 학문을 뜻하고, '쪼는 것 같
고 가는 것 같다'라는 말은 스스로 덕을 닦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위의 내용
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기수의 물가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가 아름답게 무성해 있다. 그 푸른
대나무와 같이 아름답게 무성한 군자는, 철차탁마 하여 학문과 덕을 닦아 엄
숙하고 위엄이 있으며 밝게 빛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군자를 백성들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는 것은 어떠하나이까?"
공자가 대답했다.
"훌륭하도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를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 예절을 좋아
하는 사람만은 못하니라."
자공이 다시 물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는 듯이 하고 닦는 듯이 하며, 쪼는 듯이 하고 가
는 듯이 하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사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지난 일들을 일러주었더니 닥
쳐올 일까지 아는구나."
라며 즐거워하였다.
즉, '절차탁마(切 琢磨)'란 아첨이 없는 것에서 도를 즐기기에 이르고, 교
만하지 않는 것에서 예를 좋아하기에 이르는 것은, 처음은 대강의 형체만을
만들고 그 다음 쓸고 또 갈아 아름답게 만드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정중지와(井中之蛙)◈
311
(우물안 개구리, 소견이 좁아 아는 것이 적다)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황하의 신과 북해의 신과의 문
답중 일부이다.
황하의 신(神) 하백이 처음으로 바다로 나와 보고는 그 끝없음에 매우 놀
라워했다.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북해의 신 약(若)이 위와 같이 말하였다.
이 문답을 통해 장자는 도의 높고 큼과, 대소귀천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
대소귀천의 구별을 잊고서 도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강지처(糟糠之妻)◈
312
(지게미와 쌀겨를 먹고 고생을 함께 한 아내)

"흔히 귀해지면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거니와, 이것은 인정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송홍은 잘라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변천할 때의 사귐은 잊지 말아야 하고, 조강지처는 당에서 내려오지 않는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는 돌아보며,
"잘 되지 않는군요."
하고 은근히 누나에게 알렸다고 한다.

「후한서」의 '송홍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 광무황제의 누나 호양공주가 과부가 되었다.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개가시킬 생각으로 우선 그녀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호양공주는,
"대사공으로 있는 송홍 같은 사람이면 남편으로 섬기고 싶지만 그 밖의
인물은 별로 맘이 없습니다."
라며 송홍을 지목하였다.
어느 날 광무제는 공주를 병풍 뒤에 숨겨두고, 송홍을 불러들여 위와 같이
송홍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나 온갖 고생을 함께 해온 조강지처를 버릴 수
는 없다는 뜻을 알고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조령모개(朝令暮改)◈
313
(아침에 내린 명령이 저녁에 바뀌다, 일관성이 없이 갈팡질팡하다)

조조의 논귀 속에 말하기를, '급박한 정치는 포학하고 조세한 부역은 시도 때도 없고, 아침에 명령이 내려오고 저녁에는 다른 명령이 내려온다.' 라고 했다.

「사기」의 '평춘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의 문제와 경제 때에 어사대부(부총리)를 지낸 조조의 헌책에,
"흉노족이 자주 북쪽 변방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기 때문에 둔수(경작
하면서 수비하는 일)하는 사람이 많아져, 변방에서 거두는 곡식으로는 먹지
못하는 자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부족해졌다. 이리하여 백성들로부터 곡식을
헌납 받는 사람들과 그 곡식을 변방으로 수송해 갈 사람들을 모집하여 벼슬
을 주기로 했다. 그 벼슬은 대서장(20급의 벼슬 중 위로부터 세 번째의 벼슬)
까지 줄 수 있었다."
라고 되어 있고 또 이 상소문에는,
"지금 다섯 명 가족의 농가에서는 부역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여기에 매
여 사는 사람이 둘 이상에 이르고, 관청을 수리하고 부역에 불려 나가는 등
사시사철 쉴 날이 없다. 조세와 부역은 일정한 시기도 없이 아침에 명령이
내려오면 저녁에는 또 다른 명령으로 고쳐져 내려온다. 전답 잡힐 것이 있는
사람은 반 값에 팔아 없애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돈을 빌어 원금과 같은 이
자를 물게 된다. 이리하여 논밭과 집을 팔고, 자식과 손자를 팔아 빚을 갚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즉, 지나친 세금과 부역이 일관성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농토를 잃게 되고
도탄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
314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이고 농락하다)

"앞으로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려고 한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아침이 적다고 불평을 했다.
저공이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면 어떻겠느냐?"
라고 말하자 원숭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열자」의 '황제편',「장자」의 '제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저공이란 사람은 원숭이를 좋아하여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숭이들에게,
"앞으로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
라고 하자 원숭이들은 아침이 적다며 불평하였다.
저공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조장(助長)◈
315
(도와서 억지로 자라나게 하다)

천하에는 싹을 도와서 자라게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여 내버려두는 사람은 김을 매지 않는 자이고, 무리하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싹을 뽑아 올리는 자이니,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맹자」의 '진심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어떤 사람이 곡식을 심었는데, 싹이 빨리 자라지 않자 그 싹을 조
금씩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도와주었다."
라고 말하였다.
아들이 궁금하게 여겨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런데 싹들이 자라기는
커녕 모두 말라죽어 있었다.
이처럼 쓸데없는 일, 도리어 손해를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행위를 비유할
때 '조장(助長)'이라 표현한다.
◈좌단(左袒)◈
316
(왼쪽 어깨의 옷을 벗어 붙이다)

"여씨에게 편드는 사람은 오른쪽 팔을 걷고, 유씨에게 편드는 사람은 왼쪽 팔을 걷으라."

「사기」의 '여후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고조황후 여태후는 중국 삼대 여걸 중 한 명으로, 고조에 이어 왕위에 오
른 혜제보다 더 실질적인 권한을 소유하였다. 그녀는 유씨 천하를 바꾸기 위
해 여씨들을 많이 등용하였는데,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태후는 여록과 여산을 불러,
"고조가 중신들에게 유언하기를 유씨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이를 치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씨과 왕에 봉해진 자가 많으니 유씨 일족은 변한을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그대들은 병권을 장악하여 궁중을 지켜 여씨 세력에 손상이
없도록 하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태후가 죽은 후 태위인 주발과 손을 잡고 여씨 타도를 위한 계책을 논
의하던 진평은, 여록에게 그와 친분이 있는 역기를 보내 회유하도록 하였다.
"당신들이 왕으로 있으면서 봉지로 가지 않고 군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대신들은 무슨 음모라도 꾸미지 않나 하고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
권을 태위에게 돌려 주고 봉지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대신들도 안심할 것
이고 당신들도 왕의 지위를 편안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역기의 말에 여록은 그 즉시 북군의 군권을 주발에게 넘겨주었다.
북군을 장악한 주발은 즉시 북군 군문으로 들어가 군인들에게 위와 같이
영을 내렸는데, 이 말을 듣고 모든 병사들은 왼쪽 웃통을 벗고 유씨에게 충성
할 것을 맹세했다.
◈주급불계부(周急不繼富)◈
317
(곤궁한 사람은 도와주고 부자를 더 크게 하지 않는다)

공자가 말했다.
"적(赤)이 제나라에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털옷을 입었다고 들었다. 군자는 곤궁한 사람은 돕지만 부자에겐 더하여 주지 않느니라."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제나라에 자화를 사신으로 보냈다. 자화가 떠나간 후에 공자의 제
자 가운데 한 사람이 염유가 자화의 어머니를 위하여 곡식을 보내주기로 청
했다. 그러자 공자는 여섯 말 넉 되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염유가 부족하다며 더 보내주기를 청하자, 공자는 열 여섯 말을 보
내도록 하였는데, 염유는 그것도 적다고 생각하여 무려 80섬이나 보내주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자화가 제나라로 갈 때 좋은 말과 좋은
옷을 입고 간 것을 떠올리며,
"그의 집안은 부유하지 않느냐. 군자는 곤궁에 처한 사람은 도와주되 여
유가 있는 자에게는 더 보태어 주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
318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게 하다)

또 산과 조상의 혼령을 경시하고, 많은 총애하는 신하나 미녀들을 모래 언덕으로 불러 모아 놀랐다. 즉,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늘어뜨려 숲을 만들고, 남녀들을 발가벗겨 그 사이에서 쫓는 경주를 시키고, 밤낮을 통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夏)의 마지막 왕임금은 탐욕스럽고 포악했으며, 힘은 구부러진 쇠고리를
펼 정도였다. 그는 말회라는 여인에게 빠진 채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는데,
고기는 산처럼 쌓이고 포는 숲처럼 걸려 있었으며, 술로 만든 못에는 배를 띄
울 수 있었고, 술지게미가 싸여된 둑은 십리까지 뻗어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북을 울리면 소가 물 마시듯 술못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는
데, 말회는 그것을 보고 좋아했다.
은의 마지막 임금 주는 언변에 능했으며, 손으로 맹수를 쳐죽일 만큼 장사
였다. 그 또한 걸왕과 마찬가지로 술과 여자를 가까이 했으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큰 유원지에 별궁을 지어두고 많은 들짐승과 새들을 놓아 길렀으며,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갈아 숲을 만든 다음, 남녀를 발가벗겨 그 사이를 서로
쫓고 쫓기게 하여, 밤낮없이 술을 마시며 즐겼다.
이처럼 매우 호화스럽고 추악한 형태의 술자리를 우리는 '주지육림'이라고
표현한다.
◈중구난방(衆口難防)◈
319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기는 어렵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내(川)를 막는 것보다 어렵다.

「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공이 주여왕의 언론 탄압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개천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개천이 막혔
다가 터지면 사람이 많이 상하게 되는데, 백성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내를 막는 사람은 물이 흘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백성들이 폭동
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여왕은 도망하여 평생을 갇혀 살게 되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합의에 정치를 시행하면서 이를 공화(共和)라 청하였는데,
이는 공화정치의 원시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320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다 위압으로 남을 바보로 만들다)

조고는 모반을 일으키려고 생각했지만 여러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시험을 해보기 위해 사슴을 가지고 이세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숭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시황은 순행도중에 임종을 맞게 되었는데, 죽기에 앞서 만리장성에 있는
태자 부소에게, 자신의 취를 잇도록 하는 내용의 조서를 남겼다.
그러나 이 조서를 맡고 있던 내시인 조고는, 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
고, 서울 함양으로 들어오자 거짓조서를 발표하여 부소에게 죽음을 내리고,
시황을 수행하던 호해를 황제에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이세황제다.
승상의 지위에까지 오른 조고는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야심을 가지고, 점
차로 이세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한편, 여러 신하들의 규합을 도모하였다.
한 번은 신하들을 시험해 보고자 이세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그러자 이씨는 그것이 사슴인지 말인지를 좌우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어떤
이는 조고의 편을 들어 말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정직하게 사슴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은 모조리 법률로 얽어 감옥에 넣고 말았으
며, 그 뒤로는 모든 중신들이 조고가 무서워 그가 하는 일에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온 천하가 반란으로 물끓듯하고 있을 때였다.
조고는 이세를 속이는 데에 한계가 오자 그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임시 황제 자리에 앉혔으나, 결국 자영에게 죽임을 당했다.
◈지아자기천호(知俄者其天乎)◈
321
(나를 알아줄 것은 하늘밖에 없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라고 하자 자공이 답했다.
"어찌 선생님을 알 사람이 없겠습니까?"
공자는 또,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으며,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는 천리에 통달해 가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역시 저 하늘이리라."

「논어」의 '헌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화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자공에게,
"나는 이제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라고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고 자공이 물었다.
공자는,
"하늘이 어디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되고 온갖 물건들이 생겨나지만,
하늘이 어디 말을 하더냐?"
하고 대답했다.
왜 공자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우주와 사시를 말없이 운행하는 하늘
같이 되고 싶었을까? 제자들의 수준이 가르침의 말 없이도 가르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단 말인가? 난세를 구하고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시대를 제현
하려고, 숱한 제후와 권세가들을 만나, 초순건설(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음)했지만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까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 왔지만, 더욱 하늘의 운행에 모든 것을 맡
기며 살아가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자탄 비슷하게 나를 알아줄 자는 하늘밖
에 없다고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하늘이 알아줄 것이라고 한 말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우뚝섬
을 은연중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하늘이 알아줄 학문, 인격, 이상을 가졌으
니 현세의 곤궁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
322
(자식을 아버지 이상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관중이 말했다.
"저는 늙었으니 묻지 않으심이 좋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듣건대 신하를 알아보는 것은 임금보다 나은 사람이 없고, 자식을 알아보는 아비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비자」의 '십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환공을 오패의 으뜸으로 만든 관중이 병이 들었다.
환공이 찾아가,
"중보(관중의 존호)의 병이 중한 것 같은데, 불행히 일어나지 못한다면 정
치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소."
하자 관중이 위와 같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환공은 몇몇 신하에 대하여 묻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포숙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관중은 포숙이 비록 자신의 둘
도 없는 친구지만 패자의 재상이 될 만큼 모진 데가 없다며 반대했다. 다음
으로 수조에 대하여 묻자 그는 아부파요, 소인이므로 안 된다고 했다. 환공
은 또다시 개방과 역아를 물었다. 관중은 그들은 위험한 인물이니 멀리하라
고 간곡히 부탁하면서 습붕을 천거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일년쯤 지나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이 천거한 습붕
을 쓰지 않고 자신이 신임하는 내시 출신인 수조를 썼다.
수조가 재상이 된지 3년 되던 해 환공이 남쪽 당부에 가서 있는 동안, 수
고는 개방, 역아 등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키고, 환공을 남문에 있는 침전 수
위의 방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다.
환공이 죽자 다섯 아들들이 서로 뒤를 이으려고 다투는 바람에 환공의 시
체가 67일 동안이나 방치되어, 시체에서 생긴 벌레가 문밖까지 기어 나왔다고
한다.
◈지족자부(知足者富)◈
323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부자이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부유하고, 자기를 이겨내는 힘을 행하는 자에게는 뜻이 있다.

「노자」3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족(知足)이란 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으로,
「설원담총」에는 '부는 만족할 줄 아는데 있다'고 했고, 「명심보감」에는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고 했으며, 「명언」에는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욕을 먹지 않고, 족한 줄을 알아야 자기 분수에 만족한다'고 했다.
부(富)란 '많다, 넉넉하다, 여유가 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뜻하는 바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부이다.
한 공기의 밥에 김치, 국 한 그릇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곰발
바닥이나 표범의 태를 먹어야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또 진시황처럼 자신의
장수를 위해 보통 사람들에게는 전 재산이라고 할 만큼의 많은 돈을 쓰면서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정승 안영은 가죽 옷 한 벌로 30년을 입기도 했지만, 필리핀의 이멜다처럼
수백 벌의 옷에, 수백 켤레의 구두가 있어야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막걸리 한 잔, 소주 한 병으로 이태백의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로, 하룻
밤에 룸살롱에서 수백만 원씩 술값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다.
카네기는 '돈만 부둥켜안고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
고 했다.
돈은 수단이어야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노자의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부자'라는 말은 현대인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진선진미(盡善盡美)◈
324
(착함을 다하고 아름다움을 다했다)

공자가 소악(韶樂)에 대해 '미의 극치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선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했다. 무악(無樂)에 대해서는 '미의 극치는 이루었지만 선의 극치는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논어」의 '팔일편'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즉 공자가 순임금의 악곡인 소
와 무왕의 악곡인 무를 감상한 말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에게서 천하를 물려받아, 다시 이것을 우임금에게 물려 주
었다. 순임금은 그러한 일생을 음악에 실어 나타낸 것이 '소(韶)'라는 악곡이
었다.
순임금이 이룬 공은 아름다웠고 그의 생애는 선함의 연속이었다. 그러므
로 그 이상 아름다울 수도 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자는 이 악곡을 들으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한다.
무왕은 은나라를 무찌르고 주나라를 창건한 사람으로, 그가 세운 공은 찬
란하지만 혁명이란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과정은 결코 선한 일
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공은 아름다워도 동기와 과정만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결국 미는 이룬 결과를 말하고 선은 그 동기와 과정을 말한다고 볼 수 있
다.
아름다움의 근본은 선이다. 선이 없이 아름다움이 이루어질 수 없고, 또
선은 추함이나 악함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선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차호위호(借虎威狐)◈
325
(권세 있는 사람을 배경 삼아 뽐내다)

그러므로 임금님의 땅은 사방 5천 리이고 군대는 백만이나 되는데, 이것을 오로지 소해휼에게 맡기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북쪽 사람들이 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실은 임금님의 군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마치 짐승들이 호랑이를 두려워하여 도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국책」의 '초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강을이라는 위나라 출신의 선비가 초나라 선왕에게 등용되었는데, 삼려(三
閭)라고 불려지는 소, 경, 굴의 세 씨족이 초나라를 억누르고 있어서, 이것을
뒤흔들어놓기 전에는 새싹을 내놓을 방법이 없었다.
당시는 소씨의 두령인 소해휼이 군사와 정치의 두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
기 때문에, 강을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느 날 선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북쪽에서는 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사실은 어떠한가?"
여러 신하들 가운데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소해휼의 반대편에 서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강을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호랑이는 모든 짐승을 구하여 먹습니다. 어느 때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
는데, 여우가 말하기를 '당신은 나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천제께서는 나를 모
든 짐승의 어른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나를 먹으면 천제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
짐승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여우의 말대로 함께 나갔습니다.
짐승들은 여우와 호랑이의 모습을 보자 모두 도망쳤는데, 호랑이는 그것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것이라고는 깨닫지 못하고, 여우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위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
326
(일으키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다)

태종이 말했다.
"방현령은 옛날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는 사업에 참가하여, 어렵고 쓴 맛을 낱낱이 맛보아가며 목숨의 갈림길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왔다. 그리하여 초창(草創, 사업을 처음으로 일으켜 시작함)을 어려운 일이라고 본 것이리라. 위징은 나와 함께 우리 제국을 안정하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교만하고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국가가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수성(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킴)을 어려운 일이라고 본 것이리라."

「정관정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태종이 신하들을 보고 물었다.
"제왕의 사업은 초창이 어려운가, 수성이 어려운가?"
상서좌복야(부총리)인 방현령이 대답했다.
"어지러운 세상에 많은 영웅들이 다투어 일어나 이를 쳐서 깨드린 뒤라야
항복을 받고, 싸워 이겨야만 승리를 얻게 되므로 초창이 어려운 줄 압니다."
그러나 위징이 말했다.
"제왕이 처음 일어날 때는 반드시 먼저 있던 조정이 부패해 있고 천하가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무도한 임금을 넘어 뜨리고 새로운 천자
를 기뻐 받들게 됩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시고 백성들이 따르는 것이므로 어
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얻고 나면 마음이 교만해지고 편해져서
정사에 게을러지고, 부역이 쉴 새 없고, 백성은 피폐할 대로 피폐되며, 나라에
서는 사치를 일삼고, 불급한 공사를 일으켜 세금을 거둡니다. 나라가 기울게
되는 것은 언제나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로 보아 수성이 더 어려운 줄
압니다."
당태종은 방현령과 위징 두 신하의 말을 위와 같이 열거하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수성 뿐이니 우리 다 같이 수성에 힘을 기울이자."
라고 말했다.
◈채미지가(采薇之歌)◈
327
(고사리를 캐는 노래)

저 서산에 올라가 그곳의 고사리를 캐어 먹자.
사나움으로써 사나움을 바꾸면서도 무왕은 그 그름을 알지 못한다. 신농씨와 순임금, 우임금과 같은, 성천자의 시대는 홀연히 가버렸다. 우리들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아, 죽는 길뿐이로다. 우리들의 운명도 쇠퇴하여 가고 있다.

「사기」의 '백이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말기 고죽국 군주의 아들들이었다. 아버지는 동생
인 숙제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형을 제쳐놓고 왕위에 오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왕위를 백이에게 양
보했다. 그러자 백이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며 나라 밖으로 도망
쳤는데 숙제도 그 뒤를 따랐다.
두 형제는 서백(주문왕)이 노인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평판을 듣고 가서 의
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보니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천자국인 은나라의
주왕을 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고 하는 참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그에게 간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효도라고 할 수 있
습니까? 신하의 몸으로 주군을 죽이는 것이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무왕은 끝내 은나라의 난리를 평정함으로써 주나라 천하를 이루고
말았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의 신하로서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겨,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목숨을 유지
했다. 그러다가 그 고사리 또한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하여 캐어 먹지 않
고 굶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때 지은 시가 바로 위의 '채미지가'
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
328
(하늘이 높고 말은 살이 찐다, 변방의 상황을 묘사한 표현)

구름은 많고 요성도 사라져
가을은 높고 요새의 말도 살찐다
안장을 기대면 영웅의 칼이 움직이고
붓을 휘두르면 깃 꽂은 글이 난다.

두심언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흉노라는 북방민족으로부터 빈번이 침략 당하였는
데, 흉노족은 주, 진, 육조에 걸쳐 무려 약 2천 년 동안이나 중국 왕실을 괴롭
혔다. 진이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손실하면서까지 만리장성을 쌓은 것만 보
아도 알 수 있다.
흉노는 말타기, 활쏘기, 창던지기에 능하였으며, 집단을 이루어 인마(人馬)
를 살상하고 재물을 노략질 하였다.
그들은 본토의 북쪽 광활한 초원에 근거를 두고, 방목과 수렵을 하면서 노
략질을 일삼는 무리로, 겨울이 되면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식량과 여자
를 약탈해 갔다.
때문에 북방 역경의 주민들은 가을만 되면 흉노 습격에 대한 방비에 총력
을 기울였다.
두보의 조부인 두심언은 흉노족을 막기 위해 변방으로 떠나는 친구 소미
도에게 어서 개선해 오기를 염원하면서 위와 같은 내용의 시를 보냈다.
'구름이 맑다'는 것은 정세가 조용해졌다는 뜻이며, '요성'은 전란이 있을
때면 나타난다는 혜성을 말한다. 따라서 '요성이 사라졌다'라는 말은 변방이
조용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깃 꽂은 글'이란 전쟁의 승리를 알리거나 격문을 보낼 때 빨리 날아가라
는 뜻으로 닭의 깃을 꽂아 보내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천고마비(天高馬肥)로 쓰이고 있지만, 원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는 추고마비(秋高馬肥)로 쓰이던 것이 나중에 천고마비로 변한 것이다.
◈천금매소(千金買笑)◈
329
(천금을 주고 사랑하는 여자를 웃게 한다)

동주의 「열국지」에 지금까지 속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천금으로 웃음을 산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동주의「열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서주의 마지막 임금 유왕은 포사라는 여인에게 빠져 있었는데, 포사는 좀
체 웃는 범이 없었다.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던 유왕은
혹시 비단 찢는 소리라면 웃지 않을까 하여 매일 비단 백 필씩을 포사의 옆
에서 찢게 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유왕은,
"누구든 왕후를 웃게 하는 자에게 천금의 상을 내리겠다."
고 선포했다.
그러자 포사와 손발이 맞아온 괵석보가 아뢰었다.
"봉화를 올려 제후들이 허탕치고 가는 것을 보면 왕후가 웃을지 모르겠습
니다."
유왕은 많은 지각있는 신하들의 간하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포사와 함께
여산 별궁으로 가서 놀며 저녁에 봉화를 올렸다.
가까운 제후들은 약속대로 도성에 도적이 침입한 줄 알고, 저마다 군대를
거느리고 밤을 세워 즉시 여산으로 모여 들었다.
여산별궁에서 음악에 맞춰 술을 마시며 포사와 함께 즐기고 있던 유왕은
사람을 보내 제후들에게,
"다행히 밖의 도둑은 없으니 멀리서 수고할 것까지는 없는걸 그랬소."
라고 말했다.
제후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 깃발을 둘둘 말아 수레에 싣고 부랴부랴 돌아
갔다.
누각 위에서 그 광경을 보던 포사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유왕은,
"사랑하는 그대가 한 번 웃으니, 백 가지 아름다움이 솟아나는구료. 이
모두가 괵석보의 공이니 약속한 대로 천금의 상을 내리겠소."
라고는 괵석보에게 천금을 주었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유왕은 죽음을 당했는데, 이는 유왕이 위급할 때 아무
리 봉화를 올려도, 전처럼 거짓일 것이라고 생각한 제후들이 그를 도와주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330
(선녀의 옷은 바느질 자국이 없다)

서서히 그 옷을 보자 꿰맨 자리가 없었다.
한에게 말했다.
"하늘의 옷은 본래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

「태평광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곽한이 뜰에 누워 있는데 절세미인이 나타났다.
"저는 천상의 직녀이온데,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 울화병이 생겨 상제의
허락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습니다."
하며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요구하더니 매일밤 찾아왔다.
그러다 칠월칠석에 즈음하여 며칠 안 오다가 다시 나타났다.
"남편과의 재미는 좋았소?"
하고 곽한이 물었더니 직녀는,
"천상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 질투는
마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곽한이 조용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니 바느질한 곳이 전혀 없었다. 곽한은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어찌 옷에 바느질 자국이 없소?"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그녀가 벗은 옷은 그녀가 돌아갈 때면 저절로 가서 그녀의 몸을
덮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느 날 밤 그녀는 상제가 허락한 기한이 다 됐음을 알
리며 조용히 떠나갔다.
그 뒤로 곽한은 홀로 일생을 마쳤다.
◈철부지급(轍 之急)◈
332
(수레바퀴 자국 속에 붕어의 다급함, 다급한 위기나 처지)

"내가 어제 올 때에 중도에서 부르는 것이 있었소. 뒤를 돌아보니 수레바퀴가 지나간 가운데 붕어가 있었소. 내가 그에게 물어 말했소.
'붕어야, 그대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붕어가 대답해서 말하기를,
'나는 동해 파도의 신하이다. 그대 어찌 말과 되의 물이 있는데도 나를 살리려 하지 않는가?'
내가,
'좋다. 나는 남쪽 오월의 왕에게 놀러가려 한다. 서강의 물을 불려서 그대를 맞이하려 하니 좋겠는가?'
하고 말했소."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가 가세가 매우 어려울 때 감하후라는 사람에게 양식을 빌리러 갔다.
그러자 감하후는,
"좋소. 내 영지(領地)에서 세금이 들어오는 대로 삼백 금을 빌려드리겠
소."
하였다.
이 말에 화가 치민 장자는 정색을 하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붕어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소.
'나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에 있소. 나는 한 두 바가지 물만 있으
면 살 수 있소. 그런데 당신은 태평스럽게 당신 볼 일을 끝내고 물을 떠다
주겠다니, 차라리 일찌감치 건어물 가게로 가서 나를 찾으시오."
하고 말이오."
여기서 장자의 뜻은, 크고 작은 것이라든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쓰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역설한 것
이라 볼 수 있다.
◈철주(  )◈
333
(팔을 잡아당기다, 남의 일을 못하게 막다)

"무슨 까닭인가?"
두 신하들이 대답해 말했다.
"복자천께서는 신하들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서, 옆에서 팔을 내밀어 저희들의 팔굽을 치고 끌어당기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필적이 나쁘다고 하여 몹시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곳의 관리들도 다 웃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사퇴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제자 복자천은 공자보다 49세나 어린 제자로서, 20세 남짓한 노애
공 때 단보란 지방의 장관이 되었다.
부임하면서 임금 가까이 있는 두 관원을 청해 함께 단보로 가서, 고을 관
원들에게 신임장관에게 인사차 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시켰다.
그런데 그들이 정성들여 이름을 적고 있으면 복자천이 옆에서 그들의 팔
을 잡아 흔들었다. 글씨가 엉망이 되자 복자천은 글씨를 탓하며 야단을 쳤
다.
두 관원은 일을 그만두고 조정으로 돌아와 임금에게 고하였다.
"복장관 밑에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에게 성명을 기록하라 시
키고는 옆에서 일부러 팔을 흔들어 글씨를 잘못되게 하고, 저희들 보고는 글
씨가 그게 뭐냐고 꾸중하니 저희들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애공은,
"자천은 과인의 부족을 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밑에 사람들에게 필
요없는 간섭을 했다."
하고 말하고는 사자를 보내 말했다.
"이제부터 단보는 과인 것이 아니고 경의 것이다. 과감히 다스리고 결과
는 5년 후에 보고하라."
복자천은 그 후로 아무에게도 마음을 쓰는 일없이 오직 스승 공자에게서
배운 정치에 따라 행하였다고 한다.
◈청운지지(靑雲之志)◈
324
(천자가 될 사람이 있는 곳에 푸른 구름과 오색구름이 떠 있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

장구령의「조경견백발」,「사기」의 '백이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구령은 현종 때의 어진 재상으로, 이임보의 모략으로 인해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의 감
회를 읊은 시가 위에 적혀 있다. 이 시를 다시 풀이하면,
"그 옛날 푸른 꿈을 안고 재상이 되어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늙은 나이에 미끄러져 물러나고 말았다. 거울 속에 비친
백발을 보며 서글퍼하는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오."
하는 내용이다.
옛날에 청운이란 말이 꼭 출세의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백이열
전」에서 태사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간에 있는 사람들이 덕을 닦아 이름을 세우고자 청운의 선비의 힘을
빌지 않으면 어떻게 후세에 그 이름을 전할 수 있겠는가?"
즉, 백이숙제 같은 사람도 공자 같은 성인이 그를 위대하게 평해 주지 않
으면, 그 이름이 세상에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개탄한 것으로, 여기서는 공
자가 청운지사로 지적된 것이다.
◈청천백일(靑天白日)◈
335
(맑게 갠 하늘에서 밝게 비치는 해, 아무 잘못도 없이 결백하다)

봉황새와 지초는 둘 다 현명함과 어리석음으로써 아름답고 상서롭다고 한다. 푸른 하늘의 밝은 해는 노예까지도 그 맑고 밝음을 안다. 이것을 음식에 비유하면, 먼 곳의 진미에 이르러서는 곧 즐기는 자가 있고 즐기지 않는 자가 있다. 쌀이나 수수나 회나 적에 이르러서는 어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듣겠는가?

한유의「여최군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한유가 양자강 남쪽의 선성으로 부임한 친구 최군에게 어서 돌아
와 주기를 호소한 글로, 그는 세상에서 최군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답한 말을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유는 이 글에서 먼 지방에서 나는 진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쌀이나 수수나 회나 적은 별로 맛있지는 않지만 누
구나 즐겨 먹는다. 이처럼 푸른 하늘의 흰 해의 맑고 밝음은 노예까지도 인
정하는 것처럼, 최군의 훌륭함은 만인들이 깨닫는 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다.

「주자전서」에는 주자가 맹자를 평하여,
"청천백일과 같이 씻어낼 때도 없고 찾아낼 흠도 없다."
고 했다.
'청천백일하에 드러났다'든가 '청천백일하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라든
가 하는 말은 훤히 밝다는 뜻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
336
(맑게 갠 하늘에서 치는 벼락, 뜻밖의 재난이나 변고)

방옹이 병든 채 가을을 지나려다가
홀연히 일어나 취한 듯이 붓을 놀린다
정말로 오랫동안 웅크렸던 용처럼
푸른 하늘에서 벽력이 휘몰아치듯 한다
비록 이 글이 괴이하게 기이한 듯하나
가엾게 여겨준다면 볼 만도 하리라
하루 아침에 이 늙은이가 죽기라도 하면
천금으로 구해도 얻지 못한다

남송 육류의 시 가운데 일부이다.
방옹은 육류의 호이다. 공사(公私)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온 이 시인은,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정열에 고독을 즐기는 인품이기도 했다.
위의 시를 풀어보면, '음력 9월은 가을이 끝남에 가깝다. 여름에서 가을까
지 병상에 누워 지낸 방옹은, 어느 날 아침에 닭보다 일찍 눈을 뜨고 병을 이
기는 기분으로 일어났다. 취묵(醉墨)은 술에 취한 감흥을 타고 붓을 옮기는
것을 말하거니와, 여기에서는 오랜 병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유머러
스하게 말한 것'이다.
또한 '부들부들 떨면서 오래간만에 붓을 잡고, 놀라운 세력으로 쓰기 시작
하는 것이다. 정히 오래 칩거한 용과 같이 구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간다.
용이 하늘로 올라갈 때는 하늘이 진동하는 격렬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
자기는 그 용이며, 기세에 맡기어 쓰는 그 모습은 번쩍번쩍 빛나는 번개와 같
다.'고 했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은 한편으로는 붓을 움직이는 형세의 놀라움을, 또 한
편으로는 병든 사람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표현했다고 해석된다. 경묘하고 솔
직하고 유머러스한 표현이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딱하게 생각하고 그냥 가만히 지나쳐 버리면, 어떻게 존재를 계속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금으로 구해도 얻지 못한다'라는 표현은 표
면으로는 어디까지나 경묘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역시 늙으막의 적막을 담고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337
(쪽풀에서 나온 푸른색이 쪽보다 푸르다)

군자가 말했다.
"배움은 그쳐서는 안된다. 푸름은 이것을 쪽에서 취하였지만 쪽보다는 푸르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물보다 차다."

「순자」의 '권학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의 시는 권학시의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
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걸음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푸름과 얼음의 비유로 말하고 있다. 푸름은 쪽이라고
불려지는 1년초의 잎에서 취하는 색깔이지만, 그 색깔은 원료인 쪽보다도 더
욱 푸르다.
얼음도 물을 얼림으로써 만들어지거니와, 그 얼음은 물보다도 더욱 차갑
다. 두 가지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
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초미지급(焦眉之急)◈
338
(눈썹이 타게 될 만큼 위급한 상태)

중들이 장산의 불혜 선사에게 묻기를,
"어느 것이 가장 급박한 글귀가 되겠습니까?"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불이 눈썹을 태우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오등회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금릉, 장산의 불혜 선사는 만년의 나라의 어명으로 대상국지해선사의 주지
로 임명되자 중들을 보고 물었다.
"주지로 가는 것이 옳겠는가 이곳에 그냥 있는 것이 옳겠는가?"
도를 닦아야 하느냐 출세를 도모하느냐를 물은 것이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선사는 붓을 들어 명리(名利)를 초탈한 경지를 게(偈)로 쓴 다음
좌하(앉은 채 세상을 떠남)했다.
선사가 살아 있을 때 중들로부터, '어느 것이 가장 급박한 글귀가 되겠습
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불이 눈썹을 태우는 것(焦眉之急)이다."
라고 대답했는데, 이 화소미모가 소미지급(燒眉之急)이 되고, 소미지급이 변해
서 초미지급(焦眉之急)이 되었다고 한다.
◈촌철살인(寸鐵殺人)◈
339
(한 치밖에 안 되는 쇠로 사람을 죽인다)

종고가 선(禪)을 논하여 말했다.
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와서 회롱함과 같지만, 이것은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단지 촌철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학림옥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남송 나대경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을 시동에게 기
록하게 한 것으로 천(天), 지(地), 인(人), 세 부분의 18권으로 된 책이다. 그
중 '지부(地部)' 제7권 '살인수단(殺人手段)'이란 제목 아래 종고선사가 선에 대
해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려 하면 수레에 병기를
가득 실어 가지고 와서, 차례차례로 그것을 꺼내어 휘둘러야 하지만, 그런것
으로는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촌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가 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선의 요체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는 하지만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
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
하여 성급하게 이런저런 방법을 쓰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
두 서투른 수작일 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천 몇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대하여 온 몸과 온 영혼을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뜩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간단한 한마디 말과 글로써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드는 그런 경우를 가리
켜 '촌철살인'이라고 한다.
◈축록자불고토(逐鹿者不顧兎)◈
340
(사슴을 쫓는 사람은 토끼를 잊어버린다)

짐승을 쫓는 사람은 눈으로 큰 산을 보지 못한다. 즐기고 욕심냄이 밖에 있으면, 곧 밝음이 가리워지는 바가 된다.

회남자의「설림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의 시를 다시 풀이하면, 태산에 들어가 짐승을 쫓는 사람의 눈에는 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짐승을 쫓기 위하여 눈이 어두워져 있다는 뜻이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허당록」에,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키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라고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사기」의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괴통의 말 가운데,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은지라 천하가 함께 쫓았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한 사슴은 곧 황제의 자리란 뜻이다.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말은, 앞의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한다'와는 달리, '큰 이득을 뜻하는 자는 작은 이득을 돌아
보지 않는다'혹은 '큰 일을 뜻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는 구애되지 않는다'라는
뜻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341
(봄은 왔으나 봄답지 않다)

되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같이 않으리

이태백의 시이다.
왕소군은 한원제 때의 후궁으로 양가의 출신이며, 이름은 장이요, 자는 소
군이었다. 그녀는 절세 미녀였으나 흉노와의 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족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된 불운한 여자였다.
그러한 그녀의 불운을 안타깝게 여겨 읊은 시가 많은데, 이태백의 '왕소군'
이란 시의 일부가 바로 위의 것이다.
윗 시의 앞부분을 보자.

소군 백옥안장을 떨쳤다
말 위에 올라 홍안에서 눈물이
오늘은 한의 궁실 사람
내일이면 되땅의 첩이 될 몸

또 구양수의 명비곡에 왕소군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가 있다.

한나라 궁중에 미인이 있었는데
천자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네
어느 날 아침 하나라 사신 따라
멀리 선우의 나라에 시집가게 되었네
절세의 미인은 천하에 둘도 없는 것
한 번 잃으면 다시 얻기 어렵다네
명비를 밉게 그린 화공들 잡아 죽였으나
이미 그르친 일을 돌이킬 수 있었겠는가
천자의 이목이 닿는 곳 일도 그랬으니
만리 밖 오랑캐들을 어찌 누를 수 있었으리
한나라의 계책은 참으로 졸렬했고
명비가 자신의 미모를 뽐낸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네
그녀는 떠나면서 눈물을 흘려
나뭇가지 위 꽃들에 뿌렸는데
해 저물자 광풍 일었으니
꽃잎들 이리저리 날리다 뉘 집에 떨어졌을까
남보다 빼어나게 예쁜 사람은 박명한 법이니
봄바람 원망 말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해야지

위의 시도 왕소군이 호땅으로 억지 시집을 가서 오랑캐와 살게 되었으니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출호이반호이(出乎爾反乎爾)◈
342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되돌아간다)

"증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네게서 나간 것은 네게로 돌아오는 것이니라'하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이제야 자기네들이 당했던 것을 되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그들을 허물치 마십시오. 임금께서 어진 정치를 베푸신다면 백성들은 웃사람에게 친하게 대할 것이고 웃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맹자」의 '양혜와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추목공이 맹자에게 물었다.
"우리나라와 노나라가 싸울 때 상관들이 서른 세 명이나 죽었는데 백성은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관들이 죽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 그들을 모두
처벌하자니 수가 많고, 그냥 두자니 웃사람 죽는 것일 미운 놈 바라보듯 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에 맹자는,
"흉년이나 재난이 든 해에 늙은이와 어린이는 굶어 죽고 젊은 장정들은
사방으로 살길 찾아 간 수가 몇천 명입니다. 그때 임금의 곡식창고와 재물창
고에는 곡식과 재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을 구제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하여 구제할 대책을 세우지 않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것은 웃사람이 직무에 태만하여 아랫사람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증자의 말을 위와 같이 인용하였다.
맹자는 목공에게 백성들을 탓하기 전에 어진 정치를 베풀 것을 권고했다.
임금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그 밑에 있는 벼슬아치
들도 백성들을 업신여기거나 학대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도
웃사람을 공경하고 웃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다. 임금 된 자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드니 그 밑에 있는 벼슬아치들도 자연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길 뿐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려 하지 않게 된다.
◈취모멱자(吹毛覓疵)◈
343
(털을 입으로 불어가며 털 속에 흉터라도 없는가 살피다)

"어지러움을 다스림에는 법에 의지하였고, 가볍고 무거움은 저울에 따라 판단하였다. 하늘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본성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털을 불면서 작은 흠집을 잡아내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았으며, 때를 닦고 알기 어려운 것을 살펴보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한비자」의 '대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작은 허물은 누구나 있는 법이다. 사생활까지 완전무결하기는 어려운 것
이다. 인간이 완전무결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라는 사람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큰 일하는 사람은 대체(大體)만을 바로잡아 나갈 뿐, 그런 사소한 일
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마치 보이지 않는 흉터를 털어 불어가며 찾아
내듯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은 흉을 가려주고 못 본 체하는 것
이 부하를 거느리는 도리요, 남을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남의 허물을 찾기
에 몰두하면 남도 자신의 허물을 찾는다는 것과, 남을 물에 빠뜨리려면 자기
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측은지심(側隱之心)◈
344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맹자」의 '공손추하'에 있는 말이다.
윗말은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장한 인성론으로 '사단설(四端設)'이라고도 하
며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한다.
맹자는 정치를 말할 때 요순의 치세, 즉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는데, 왕도정
치가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착한 것'이라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
가면 '인의예지'의 네가지 덕을 완성하여,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계속한다.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왕이 먼저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가 있다. 백성에게 차마 못
하는 정치가 있다.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 다스리기를
손바닥 위에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
음을 가진다. 이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는 까닭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을 듣
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맹자는,
"사람들에게 이 사단(四端)이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
다. 이 사단이 있으면서 스스로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
치는 사람이요, 그 임금에게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임금을 해치
는 사람이다. 무릇 나에게 사단이 있는 것을 다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불이 처음에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에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이
것을 확충시켜 나간다면 온 사해(四海)를 보존하기에도 넉넉하지만, 진실로 이
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고 결론을 내렸다.
◈치인설몽(痴人說夢)◈
345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한다, 종잡을 수 없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다)

황산곡이 도연명의 책자(責子) 시를 보고 발문을 쓰기를, 그 사람의 견해를 상상하여 보면 어찌 다만 어여삐하고 자상하기만 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바로 도연명의 자식들은 다 불초하다고 하겠지만 이것을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꿈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냉제야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때 서역의 고승이었던 승가가 지금의 인휘성 근처를 여행하고 있
을 때였다.
그가 하는 행동에 남다른 점이 많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의 성이 무엇(何)이오?"
"내 성은 무엇(何)이오."
"어느 나라 사람(何國人)이오?"
"어느 나라 사람(何國人)입니다."
뒷날 당나라의 문인이었던 이옹이 승가를 위해 비문을 썼을 때, 그는 승가
가 농담으로 받아넘긴 대답인 줄도 모르고 비문에 쓰기를, '대사의 성은 하
(何)씨이고 하국사람(何國人)이었다'라고 했다한다.
「냉제야화」를 쓴 남송의 석혜홍은 이옹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리
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옹은 꿈으로써 진실이 되어 진짜로 어리석음을 끊었다."
◈침어락안(沈魚落雁)◈
346
(물고기는 잠기고 기러기는 떨어진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고, 큰 사슴과 사슴은 그들을 보면 결단코 도망갈 것이다. 이 네 가지 중 누가 천하의 올바른 색을 알겠는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이야기로 설결과 왕예의 문답형식을 빌어
왕예가 말을 한다.
"백성들은 소와 돼지고기를 먹고, 큰 사슴과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
을 달게 여기고, 새나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네가지는 모두 올바른
맛을 알고 있다. 원숭이는 편저라는 추한 원숭이를 암컷으로 쫓고, 큰 사슴
은 사슴과 더불이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더불어 논다."
그리고는 모장과 여희 이야기로 '침어락안'이야기가 나온다.
이 '물고기가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가 보면 높이 난다'는 침어락안이 '모
장과 여희 같은 절세미인'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 쓰고 있
는 말이다. 물고기나 새들이 숨는 것은 사람이 두려워서이지 미녀이거나 아
니거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침윤지참(沈潤之讒)◈
347
(아무 표시 없이 은근히 스며들다)

자장이 명철함에 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물이 스며드는 듯한 참소와 피부를 자극하는 하소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명철하다 하느니라. 은근히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를 자극하는 하소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멀리 내다본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논어」의 '안연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장이 명철함, 즉 사리에 밝음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은근히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를 자극하는 하소연에 따라 일을 하지 말아
야 사리에 밝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참소와 하소연에 따라 하지 않으면 가
히 먼 곳을 내다본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때때로 감정의 옳지 못한 작용에 의해서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물이 스며들 듯이 서서히 침투해 오는 참소나, 피부를
자극하는 하소연이 바로 그 옳지 못한 감정의 작용으로서, 사리를 옳게 파악
하기 위해서는 참소와 하소연에 이끌리는 감정을 버리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는 것이다.
침윤지참은 어질고 정직한 사람을 모략할 때 쓰는 수법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
348
(다른 산에서 나온 돌로 옥을 갈 수 있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 하늘에 들리는 도다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혹은 잠기어 연못에 있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오직 당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로서 가히 구슬을 갈 수 있도다

「시경」의 '소아'에 나오는 시이다.
옥돌은 강도가 다른 돌로 갈아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인용하여 학명(鶴
鳴)이란 제목으로, '초야에 있는 어진 사람들을 데려다가 임금의 덕을 더욱 아
름답게 만드는 재료로 삼으라'는 뜻으로 지은 시이다.
첫 절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고 위의 시는 그 다음절의 시이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는 온 들에 들리는 도다
물고기가 잠겨 연못에 있다가 혹은 물가로 나와 노는 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 오직 개암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도, 가히 써 숫돌로 삼을 수 있도다

이 시에서 '타산지석'은 참고의 대상, 비교의 대상이 된다. 자기보다 못하
거나 더 뀌어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의 학문과 덕을 닦는 데 좋
은 참고가 되고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한수(他人 睡)◈
349
(다른 사람의 코고는 소리, 옆의 다른 세력을 그냥 둘 수 없다)

"강남무죄는 알고 있다. 오직 천하는 일가다. 침대 곁에서 다른 사람이 드르렁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송사(宋史)」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태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양자강 남쪽 일대
인 강남 지방만은 이욱이 금릉(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
다.
송태조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합병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이씨는
듣지 않았다. 도리어 이씨는 서현이란 자를 보내어,
"강남은 죄가 없다.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 공격하지 말아달라."
고 청해 왔다.
그러나 융통성 없이 강남무죄만을 반복해서 되뇌이는 서현의 대답에 화가
난 태조는, 마침내 화가 나서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위와 같이 선언하였다.
서현은 겁을 먹고 물러났고, 금릉은 얼마 후 송의 대군 앞에 항복하고 말
았다.
◈탐어여악(耽於女樂)◈
350
(여자의 풍류놀이를 탐하다, 여악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다)

여악을 받은 융왕은 너무 좋아서 소와 말(목축업 국가)을 돌보지 않아 만이나 죽었다. 유여가 귀국하여 융왕에게 가서 아무리 간해도 듣지 안자 진나라로 가니, 유여를 상경으로 삼아 유여의 계략대로 하여 12국을 병합했다.

「사략」'일권', 「한비자」'십과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가 노나라 중도의 읍장이 된 이후에 사방 고을의 장들이 다 그를 본
받아 정사를 하게 되고, 나라가 잘 다스려져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
람이 없고 태평가를 부르니, 이웃 제나라 왕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경공의 신하 여서가 아뢰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제거하는 것은 터럭을 불어버리는 것처럼 쉬운 일입
니다. 임금께서 공자를 후한 봉급과 높은 지위로 초빙하시고, 한편으로 노나
라 정공에게는 여악을 보내어 그의 마음을 교만하고 미혹하게 하십시오. 그
러면 여악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할 것입니다."
경공이 옳게 여겨 여악 28인을 노정공에게 보냈다.
정공이 여악을 즐겨 정치를 게을리하게 되고 공자의 간하는 말에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다.
「한비자」에는 융왕이 진나라에 유여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
다. 진왕이 유여와 이야기를 해보니 성인에 가까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
래서 내사에게,
"유여는 성인이다. 그를 융왕에게 보내기는 정말 아까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으니 내사는,
"임금께서 그 나라에 여악을 보내서 그 나라 정치를 문란하게 만드시고
유여는 진나라에 더 머물도록 요청하십시오."
라고 했다.
진왕이 내사의 말대로 즉시 시행하여 유여는 멸망하고 진나라는 12국을
병탄한다.
◈퇴고(推敲)◈
351
(문장을 다듬고 고치다)

인가가 드문 곳에 한가한 집이 있어
잡초에 묻힌 길이 거친 정원과 통하고 있네
새는 연못가 나무가지에서 자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당나라 때의 시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는 한때 불가에 귀의하기도 했으나, 뒤에 작은 벼슬
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나귀를 타고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도중 문득
시상이 떠올라 시를 지었는데, 바로 위의 것이다.
가도는 시를 지을 때 시간도, 장소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망각한 채 몰
아지경에 빠지는 버릇이 있었다. 나귀를 탄 채 두 글자, '밀었다(推), 두들겼
다(敲)'를 놓고 어느 것이 더 적당한가를 생각하며 가던 도중 귀인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행차는 공교롭게도 당대의 대문장가 경조윤(수도의 장관) 한유의 행차였다.
행차길을 침범한 혐의로 한유 앞으로 끌려나간 그는 사실을 말했다.
한유는 노려워하기는커녕 말을 멈추고 한참 생각하더니,
"역시 민다는 퇴(敲)보다는 두들긴다는 고(敲)가 좋겠군."
하며 가도와 나란히 행차를 계속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문학적인 친구가 되었고, '퇴고'란 말은 문장을 다듬는
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투편단류(投鞭斷流)◈
352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막는다, 병력이 많고 강대하다)

석월이,
"진나라에 장강의 험함이 있고, 진나라 조정에 혼란의 증후도 없는데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
라고 하자 부견은,
"우리 대군의 채찍으로도 강의 흐름을 차단시킬 수 있다."
고 답했다.

「진서(晋書)」의 '부견제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진의 왕 부견은 강북을 통일한 이후 남방의 동진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
하려고 동진 효무제 때 스스로 융졸 60만, 기병 27만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
했다.
권익은 동진에는 현명한 신하들이 많다는 이유로, 또 석월은 동진은 야자
강의 험란함에 의거하고 있어 불리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부견은,
"우리 대군의 채찍으로도 강의 흐름을 차단시킬 수 있다."
라고 호언하며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여 낙양으로 도망쳤다.
결국 부견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전진은 서진에 의해 멸망했다.
◈파과지년(破瓜之年)◈
354
(여자의 나이 열여섯 살, 초경이 있게 되는 나이)

푸른 구슬 참외를 깨칠 때
님은 사랑으로 넘어져 뒹굴었네
님에게 감격하여 부끄러워 붉히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님의 품에 안겼네

손작의「정인벽옥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나라 손작의 시는 '파과시(破瓜時)'란 종들이 딸을 주인에게 바치더 ㄴ때
라고도 하고, 경도가 처음 나오는 때, 또는 사랑을 알게 되는 열여섯 살이라
고도 풀이한다. 과(瓜)란 글자를 쪼개면 팔이 둘이 된다. 즉 8×2=16이 된
다.
청나라의 원매인 '수원시화(隨園詩話)'에는,
"외를 깨치니, 즉 풀어서 말하여 첫 월경이 시작됨이 왔을 때, 외를 깨침
과 같이 곧 홍조를 호게 된다. 안 그런가?"
라고 했다.
또 청나라의 적호의「통속편」에는,
"살피건대, 풍속에 여자가 몸을 깨침으로써 외를 깨친다 하거니와, 안 그
런가?"
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송나라 축목의「사문유취」에 기록된 것을 보면, 당나라의 여동빈
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서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파과는 첫 월경이 있을 때와 처녀성을 잃는 것을 주로 말한다.
◈파로대(罷露臺)◈
355
(지붕없는 정자 만들기를 그만두다)

황제가 지붕없는 정자를 만들 마음으로 설계를 시켰더니 예산이 백금이 들겠다고 보고가 되었다. 백금은 중산층 열 집의 재산과 맞먹는 돈이었다. 황제는 자신을 위해 그런 돈을 쓸 수 없다고 토대 짓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래서 민정에 마음을 쓰는 것을 가리켜 파로대라고 하게 되었다.

「사기」의 '효문제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 제4대 효문황제는 성군이라고 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명군임에는 의
논의 여지가 없다.
황제는 23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궁실, 동산, 수레, 의복 등 어느 하나 불리
지 않았다. 임금의 호사는 백성의 부담이라고 하여 검소하게 살았다.
자신이 검은 빛깔의 비단을 입음으로써 검소를 솔선했고, 부인도 옷을 땅
에 끌지 못하게 했다. 오왕이 조회에 안 나오니까 괴장을 하사했고, 장무라
는 자가 뇌물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뇌물보다 훨씬 많은 하사금을 내렸고, 군
문을 찾았을 때 군중에서는 수레를 달릴 수 없다고 하니까 황제 스스로 말을
끌고 들어가 장군을 오히려 칭찬하고 상을 주며,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오로
지 덕으로 백성을 교화했다.
황제의 그런 모습에 공경대부도 풍류를 자제했고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
끄러워하며, 상하가 예의에 맞는 풍속을 이루어 국내가 평안했다. 또한 백성
들이 풍족하게 살아 후세 왕들이 이에 미치기 어려웠다고 한다.
◈파천황(破天荒)◈
356
(급제하는 사람이 없음을 깨다)

당나라의 형주는 의관들이 모이는 곳이니, 해마다 사람들을 천거하여 보내도 많이 이름을 이루지 못한다. 이름하여 말하기를 '파천황해'라고 한다. 시종이 된 유세가 형주의 해로써 급제했다. 그래서 '파천황'이라고 불렀다.

송나라의 손광헌이 지은「북몽쇄언」에 윗글이 실려 있다.
수나라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는 청조 말기 폐지될 때까지 1,300년간이나 실
시되었다.
그 과거제도는 유교의 경전에 대한 교양과, 시문에 대한 재능과, 정치에
대한 식견 등을 주로 출제한 공개경쟁 시험제도에 의하여, 유능한 인재를 전
국으로부터 빠짐없이 흡수하려고 한 것으로, 그 이전의 문벌편중의 폐단을 타
파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도였다. 더구나 뛰어난 암기력과 해박한 지식을 요
구하였기 때문에, 지방으로부터 중앙에 이르는 몇 차례의 시험에 급제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진사과라는 시험이 있었는데, 그 시험자격은 각 지방에
설치한 국립학교의 성적이 우수한 자와, 지방장관이 시행하는 선발시험에 합
격하여 장관이 중앙에 추천하는 자의 두 종류가 있었다.
후자의 선발시험 합격자는 '해'라고 불려졌다. 모든 일에 통달해 있는 사
람이라는 뜻이다.
유세의 급제가 얼마나 화제가 됐느냐 하는 것은, 당시 형남군 절도사인 최
현이 파천황전이라고 하여 상금 70만 전을 유세에게 보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 상금만으로도 과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포락지형( 烙之刑)◈
357
(죄인을 숫불에 타죽게 하는 아주 잔인한 형벌)

제후로서 배반하려는 자가 있으면 주왕은 이에 형벌을 중하게 하여,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불 위에 세우고, 죄인으로 하여금 올라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달기와 더불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포락지형'이라고 이름하더라.

「사기」의 '은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은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공물로 바쳐진 달기라는 여자에게 빠져 있었는
데, 그의 모든 행동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궁궐을 크게 짓고
놀이터를 만들며, 재물을 모으느라고 세금은 무거워져만 가자 백성들의 원성
이 높았고, 제후들의 반기도 늘어만 갔다.
그러자 주왕은 위와 같이 '포락지형'이라는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 자신을
비방하거나 배반하는 자를 처벌했다.
주왕과 달기는 이 광경을 보고 박장대소했으니,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포류지질(浦柳之質)◈
358
(갯버들 처럼 연약한 체질)

고열은 동진(東晋)의 간문제(簡文帝)와 같은 나이였지만 머리가 먼저 희어졌다. 문제가 '그대는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의 머리는 물버들 같아서 가을을 맞으면 곧 잎이 지는 것이오. 임금의 머리는 송백과 같이 설상을 겪으면 더욱 무성해지는 것입니다."

「세설신어」의 '언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동진의 고열지는 간문제와 동갑이었으나 일찍 머리가 하얗게 희어있었다.
그것을 본 문제와 고열지 사이의 대화가 위에 있다.
고열지는 자신은 '포류지질', 간문제는 '송백지질'에 현명하게 비유하면서,
황제의 건강한 모습에 자신은 먼저 시든다는 군신간의 예절까지 갖춘 멋진
대답을 하였다.
고열지는 몸이 허약해서 머리는 일찍 희어졌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송백같
이 곧아 권세에 아부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아들 또한 그림 그리는 재주와 기행으로써 '개지삼절(愷之三絶)'이라
고 일러졌는데, 그가 바로 후세에 문인화의 시조가 된 고개지였다.
◈포벽유죄(抱壁有罪)◈
359
(값비싼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죄가 없어도 화를 입게 된다)

"주나라 속담에 필부는 죄가 없어도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죄가 된다고 했다. 내가 구슬 때문에 화를 부를 필요가 없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완벽이란 고사에 보면 약한 조나라가 화씨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강한
진나라가 성 열다섯과 바꾸자고 한다. 당대 최대의 보물이라는 화씨벽을 가
지고 있찌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국제 분쟁이었다.
'상사수'라는 고사에서도, 한빙이란 사람이 어여쁜 아내를 두었기에 전국시
대 송나라 강왕에게 아내를 뺏기고 출정하여 죽는 비운을 겪는다.

우나라 임금의 아우인 우숙이 옥을 가지고 있었다. 형인 우공이 그 옥이
탐이 나서 달라고 하자 처음엔 거절했으나 곧 후회하고 '포벽유죄'라고 하며
형에게 구슬을 바쳤다. 얼마 후에는 우숙이 가지고 있는 보검을 달라고 요구
해 왔다.
그러자 우숙은,
"형은 만족을 모른다. 아마 머지 않아 내 목숨까지 달라고 할지도 모른
다."
라고 반란을 일으켜 우공을 쳤다.
그로 인해 우공은 홍지로 도망을 치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청색 금강석 반지를 가졌던 사람 중 제명에 죽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또한 절세미인을 부인으로 둔 신하 가운데 왕들에게 죽
음을 당한 사람이 하나 둘인가? 권력자가 달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다가 억지
죽음을 당한 사람 또한 하나 둘인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스
스로 파멸을 자초한 예들이 비일비재하다.
◈포호빙하(暴虎馮河)◈
360
(맨주먹으로 범을 잡고 걸어서 강을 건넌다)

자로가,
"만약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나이까?"
하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맨손으로 호랑이엑 덤비고, 맨발로 강을 건너려 하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그런 무모한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니라. 반드시 어려운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며, 미리 계획을 세워서 성공하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니라."

「논어」의 '술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감히 포호는 하지 않고 감히 빙하는 하지 않지만
그 하나만을 알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이 시는 악정에 대한 개탄을 담은 것으로, 눈앞의 이해에만 정신이 팔려
앞으로 오는 결과를 생각지 못하는 위정자의 안타까움을 나타낸 시다.
공자가 안자를 크게 칭찬하자 자로가 옆에 있다가 위와 같이 질문했다.
안자가 학문과 수양에 뛰어나다면, 용기와 결단성으로는 누구에게도 양보
할 수 없다고 자부하는 자로서는 물을 만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의 그 같은 경솔한 태도를 항상 꾸짖어 오곤 했다. 그
래서 공자는,
"맨손으로 범을 잡고 헤엄쳐서 황하를 건너다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과
나는 함께 하지 않는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두려운 생각을 갖고 꾀를 쓰기
를 좋아하여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나는 함께 하고 싶다."
라는 말로써 자로의 만용을 제어하였다.
무모한 용기는 자신과 남까지 파멸시키는 것으로 지식인이 행할 바가 아
니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용기의 바탕에는 의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知)도 따라야만 빛을 내는 것이다.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
361
(멀리 떨어져 있다)

임금은 북해에 있고 과인은 남해에 있으니, 지금의 상태로는 바람난 말이나 소라 할지라도 서로 미치지 못한다. 임금께서 내 땅으로 건너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까닭인가?

「사기」의 '제환공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환공이 가까이 하는 여인 가운데 채나라 공주가 있었는데, 동산의 연못
에서 뱃놀이를 할 때, 지나친 장난으로 환공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으로 쫓겨
났다.
환공은 일시적 감정이었으나 채나라는 그 일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 다
른 곳으로 개가시켜 버렸다.
화가 난 환공은 송, 진, 위, 정, 허, 조나라의 제후를 모아 군대를 이끌고
채나라를 정복하러 나섰다. 채나라를 멸망시키고 환공은 그 여세를 몰라 선
봉우대를 끌고 초나라로 향했다.
이에 놀란 초성왕은 사신을 연합군 진영으로 보내 제환공의 본심을 묻게
하며 위와 같은 말을 한다. 그러자 환공을 대신하여 관중이 대답했다.
"옛날에 소강공이 우리의 선군 태공망에게 '제공에게 죄가 있을 때는 정벌
하여 주나라 왕실을 도우라'하고 말씀하셨다. 지금 초나라는 천자에게 보낼
공물을 게을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임금께서는 그것을 구하려고 오신 것이
다. 또 주나라의 소왕이 남쪽을 정벌하고 그대로 귀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임금께서 그 이유를 들으려 하시는 것이다."
사자는 대답했다.
"공물을 게을리한 것은 우리 임금의 죄입니다. 이제부터는 바치도록 하겠
습니다."
이리하여 초성왕은 굴완을 특사로 보내 화평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충돌을
피하고, 환공은 이로 인해 명실상부한 패자가 된다.
그래서 '풍마우불상급'이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풍성학려(風聲鶴 )◈
362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아무것도 아닌 것에 놀라 겁을 먹다)

살아남은 자들은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밤에도 도망쳐서,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다 적의 군대가 달려오는 소리로 들렸다. 풀이 무성한 길을 걸어가고 들에서 노숙을 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겹쳐 열 사람 중에 7, 8명이 죽었다.

「진서(晋書)」의 '사현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동진의 명장 사현은 서진의 왕 부견이 이끄는 백만의 군사를 맞아, 겨우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군사로써, 회하 상류인 비수에서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맞이했다.
먼저 사현의 참모 유뇌지가 정병 5천을 이끌고 낙간에서 서진의 선봉을
격파하고 장수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사현은 적의 총 지휘관인 부융에게 사
자를 보내 이렇게 청했다.
"귀하의 군대를 조금만 뒤로 후퇴시켜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물을 건너
가 한 번의 싸움으로 승부를 가르겠습니다."
상대를 무시하고 있던 부견은 얼마 안 되는 적이 물을 반쯤 건너 왔을 때
기습작전으로 간단히 이를 해치울 생각으로 후퇴를 승낙했다.
후퇴를 개시하고 선봉에 있던 군대가 되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뒤에서 뜻
하지 않은 혼란이 일어났다.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은 후미의 군대는 선봉에 섰던 군대가 강을 건너오
는 것을 보자 싸움에 패해 물러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또 그 뒤쪽에 있던 군사들은 앞의 군사가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것을 보자 덩달아 겁을 먹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리하여 자기 군사가 모두 적군으로 보이는 혼란 속에, 서로 짓밟으며 달
아나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났으며,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군사가 뒤쫓아 온 걸로 알고, 가시밭길을 걸으며
한데서 밤을 보냈다. 거기에 굶주림과 추위까지 겹쳐 열에 일곱, 여덟은 죽
고 말았다.
청각적인 착각과 아울러 산천의 풀과 나무까지 다 적의 군사로 보였다는
'초목개병'이라는 시각적인 착각도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필부지용(匹夫之勇)◈
363
(좁은 소견에 계획도 방법도 없이 혈기만을 믿고 마구 날뛰다)

"왕께서는 소용(小甬)을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검을 이루만지며 눈을 부릅뜨고, 네놈 같은 것은 내 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등은 필부의 용맹으로 기껏해야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부디 좀더 커다란 용기를 갖도록 하십시오."

「맹자」의 '양혜왕'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인자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는
데, 은나라의 탕왕이 갈나라를 섬기고 주문왕이 곤이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는데, 주태왕(주
문왕의 아버지)이 훈육을 섬기고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
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도를 즐기는 사
람은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의 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
안케 합니다."
그러자 제선왕이 말했다.
"그런데 과인에게는 용기를 좋아하는 한 가지 병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바로 위의 내용이다.
「사기」의 '회음후열전'에도 한신이 항우를 평하는 글에,
"항왕의 대성질타는 모든 사람이 다 겁을 먹고 주저앉아 버리나, 그는 능
력있는 장수를 쓰지 못하였은 즉 결국 이것은 필부의 용맹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필야사무송(必也使無訟)◈
364
(송사가 안 생기도록 정치를 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송사를 듣고 재판을 함에 있어서는 나도 다른 사람과 같으나,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해야 되느니라."

「논어」의 '안연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죄인을 옳게 다스리고 시비를 올바로 가려내는 것은 성인이라고 특별히
뛰어나게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죄를 짓는 사람이 적고 지비를 제기해 오
는 사람이 적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송사의 어려움이라기보다, 인간 생활에 송사가 없도
록 노력해야 하고, 또 백성을 다스리는 위정자들도 그것을 근본으로 삼고 정
사에 임해야 함을 뜻한 것이다. 즉, 송사가 없어지도록 도덕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백성의 죄지은 자를 잘 묶어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묶여
들어가지 않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인의 힘 쓸 바임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정치인의 의무는 행하지 않고 형벌만 하려는 것을, '그물질하는 것'이
라 표현하였다.
◈하면목견지(何面目見之)◈
365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볼 것인가)

하늘이 나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내 어찌 건너가겠는가? 또한 나는 전에 강동(江東)의 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거니와, 지금은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줄지라도, 내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겠는가?

「사기」의 '항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항우의 우세로 전개되던 항우와 유방의 싸움은 장기화되면서 역전이 되고
말았다.
극한 상황으로 몰린 항우는 800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하였
는데 동성에 이르자 겨우 28명의 기병만이 남았다.
이제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항우는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군대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번의 싸움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하늘이 나
를 멸망시킨 것이지 내가 싸움에 약한 때문은 아니다. 그 증거를 보여 주겠
다."
이렇게 말하자 큰 소리를 치며 말을 달려 한나라 대군 속으로 베어 들어
갔다. 한나라의 장병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좌우로 흩어졌다. 항우는 마주치
는 긴 칼을 떨어뜨리고 적장 한 사람을 베어버렸다. 이 사이에 항우가 잃은
부하는 불과 두 사람 뿐이었다.
항우는 여기에서 동쪽으로 도망가 오강에 이르렀다. 오강에서 배를 준비
하고 기다리고 있던 정장(亭長)이 말했다.
"강동은 좁다고는 하지만 땅은 사방 천 리나 되며, 사람들은 수십 반이나
있습니다. 이곳도 왕노릇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제발 급히 건너 주십시오.
한나라 군대가 오면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웃으면서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하필왈리(何必曰利)◈
366
(어찌 꼭 이익만 말하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利)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맹자」의 '양혜왕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가 양혜왕의 초청을 받아 혜왕을 만났다.
양혜왕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주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 주겠습니
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왕께서 만일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씀하
신다면 대부들은 그들대로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할 것이며, 선비나 서민들은 또 그들대로 어떻게 하면 내 한 몸을 이롭게
할 수가 있겠느냐고 할 테니, 웃사람이나 아랫사람을 막론하고 오직 이를 추
구하는 데에만 급급하면 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예를 들어서 만승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공
경인 천승 집안이며, 천승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대부인 백승 집안이다. 만에서 천을 차지하고 천에서 백을 차지한다면 전체
의 10분의 1을 차지한 것이 되므로, 결코 적은 것이 아닌데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그 임금을 죽여서라도 마저 다 빼앗지 않고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利)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요소이다. 한 개인이 이익추구
에만 몰두한다면 온갖 불의한 행동을 서슴지 않다가 몸을 망치게 마련이며,
한 가정에 있어서도 그 구성분자들이 각자 이익에만 급급하다보면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불화가 빚어지고, 형제가 서로 다투게 되어서 그 집안은 무너지
고 만다.
정자(程子)는,
"사람이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일을 행한다면 얻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따르게 마련이며, 오직 인과 의에 입각해서 일을 하면 이익을 추
구하지 않도라도 이익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라고 말했다.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367
(밑에서부터 배워 위에까지 도달한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하느니라."

「논어」의 '헌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학이상달'의 의미는 '학문과 도를 좋아하고 지켜 나가는 군자는 날이 갈
수록 인격이 완성되어 허물어지고 타락할 뿐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점점 고
상해지고 소인은 점점 천박해진다.'
라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는,
"남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기를 어여쁜 이성을 어여쁘게 생각하듯 하며,
부모를 힘을 다해 섬기고 임금을 몸을 바쳐 섬기며, 친구에게 진실됨이 있으
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學)고 말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학(學)은 글 공부 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인격의
수양을 의미한다.
공자도,
"먹는 데 배부른 것을 찾지 않고, 거처하는 데 편한 것을 찾지 않으며, 일
에 민첩하고 말에 조심하여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잡으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 했다.
◈한단지몽(邯鄲之夢)◈
368
(한단이란 지방에서 꾼 꿈,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

여옹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세상의 일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노생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한참 있다가 사례해서 말했다.
"저 총애와 치욕의 운수도, 영달이나 전락의 이치도, 삶과 죽음의 정도 다 알았나이다. 이것은 선생께서 내 욕망을 막아주신 것입니다.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노생은 여옹에게 두 번 절하고 가버렸다.

당나라의 심기제가 쓴「침중기」라는 전기 소설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이
다.
당현종 때 도사(道士)인 여옹이 한단으로 가는 도중 주막에서 노생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는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하다가 여옹으로부터 베개를
빌어서 잤다. 그 베개는 도기로 만든 것으로 양 끝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개 구멍이 열리더니 속이 환히 밝아왔다. 노생은 일어나
그 구멍으로 들어가 어느 부잣집에 이르러 당대 제일 가는 최씨집 딸과 결혼
을 했다.
노생은 재산도 날로 불어나고 거기다 과거에 급제까지 하여, 고을의 원이
되어 크게 선정을 펴서 3년 후에는 수도의 장관이 되어 장안으로 승진, 부임
해 온다. 그는 오랑캐를 무찌르고 꾸준히 승진하여 드디어 재상까지 된다.
그러나 간신의 모함으로 역모 혐의로 잡혀가게 되어 자살하려는 것을 부
인이 말려 못하고, 사형은 면해 멀리 남방으로 좌천되어 갔는데, 몇해 후 모
함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상으로 앉게 된다.
다섯 아들에 손자가 열 명, 며느리도 다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렇게 50년 동안 영화를 누리다가 세상을 뜬다.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잠을 깨고 보니 주막집이었고 옆에 여옹이 있었다.
노생은,
"아니 꿈이었소?"
하고 물었다.
그 후의 일은 위의 글에 나와 있다.
이 이야기로 인해 덧없는 인생을 비유해서 '한단지몽', '한단몽', '황량지몽',
'여옹침', '황량일취지몽', '노생지몽'등으로 불리워지는데, 이 이야기는 인간의
부귀영화나 영고성쇠가 꿈같이 허무한 것임을 비유해서 쓰여지고 있다.
◈한단지보(邯鄲之步)◈
369
(연나라 청년이 한단에서 걸음걸이를 배운다)

"또한 그대는 걷는 법을 배우러 수릉의 젊은이가 한단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아직 그 나라의 걸음걸이에 능하지 못하였는데 제나라의 걸음걸이마저 잃어, 곧 엎드려 기어서 돌아갔을 뿐일세. 당장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의 방법을 잊고, 그대의 본분을 잃어버릴 것일세."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의 후배인 공손룡이 장자의 선배인 위모에게 장자의 사상이나 이론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위모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그 지혜가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을 다투고 있는 어리석음을 깨닫
지 못하고 있으면서, 장선생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다는 자네의 생각은 마치
모기의 등에 산을 지우고 그 산을 옮겨 놓겠다는 것과 같네. 또한 그 극묘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도 없으면서 한때의 승리에 자적하는 사람은 곧 우
물안 개구리가 아닌가? 장자는 장차 황천을 밟고 대황에 오른다네. 남쪽이
없고 북쪽이 없으며, 사방의 만물 속에 녹아들고,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잠
긴다네. 서쪽이 없고 동쪽이 없음은 검고 어두움의 시작이어서 크게 통함에
돌아간다네. 그대는 곧 눈 앞이나 입 끝으로 구하여 알려 하고 있군. 이것
은 곧은 대통(竹筒)을 사용하여 하늘을 보고, 송곳을 써서 땅을 재는 것이니
또한 작지 아니한가? 어서 돌아가게."
그리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공손룡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도망쳤다고 한다.
◈한우충동(汗牛充棟)◈
370
(수레에 쌓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까지 닿게 된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정도였다. 공자의 뜻에 맞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음을 다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당나라 유종원의「육문통선생묘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의 첫머리는,
"공자가「춘추」를 지은 지 천오백 년이 된다. 「춘추전」을 주석한 사람
이 다섯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 셋이 통용되고 있다. 온갖 주석을 하는 학자
들이 백 명, 천 명에 달한다."
라고 되어 있다.
즉, 유종원은「춘추」의 해석을 잘못한 책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육문통 선생은 보통 학자가 아니고, 공자가 지은 본래의 뜻을 알고 있는
훌륭한 「춘추」학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밖의 많은 학자들의 무익한
「춘추」에 관한 저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과장하여 '충동우한우마(充棟宇
汗牛馬)'라고 썼다.
'책을 덮어놓고 다 믿는 것이 되면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는 맹자의 말
역시 유종원이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어화(解語花)◈
371
(말을 이해하는 꽃, 꽃어럼 아름답고 말까지 알아듣는 미인)

명황(明皇) 가을 8월에, 태액지에 천 송이의 흰 연꽃이 있었다. 그 중 몇 가지에는 꽃이 무성하게 피었다. 황제는 양귀비와 더불어 잔치하고 감상했는데, 좌우가 모두 감탄하고 부러워했다. 오래도록 하여 황제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좌우에게 일러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하는 꽃과 견줄 만하도다."

오대(五代)의 왕인유가 엮은「개원천보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귀비의 아버지는 촉주(蜀州)의 사호(司戶)였다. 그녀는 처음엔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아내였지만, 장안의 동쪽 여산에 있는 온 천장인 화청궁에서
호색가인 현종의 눈에 띈 이후 현종의 애첩이 되었다.
아들의 아내를 애첩으로 삼는 것을 세상이 꺼려할 것을 염려하여, 현종은
양귀비를 일단 도교의 절로 보내어 중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후궁으로 들어오
게 했다.
그러나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혜이부지위정(惠而不知爲政)◈
372
(은혜롭기는 하나 정치는 할 줄 모른다)

맹자가 말했다.
"자산은 은혜스럽기는 하나 정치를 할 줄을 모른다. 11월에 인도교(人道橋)가 이루어지고, 12월에 가서 차교(車橋)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이 물을 건너는데 근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정나라의 대부 자산은 어진 재상으로 이름이 있다. 진수와 유수를 지나다
가 백성들이 물을 건너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자기
가 타고 있는 수레에 실어서 건너게 해주었다. 이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에서 나오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자산은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은혜스럽기는 하나 정치
할 줄을 모른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농한기를 이용하
여 11월에 인도교를 세우고 12월에 차교를 시설한다면 백성들이 물을 건너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추운 겨울에 발을 물 속에 넣고 내를 건너는 일이 없도록, 장마
철이 지나는 즉시 다리를 만들어 주었어야만 했으며, 자기가 보지 않는 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물에 발을 넣고 건너는가를 알았어야만 했다.
나라의 힘으로든 고을의 힘으로든, 또 마을 사람의 힘으로든 힘에 맞게 편
할 도리를 강구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정치란 것을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
이다.
정치의 원칙을 세우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여 온 나라 백성들에게
골고루 은혜를 입힌 뒤에, 벽제( 除,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집안의
통행을 금하던 일)를 하면서 당당하게 다니라는 맹자의 논리는 극히 당연한
논리라고 하겠다.
◈현두각(見頭角)◈
373
(재능이나 역량이 남보다 유달리 뛰어나게 나타나다)

자후는 젊어서 정민(精敏)하고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아버지의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소년이라 할지라도 이미 스스로 성인이 되어, 능히 진사에 합격되고 참신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씨 가문에 아들이 있다'고 하였다.

한유의「유자후묘지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후는 유종원의 아들로 한유와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한유가 나이는 다섯 살 위이지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친구 이상의
돈독한 사이였다. 유종원은 날카로운 기운의 선비로서 21세에 진사에 합격하
였으나 43세에 호남성 영주의 사마로 좌천된 이후, 중앙의 정치에 돌아오지
못하고, 47세 때 다시 남쪽 광서성의 유주자사로 전임이 명하여져, 그 해 그
땅에서 생애를 끝맺게 된다.
그의 문장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미증유의 경지를 열게 된 것은, 그의
후반생의 불행이 시작된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모범이 된 그의 명문
장은 그의 불행과 교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유의 문장과
함께 그의 문장은 '당송팔가문'과 '문장궤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유자후묘지명」은 유종원의 유언에 따라 한유가 쓴 것으로, 조상의 일로
부터 아버지의 공적 그리고 유종원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경력이나 성
격, 일에 대한 업적, 우정, 유씨 땅에서 노예를 해방시킨 일 등을 기록하고 있
다.
◈호접지몽(胡蝶之夢)◈
374
(자연과 나를 잊어버리는 일, 자연과 내가 한몸이 된 경지)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스스로 즐겨서 뜻하는 대로 가고 있어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깨달으니 곧 장주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했다가, 갑자기 깨달으니 곧 장주가 되어 있어다.
이에 대해 장자는,
"알지 못하겠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장주와 나비와는 곧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을 자연이 된다고 말한다.

「장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것을 즐
기는 가운데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가, 갑자
기 깨달으니 곧 장주가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장자는,
"알지 못하겠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장주와 나비와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물
화(物化)라는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이 생기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
고 하였다.
그러한 만물이 하나로 된 절대의 경지에서 있게 되면 인간이 장주가 곧
나비일 수 있고, 나비가 곧 장주일 수도 있다. 즉, 꿈도 현실도 죽음도 삶도
구별이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은 만물의 변화
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가면 참다운 우주의 신비, 실존의 진리,
참된 도를 터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제물(齊物)'이란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같은 것으로 본다는 뜻으로, 세상
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초월하여 높은 경지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한결같이
보이는 것이다.
◈화서지몽(華胥之夢)◈
375
(화서 나라의 꿈을 꾸다, 무심코 꾼 꿈에서 생의 진리를 깨닫다)

그때였다. 황제는 낮잠을 자는 동안 꿈에 태고시절 무위의 제왕인 화서씨의 나라로 가서 놀게 되었다. 그 나라에는 지배자가 없이 자연 그대로였다.

「열자」의 '황제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황제는 15년 동안 천하가 자기를 떠받듦으로 기뻐서 오관(五官)의 즐거움
을 쫓아 생활을 했다. 그러나 몸은 여위어가고 정신은 흐려져 갔다. 그래서
다음 15년간은 천하를 잘 다스리기 위해 지혜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
나 몸과 정신은 더욱 파리해져 갈 뿐이었다.
황제는 생각을 달리하여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대궐에서 나와, 태고
시절 무위의 제왕인 대정씨가 있던 집에 들어앉아,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몸을
가다듬어 석 달 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 때 위의 내용처럼 황제가 낮잠을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태고시절
무위의 제왕인 화서의 나라에 간다. 거기에는 욕심, 삶을 즐기는 것, 죽음을
싫어함, 일찍 죽는 것, 자기를 위함, 남을 멀리함, 사랑, 미움, 거역, 순종, 이
익, 손해 등이 없었다. 불에 타는 일도 칼에 상하는 일도 없었고, 공중과 지
상을 마음대로 다니고, 아름답거나 추함이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
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꿈에서 참 도를 깨우친 황제는 깨어난 후 세 명의 재상을 불러 이를 설명
하고, 이후 28년 동안 천하를 잘 다스려 거의 화서씨의 나라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끔 되었다.
이 화서의 나라는 도가의 이상사회를 그린 것으로, 무심무위(無心無爲)가
도의 극치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화씨지벽(和氏之壁)◈
376
(화씨가 발견한 구슬)

구슬이란 임금들이 매우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화씨가 바친 옥돌이 아름다운 것이 못되어도, 임금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두 다리를 잘린 뒤에 보물임이 판명되었다. 보물로 판명되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한비자」의 '화씨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나라에 화씨가 산 속에서 돌로밖에 보이지 않는 옥돌 원석을 주워와서
초나라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은 옥공에게 감정을 시켰던 바 옥이 아닌 돌이라고 했고, 왕은 임금을
속인 죄를 물어 화씨의 왼쪽 다리를 자르게 했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다시 원석을 바쳤다. 그런데 이번에
도 돌이라고 하여 오른쪽 발이 잘렸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원석을 품에 안고 사흘 밤낮을
소리내어 울었는데, 눈물이 마르자 피가 흘렀다.
문왕이 이 소문을 듣고 옥공에게 원석을 다듬게 하였다. 그러자 돌에 불
과하던 것이 천하에 다시 없는 보물로 변하였는데, 이후로 이 구슬을 화씨벽
이라 불렀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한비자는 위와 같이 말을 했다. 그리고는,
"주옥은 임금이 열심히 구한다. 화씨가 바친 것은 구슬이 돌이라도 임금
에게 해가 없는데, 두 다리를 자르고 가까스로 감정을 받게 되었다. 지금 왕
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의 악을 금하는 일을 구슬 구하기 만큼도 열중하지 않
는다. 그래서 법이나 기술의 선비가 헌책(獻策)하고 거친 구슬을 바치면 죽임
을 당할 것이다."
라고 했다.
구슬은 처음에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빛을 발하면 차지하기 어렵다.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라는 호소가 담겨있는 화씨지벽 예
화에서 인물 알아보기의 어려움과, 옳은 정책을 알아보는 지도자가 적음과,
다리를 잘리면서까지 구슬이라고 주장하는 지조있는 선비들의 어려운 처신을
그림으로 보는 듯하다.
◈화룡점정(畵龍點睛)◈
377
(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

장승요가 금릉의 안락사에 두 마리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매번 이야기하길 점을 찍으면 날아가 버린다고 했다. 사람들이 허망한 말이라고 생각하여 그 한 마리에 점을 찍으니 순간 뇌성을 치며 벽을 부구고 한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한 마디 점을 안 찍은 용은 그대로 있었다.

「수형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조의 양나라 사람 장승요는 관계(官界)에서는 우군장군과 오흥 태수 등
을 역임한 사람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화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가 언젠가 벽에다 울창한 숲을 그렸더니, 이튿날 많은 새들이 날아들다
가 벽에 부딪혀 죽었다고 한다.
장승요의 화룡점정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가 언젠가 도읍인 금릉(남
경)에 있는 안락사 벽에다 네 마리의 용을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눈동자를 그리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며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려보라고 재촉하
였다.
그는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더니 그 용이 벽을 차고 뛰어나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천황사의 벽에 용 두 마리를 그리고 역시 눈동자를 그
리지 않았지만, 수만 금의 돈으로써 눈동자를 그리라는 부탁을 받고 눈동자를
그려 넣자 역시 날아올라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화룡점정'은 지금은 문장이나 그림의 중요한 부분을 채워 넣는다거나 어
떤 일의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킨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화우계(火牛計)◈
378
(소 꼬리에 불을 붙여 밤중에 적진으로 돌진지켜 나라를 구하다)

연나라 군대가 즉묵을 포위했을 때, 전단은 성에 소 천여 마리를 모아 그 뿔에 칼을 묶고 꼬리에는 기름이 묻은 갈대를 매달아 그 끝에 불을 붙이고, 성에 구멍 수십 개를 뚫어 밤을 타서 소를 놓고 장사 오천 인이 그 뒤를 따라가며 적군을 치며 나가니 연나라 군사가 크게 놀라 패주했다.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연나라 소왕은 악의를 총대장으로 이웃나라의 도움을 받아 제나라 70여
성을 눈 깜짝할 새에 함락시키고, 즉묵과 거 두 성을 3년 동안 포위만 한 채
항목만을 기다리는 대치 상태에 있었다.
그 사이 연소왕이 죽고, 즉묵의 새 지도자로 전단이 등장했다.
전단은 첩자를 보내 악의를 모함하여 연혜왕으로 하여금 해임시키게 하고,
기겁으로 하여금 무모한 짓을 하게 해서 제나라 민중을 흥분, 단결 시키고 만
들고, 또 항복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잘 봐달라고 뇌물을 기겁에게 바친다.
전단은 포위군을 승리감에 도취시켜 즉묵에서 보낸 고기와 술을 마시고
춤추며 밤 늦게까지 즐기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미리 성 밑을 파서 적의 진
지로 돌격할 수 있는 지하도를 여러 곳에 만들어 두고, 천여 마리의 소를 붉
은 비단으로 오색의 용을 그린 옷을 입히고, 양쪽 뿔에 칼을 붙들어매고 꼬리
에는 기름이 묻은 갈대를 매달았다.
적이 술에 취해 잠에 빠진 한밤중에 장사 5천 명이 칼을 들고 소의 뒤를
따라갔다. 성 밑 지하도를 통해 적의 진지 가까이 가서 일제히 소의 꼬리에
불을 붙였고, 쏘는 꼬리가 뜨거워지자 미친 듯이 연나라 진지를 향해 달렸다.
겨우 잠이 깬 연나라 군사는 용처럼 생긴 괴물이 칼을 달고 들이 닥치자
대항할 생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뿔에 스치기만 하면 죽거나 상하였다.
장사 5천 명은 뒤처진 군사를 처치하며 전진했다.
성 안에서는 북소리와 함성이 요란하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징과 꽹과리를
울려 크게 소리를 내서 경천동지하는 듯 만들었다.
연나라 대장 기겁은 전사하고, 연나라 군사는 달아나기에 바빠, 적에게 항
복했던 70여 성에서 일제히 연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제나라는 회복되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379
(뼈를 바꿔놓고 탈을 달리 쓴다)

황산곡이 말하기를,
"시의 뜻은 궁진함이 없고 사람의 재주는 한이 있다. 한이 있는 재주로서 궁진함이 없고, 뜻을 쫓는 것은 도연명이나 두보일지라도 교묘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뜻을 말하며, 그 뜻을 규모로 하여 이를 형용하는 것, 이것을 탈태법이라고 말한다."

혜홍의「냉제야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황정견은 소식과 함께 북송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박학다식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는데, 그의 독자적인 수법을 도가의 용어를 빌려 포현한 것이
'환골탈태'이다.
이것은 곧 '황정견은 두보의 시를 일컬어 영단한 말로 쇠를 이어서 금을
이룸과 같다'는 말이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 빠진 경치도 곧 아름다운 자연으로 변하는데, 그
것은 연금술사가 쇠에 한 알의 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
다는 말이다.
영단은 시상을 의미한다.
도에서는 영단 혹은 금단을 먹어서 보통 사람의 뼈를 선골로 만드는 것을
환골이라 하고, 탈태(奪胎)의 태(胎)도 선인의 시에 보이는 착상을 말하는데,
그것은 시인의 시상이 마치 어머니의 태내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그 태
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시경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탈태라고 하는 것이
다.
남송의 중 혜홍이 쓴「냉제야화」에 위에 있는 황산곡의 '환골탈태법'해석
을 보자.
"환골탈태란 표절과는 다르다. 한시(漢詩)에 있어서 선인이 지은 시의 어
구나 결구만을 바꾸어 자작시처럼 꾸미는 표현법이다. 환골탈태의 본래 뜻은
문장 미화가 아니라, 선가(先家)에서 연단법(鍊丹法)에 의해 새로운 사람이 되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380
(작은 일의 처리에 큰 인물은 필요없다)

공자가 무성에 갔을 때 현가(弦歌)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큰 칼을 쓸 것이 있느냐?"
자유가 대답해 말했다.
"전에 제가 선생님께 배움을 들었을 때는, '군자는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은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하셨나이다."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무성이란 고을에 갔을 때, 사방에서 거문고 소리와 비파
소리, 그리고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는 자유가 그 지방의 읍재로 있었는데, 그는 읍재가 되면서부터 그 지
방의 사람들에게 예악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흐뭇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빙그레 웃으면서
"얘야,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 같은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무슨 예악이 필요하
냐'는 뜻이다.
이에 자유가,
"아닙니다. 저는 전에 선생님에게 군자는 도를 배우면 아랫사람을 사랑하
고, 소인은 도를 배우면 웃사람이 부리기 쉽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이는 자유가 도로서 아랫 사람을 다스리고 있음을 뜻한 것
이다.
사람이란 항상 냉철한 이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조금 전 공자가
한 말도 바로 그런 것으로, 단지 제자의 대견스러움을 흐뭇해 하면서 한마디
해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다시 자유의 말을 듣고 보니 모든 것
은 전부 뜻과 이치로써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수행하는 제자를
불러 모으고,
"그의 말이 옳다."
고 했다.
◈효빈(效 )◈
381
(옳고 그름을 모르고 남을 무조건 흉내내다)

서시가 가슴을 앓아 그 마을에서 찡그리자, 그 마을의 추한 여자가 보고 아름답다고 하여, 돌아와서 또한 가슴을 받치고 찡그렸다.
그 마을의 부자는 이것을 보고 굳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처자를 이끌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그녀는 찡그림을 아름답다고 알았을 뿐, 찡그림의 아름다운 까닭을 알지 못했다.

「장자」'천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월나라에 서시라는 미인이 있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으로
서시의 일거수 일투족은 곧 그 고장 여인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땐가 서시가 가슴앓이를 했는데, 가슴을 누르고 눈썹을 찌푸
리며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있자,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여인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감탄하며, 그 후로는 모두 가슴을 누르고 눈썹을
찌푸리고 기침을 하면서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 유행을 본 마을의 어느 부자집에서는 무서워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
고 딸을 외출하지 못하게 했으며, 문이 없는 가난한 집은 아내나 딸을 데리고
마을에서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을의 여인들은 서시가 어째서 그런 모습을 했는지 까닭을 모르는 채, 단
지 겉보기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것이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후에 서시는 구천(월왕)의 계략에 의해 오왕 부차를 망하게 하는 이용물로
쓰였다. 사람은 좋은 것 본받기는 어려워도 나쁜 것 본받기는 쉬운 것이다.
◈효의위선(孝義爲先)◈
382
(효도와 정의가 가장 우선이다)

세상에는 천만 가지 경전에 있어도 효도와 정의가 먼저이다.

「명심보감」의 '계선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유가(儒家)의 강령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이다.
제가(齊家)중에는 효도와 우애가 중심이다.
세계 어느 종교에서도 효도에 관한 경전을 두고 있지 않으나, 유가는 종교
는 아니지만 효경이라는 독립된 경전을 두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
으로 국가적으로 권장하는 덕목이 효도이다.
효도정신이 나아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발전하며, 충신을 찾으려면 효도
문하에서 찾으라고 되어 있다.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효자 중 60% 이상이 청백리로 뽑힌 사람들
이다.
부모에게 불효하고서 이웃을 사랑하거나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를 외면하면서 어떻게 국가에
충성을 하겠는가.
맹자는 '명철한 임금이 백성의 생활을 마련할 때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넉넉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며 또 자기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 노인과 연장자를 섬기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
라고 했다.
증자는 그의 아버지가 양고기와 대추를 좋아하자,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양고기와 대추를 먹지 않았다.
효의 윤리가 타락한 이 때 효의 의가 우선되는 사회가 밝고 희망있는 사
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후생가외(後生可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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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과정에 있는 젊은 사람이 두려운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상에 알려진 사람보다 아직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후배가 두렵다. 사람
이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후배들은 아직 정력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무한히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공자는,
"뒤에 나는 후배는 정말 두려워할 만하다. 어찌 장래 그들의 학문과 도덕
이 나만 못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사오십이 되어도 그 학문과 덕이 못 이루
어져서 이름을 얻은 바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되느니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후배를 두려워하는 것도 진취성이 있는 사람에 한하여서지, 후생
전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후생가외는 젊은이들 앞에 무한히 발전할 여지가 있음을 뜻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젊은이들의 노력여하에 달린 것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자기 또래를 대할 때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법이 없
었으나 젊은이들에게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고 한다. 자기 또래에서는 자기만
한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의 후생가외도 재주와 덕을 갖추었던 수제자 안희를 두고 한 말로 '나
중에 난 풀이 우뚝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거중조정(居中調停)

사이에 들어서 조정한다는 뜻으로,
제3자가 싸우는 두 당사자를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알선하는 일을 말함.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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